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15화
‘하긴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사실 아는 얼굴이 있었어도 반가운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손정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좋은 추억도, 기억에 담긴 얼굴도 없는 곳이었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마현의 눈빛은 차츰 감정에 젖어들었다. 그런 감정은 자연스럽게 손정을 떠올리게 했다.
‘녀석, 잘 지내고 있으려나?’
마현은 자연스레 몸을 돌렸다.
손정에 대한 추억에 젖어 든 마현은 그와 함께 구걸하던 곳이며, 몸이 좋지 않을 때 따뜻한 볕을 쬐던 담벼락 등을 천천히 걸으면서 둘러보았다.
그렇게 옮긴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사천성 중앙을 가로지르는 대로였다.
마현은 뒷짐을 진 채 고개 숙여 대로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눈으로 쭉 살폈다.
이 대로는 마현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준 곳이었다. 스승 허진을 처음 만난 곳이었고, 손정이 꿈을 이루고 무당파로 가게 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손정과 헤어지게 만든 곳이기도 했다.
마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대로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사천당문과 청성파를 중심으로 정파 세력이 강한 곳이었고, 남쪽으로는 마교 사천분타를 중심으로 마교 세력이 강한 곳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대로를 기준으로 화려한 번화가가 일종의 완충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대로에서 스승인 허진과 무당파의 무당제일검 청명진인이 만난 것이기도 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로를 살피던 마현의 눈에 당과를 파는 자그만 노점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정이가 당과를 참으로 먹고 싶어 했지.’
물론 자신도 무슨 맛인지를 궁금해 하며 손정과 함께 침을 삼킨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당과를 아직 먹어 보지 못했군.’
마교에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간식이었지만 마현은 그동안 잊고 있었다. 마침 당과가 눈에 띄자 입안에 침이 스르르 고였다. 한 번 먹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 마현은 노점상 앞으로 걸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중년의 노점상 주인은 시원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마현을 요모조모 살폈다. 굳이 따진다면 어른이 먹지 못할 음식도 아니지만 당과는 사실 어린아이들의 간식이었다. 그런데 한눈에도 제법 나이가 든 청년이 다가오니 조금은 의외인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노련한 장사꾼이기에 이내 그런 표정을 싹 지우며 활짝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뭔가 죄송스러움이 담겨 있는 듯 보였다.
“……저 손님.”
“……?”
“당과가 하나밖에 안 남았는데 괜찮겠습니까요?”
그러고 보니 노점대 위 쟁반에는 당과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직 여편네가 오후에 팔 것을 가져오지 않아서……. 그나저나 이 여편네는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 당과를 가져오지 않는 거야?”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주인은 애꿎은 마누라에게 화를 냈다.
“괜찮네, 하나면 족하니까.”
“그렇습니까요? 휴우, 다행입니다요.”
노점상 주인이 다시 활짝 웃으며 당과를 막 집어 들려는 그때, 맑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씨 아저씨.”
“아이구, 아가씨 오셨습니까요?”
그 목소리에 주인은 후다닥 옆으로 튀어나와 허리를 넙죽 숙였다.
“나 당과 하나 줘.”
허리를 넙죽 숙인 주인 앞에 대략 열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앙증맞게 생긴 여자아이가 한 명 서 있었다.
아이는 붉은 빛이 은은히 감도는 고급 비단으로 지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 귀족가 여인이나 여자아이들이 입는 궁장이 아니라 경장이었다.
‘무가의 여식인가?’
마현이 그렇게 생각할 때쯤 주인이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아가씨, 당과가 다 떨어졌는뎁쇼.”
“에엥?”
주인의 말에 여자아이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쉬움이 잔뜩 담긴 표정이었다.
“이잉…….”
앙증맞게 투덜거리던 여자아이의 눈이 한순간 반짝였다.
“앗! 저기 하나 남았잖아.”
여자아이는 손가락으로 가판대 위에 놓인 하나 남은 당과를 가리켰다.
“……그게.”
주인은 소매로 이마에 나는 땀을 닦으며 마현을 쳐다보았다.
“이미 사시겠다는 분이 있으셔서.”
“뭐야? 팔린 거야?”
여자아이는 귀엽게 미간을 좁히며 뺨을 불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제법 사납게 눈초리를 가늘게 만들며 마현을 노려보았다.
“오늘은 다른 곳에서 사 드시는 게…….”
“싫어! 하 씨 아저씨꺼가 제일 맛있단 말이야.”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반 시진쯤 기다리시면 소인의 여편네가 당과를 만들어 가져올 것입니다요.”
“반 시진이나? 나 어디 가야 하는데…….”
금세 시무룩해진 여자아이는 ‘어쩌지? 어쩌지?’ 하면서 서성였다.
“뭐 하시나? 어서 주지 않고.”
마현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요.”
주인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있다가 마현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가판대 앞으로 다가와 당과를 집었다.
“안 돼!”
그러자 여자아이가 마현 앞으로 뛰어와 당돌한 표정을 지었다.
“제게 양보해 주세요.”
“싫은데.”
마현은 당과를 받아들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바로 입을 한껏 벌렸다.
“이익!”
팍!
그것이 약올랐던지 여자아이가 입술을 깨물며 마현의 정강이를 발로 후려쳤다.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버릇없는 행동에 마현은 눈가에 힘을 주었다.
여자아이는 붉어진 얼굴로 뺨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당과에서 눈을 전혀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당과가 먹고 싶은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정도였다.
“그렇게 먹고 싶으냐?”
“그래! 먹고 싶다! 왜, 약올리게?”
“그렇다면?”
“이익!”
여자아이는 다시 입술을 깨물며 다리를 들어올렸다.
마현은 아이의 발길질에 그냥 맞아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살짝 옆으로 피하려는 순간 여자아이가 발을 그냥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 돼, 안 돼! 아빠가 일반 사람을 때리면 안 되는 거라고 했어.”
여자아이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어느 무가의 여식이 맞는 모양이었다.
마현은 당과를 쳐다보았다.
“흠…….”
마현은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이내 피식 웃음이 터졌다. 고작 당과 하나로 여자아이와 싸우는 자신을 보자 그냥 웃음이 터진 것이었다.
마현은 여전히 당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여자아이 앞으로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아이야.”
“왜!”
마현이 부드럽게 불렀지만 여자아이는 소리를 빽 질렀다.
“먹고 싶냐?”
“됐어! 안 먹어! 흥!”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개는 어느새 끄덕이고 있었다.
귀여운 그 모습에 마현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도 먹고 싶다. 왜냐하면 이제껏 살면서 당과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거든.”
“진짜? 왜?”
여자아이답게 금세 화를 풀며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한다.
“어릴 때 아주 가난했거든.”
“아무리 가난해도……. 우리 월이도 가난하지만 당과는 먹어봤다고 그랬는데. 월이는 부모님 졸라서 몇 번 사먹었다고 그랬는데……, 아저씨는 부모님이 안 사주셨어?”
“부모님이 안 계셨거든.”
“고, 고아?”
여자아이는 금세 불쌍하다는 눈으로 마현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저씨 먹어.”
여자아이는 나름 힘겹게 손을 들어 당과를 든 마현의 손을 앞으로 밀었다. 보아하니 곱게 컸을 텐데도 마음 씀씀이가 고왔다.
“지금은 그리 가난하지 않으니 언제든지 사먹을 수 있단다. 하지만 아저씨도 처음 먹어 보는 거라서 다 양보할 수는 없고, 반씩 나눠 먹을까?”
마현은 당과의 맛이 궁금할 뿐이지 이걸로 배를 채울 생각은 없었다.
“주인장. 이걸 반으로 나눠 주겠소?”
“알겠습니다요.”
주인은 당과를 받아들더니 깨끗한 꼬쟁이로 반씩 갈랐다.
마현은 두 개로 갈라진 당과 중 하나를 여자아이에게 내밀었다.
“먹자.”
“응.”
둘은 즐거운 듯 눈웃음을 지으며 동시에 당과를 깨물었다.
달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 * *
쑤아아앙― 팡! 팡! 팡!
날카로운 장력이 허공에서 터졌다.
그로 인해 주위에 쌓인 눈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자욱한 눈이 안개처럼 바람에 흩어지자 거기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바로 설린이었다.
“후우…….”
붉은 입술이 둥글게 모아지며 하얀 입김이 길게 흘러나왔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모으자 살짝 드러나는 그녀의 목과 어깨 맨살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아…….”
설린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광장을 마치 성벽처럼 둥글게 둘러싼 얼음벽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얼음벽들 위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 하늘 중앙에 해가 떠 있었다.
햇빛이 눈에 들어오자 눈이 따가워진 설린은 손을 들어 빛을 가렸다.
그런 설린의 눈에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은가락지 한 쌍이 보였다. 습관적으로 손을 당겨 다른 한 손으로 은가락지를 만졌다.
‘그러고 보니 벌써 2년이 흘렀네. 마 공자께서는 징마동에서 나오셨을까?’
은가락지를 바라보는 설린의 눈동자에 마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대공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기뻤고, 그가 징마동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우울했었다.
한 며칠 우울해지다가 말겠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꾸만 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럴수록 그녀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잡념을 털어 버리기에는 무공수련만 한 것이 없었다.
해서 설린은 어느 날부턴가 거의 폐관수련이나 다름없이 무공수련으로 모든 시간을 썼다.
“아가씨.”
그녀의 동공 안으로 한한파파가 들어왔다.
설린은 한한파파가 다가오자 얼른 손을 뒤로 감추었다. 특별히 감출 것도 없는데, 마치 뭐라도 잘못한 것처럼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궁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왜?”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급한 거야?”
설린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씻고 가실 시간은 되실 거예요. 거처로 가실 거죠?”
“어.”
한한파파는 그녀와 함께 거처로 향했다. 동궁 광장을 나와 거처로 가던 한한파파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면서 설린의 얼굴을 빠끔히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가는 내내 묘한 눈초리로 자신을 힐끗거리자 설린은 미간을 좁혔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요.”
한한파파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뭔데?”
설린은 여전히 별 관심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단지 한한파파가 말을 걸었기에 대꾸한 것뿐이었다.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시던 소식인데…….”
한한파파는 일부러 과장되게 말하며 설린의 감정을 건드렸다. 설린은 내딛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한한파파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한파파는 평생 설린을 돌본 유모였다. 그런 그녀였기에 다른 이는 몰라도 한한파파는 알아차렸다. 미세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는 것을.
“……마 공자 ……소식이야?”
여전히 감정이 담기지 않았고, 달리 들으면 차가운 목소리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녀답지 않게 말이 간간이 끊어지며 늘어졌다.
“궁금하세요? 마 공자가?”
한한파파는 얄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