# 95
20화
너무나도 쉽게 마현이 섭선으로 탁자를 태우며 구멍을 내자 패권단 부단주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훗.”
마현은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탁자에 구멍을 뚫은 섭선을 들어 패권단 부단주의 목 앞으로 내밀었다. 섭선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촤악―
마현은 섭선을 거두며 활짝 펼쳐들었다. 그 모습에 패권단 부단주는 움찔거렸다.
마현은 실소를 머금고 부채질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 장면은 고스란히 당화평을 비롯해 신도방 소방주 심지상과 속청검문 소문주 정호영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마현의 배포에 놀라는 한편 같은 정파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 5일 후에 보자.”
마현은 당문혜의 손을 잡고 있는 당비연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꼭 와야 해!”
“그래.”
마현은 고개를 끄덕여 다시 대답을 해준 뒤 다른 이들을 향해 포권을 취해 인사를 대신하고는 몸을 돌려 객잔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당화평이 당문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에 어떠냐?”
“글쎄요……, 소녀는 마 공자, 아니 마 소협이 어떤 인물인지 전혀 갈피를 못 잡겠어요.”
당문혜는 마현의 부드러운 표정과 웃음, 그리고 독무웅을 대할 때의 차가운 모습과 그에 준하는 매서운 기세를 떠올려 보았다. 무엇이 정확히 마현의 진면목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소녀가 보기에 마 소협의 무위가 오라버니와 비등해 보이던데요. 그 정도면 적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림에 큰 이름을 얻을 것이 확실해 보이네요.”
“그래도 내가 한 수 위다.”
당화평은 당문혜의 평가에 가슴을 펴며 가볍게 툭 쳤다. 그 행동에 당문혜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 생각도 너와 그리 다르지 않다. 저 정도 실력이면 감춘다고 해서 감춰지지 않겠지. 조만간 큰 명성을 얻을 것이다.”
당화평은 고개를 숙여 당문혜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당비연을 쳐다보았다.
“비연아.”
“왜, 오라버니?”
당화평은 당비연의 앞으로 걸어가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오늘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먹고 싶은 거?”
당비연의 눈동자가 순간 초롱초롱 밝게 빛났다.
“음……, 당과랑, 경단이랑…….”
당비연은 연신 음식 이름을 말했다. 당비연이 말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모두 단것들이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그건 왜 물어?”
“우리 예쁜 비연이에게 사 주려고.”
“에에? 진짜?”
당비연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함지박 만하게 벌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눈초리를 얇게 만들며 당화평을 째려보았다.
“의심스러워……. 이럴 오라버니가 아닌데.”
당비연은 아예 양손을 허리춤에 탁 올리더니 삐딱하게 서서 더욱 당화평을 째려보았다.
“오늘 잘했다.”
당화평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어 당비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 *
사천성 북서쪽에 기반을 둔 독패장 장원.
패도적인 성격을 지닌 무가로 유명했다. 헌데 왠지 음산한 느낌이 묻어나왔다. 독패장은 마치 성처럼 외장원과 내장원으로 나뉘는데, 내장원의 분위기는 더욱 음산했다.
그런 내장원 내 장주실.
독패장을 이끌어가는 장주를 비롯해 네 명의 원로, 총관, 그리고 독패장을 상징하는 세 무력단체인 패권단(覇拳團), 패장단(覇掌團), 패수단(覇手團) 단주들이 어두운 얼굴로 모여 있었다.
“크으으으!”
장주실 옆의 자그만 방.
그 방에서 피에 젖은 마기가 가득한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방음장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는 매우 크게 들려왔다.
이어 여자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꺄아아악!”
비록 방 밖으로 그 소리들이 흘러나가지는 않겠지만 장주실 안에 모인 이들은 마기에 젖은 음성과 여인의 비명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독패장 장주인 독모진은 두 눈을 찔끔 감았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지……, 휴우.”
독모진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상황이 어떤가?”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장주님.”
“역시 사천당문 때문이겠지?”
독모진의 음성은 무거웠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 관에서도 힘들다고 판단한 것인지, 며칠 전 사천당문으로 협조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흠…….”
“하필이면 이때에…….”
독모진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잠시 말아 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던 독모진이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원로님들, 어찌 되어가고 있습니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네.”
한 원로의 말에 독모진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독모진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빠지는가 싶더니 총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총관, 어느 정도까지 버틸 수 있겠는가?”
총관은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시 잠기는 모습이었다.
“독패장의 모든 힘을 집중적으로 투입한다면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총관의 답에 독모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원로들을 쳐다보았다.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한 달 안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독모진은 원로들을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아니오, 장주. 다 우리가 과하게 욕심을 부려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가 매듭을 풀어야지오.”
“하지만 그 마공서 덕분에 단 5년 만에 우리 독패장이 그동안의 설움을 딛고 당당히 사천성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르신.”
독패장은 원래 정파도 마도도 아니었다. 패도를 추구하는 정마지간의 문파였다.
그러나 패도를 추구하는 이상과 달리 독패장의 힘은 약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큰 힘 앞에 몸을 숙일 수밖에 없었다.
20여 년 전 사천성이 동서로 양분되어 있을 때 독패장은 어쩔 수 없이 마도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 힘의 균형이 깨어지고 동서가 아닌 남북으로 재편성이 되었을 때 독패장은 살아남기 위해 정파로 투신해야만 했다.
비록 정파에 투신해 겨우 명줄은 이어갔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과거 마도의 방파였다는 오명에 차가운 눈빛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당당히 그들의 눈빛을 받을 만큼 독패장은 힘이 없었다.
그런 독패장이 5년 전부터 급격히 성장했고, 지금은 온전히 사천성 성도에서 사천당문 다음으로 청성파의 속가제자들이 만든 속청검문과 함께 당당히 패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힘을 갖추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름 없는 반 권의 마공서 때문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그 마공서는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림인이면 누구나 그렇듯, 무림 방파면 어디나 그렇듯 마공서를 해부하기 시작했다.
비록 불안전한 마공서였지만 그 마공서는 놀랍게도 독패장의 패도적인 독문무공과 매우 잘 어울렸다.
애초에 독패장이 정마지간의 문파였기에 온전한 정파의 무가처럼 마공서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다. 깊은 고민 없이 원로들은 마공서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불안전한 마공서를 익힐 정도로 바보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마공서를 세세하게 해부해 필요한 부분들을 가져와 독패장의 독문무공인 패력공(覇力功)에 섞어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원로들의 예상대로 패력공은 그 이름대로 진정한 패도적인 무공으로 변모해 갔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무인이 자신들이 가진 무공보다 더 나은 상승무공을 보면 욕심을 참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마공서에 마음이 빼앗긴 원로들과 장주는 반대로 마공서의 부족한 부분을 패력공으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독패장의 되돌릴 수 없는 저주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마공서에는 독패장 원로들과 장주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마성이 숨어 있었다. 사실 마공서는 독패장의 패도적인 패력공과 아주 잘 어울릴 정도로 극양의 마공을 담고 있었다.
문제는 마공서를 기반으로 패력공을 조합한, 패력신공(覇力神功)이라 새로이 명명한 이 마공을 익히게 되면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극양의 기운이 몸에 쌓이게 된다.
의도적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마공서에는 이 극양의 기운을 다스리고 순화시키는 부분이 애석하게도 빠져 있었다.
마공서답게 극양의 기운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음기를 가진 피, 바로 음혈(陰血)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흐른 뒤였다. 또한 그들의 독문무공이었던 패력공은 이미 독패장 일반무사들에게 전수된 후였다. 그렇기에 독패장 장주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패력신공을 버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동물의 암컷 피를 취하며 방법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패력신공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동물의 암컷 피로는 도저히 극양의 기운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의 피, 여인의 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저 잠시일 뿐 그들은 곧 방법을 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그 결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지면 음혈 없이도 패력신공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독모진이 주위를 둘러보며 힘주어 말했다.
“음혈만 해결이 되면 지금까지 온전히 펼치지 못했던 패력신공의 진정한 힘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그리 되면 사천성의 패자는 사천당문이 아닌 우리 패력장이 될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그의 눈동자에서는 시퍼런 빛이 줄기줄기 쏟아지고 있었다.
“버텨야 한다, 반드시!”
달칵.
그때 장주실 한구석에 마련된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온몸이 피에 젖은 독무웅이 입가를 훔치며 나왔다.
“암 버텨야지요. 암요!”
* * *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초저녁.
촛불로 어둠을 밝힌 사천총타 집무실에 예기치 못한 귀인이 방문했다.
“흠…….”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음성 앞에 사천총타주 독수검혼 호태악이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자신의 서탁에 앉아 턱을 괸 채 보고서를 읽고 있는 마현이 보였다.
호태악은 마현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현에게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기세는 절로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지금 호태악 앞에 앉아 있는 마현은 5년 전 꼬마가 아니었다.
사천총타는 지리적 위치와 거점의 특이성 때문에 마교의 주요 인사들이 자주 찾는 곳 중 하나다.
그런 이유로 호태악은 일 년에 수차례 마교 주요 인사들을 맞이했고, 그들을 영접했다. 그렇기에 고위층을 영접하는데 이골이 난 이가 바로 호태악이었다.
그런데 호태악이 유일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부교주 허진이었다. 물론 교주는 논외 대상이었다.
‘휴우, 이건 부교주님보다 더 하군.’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도 같은 긴장감에 호태악은 마현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들어 소매로 콧잔등에 묻어나는 땀을 닦았다. 호태악은 눈앞에 앉아 있는 대공자 마현이 정말 5년 전에 본 그 꼬마 아이가 맞는지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탁!
마현이 두툼한 보고서를 다 읽은 후 서탁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호태악의 몸이 움찔거렸다. 혹 자신이 눈치를 살핀 것이 마현의 심기를 건드렸나 싶어 놀란 것이다.
“호 총타주.”
마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호태악을 불렀다.
“예, 대공자님.”
호태악은 마치 허진을 대하는 것처럼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이 보고서를 본교에도 올렸나?”
“아직 올리지 않았습니다.”
마현은 손깍지를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마현은 사천총타에 오자마자 사천성에서 일어나는 여인들의 실종사건에 대해 보고서를 올리라 명을 내렸었다. 그리고 지금 막 그 보고서를 다 읽었다.
호태악은 마현의 얼굴에서 설명이 부족하다 여겼는지 말을 덧붙였다.
“상황을 보고 본교로 올리려 준비 중이었습니다.”
“조사한 내용들이 본교로 올리기엔 빈약하군.”
“저, 그게…….”
날카로운 마현의 지적에 호태악은 소매로 식은땀을 훔쳤다.
“사천성 북부 지역, 그러니까 정파 세력권 내에서만 벌어진 터라 조사하기가 여의치 않아…….”
“이 일의 배후로 본교가 지목되고 있는데 그런 말이 나오나?”
나직하지만 무거운 호통에 호태악은 다시 움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