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8화
“오늘 하루는 코가 비틀어질 때까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좋아하던가?”
“술을 좋아하는 놈들인데 요즘 통 마음 놓고 술을 먹은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아주 환장하고 있습니다.”
철용이 왕귀진의 말에 덧보탰다.
“그나저나 주군, 대공자 위에 오른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왕귀진과 철용이 마현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다 너희들 덕분이다. 오늘은 너희들도 마음 놓고 술을 마시도록.”
마현은 탁자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한 잔들 받아라.”
왕귀진과 철용은 공손히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그렇게 가볍게 몇 순배가 돌았다.
“주군.”
왕귀진이 마현을 불렀다.
“말하라.”
“이 술을 끝으로 속하 왕귀진은 물론, 흑풍대원 모두 2년간 술을 끊겠습니다.”
“……?”
“저희도 2년 동안 더욱 무공수련을 해서 지금보다 더욱 강해지겠습니다.”
왕귀진은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말만으로 든든하군.”
“클클클, 아둔한 녀석이 간만에 옳은 생각을 했구나.”
가릉은 술을 홀짝홀짝 마시며 왕귀진을 칭찬했다. 단지 대견스러워 말한 것인데 왕귀진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씰룩씰룩 지었다. 그러더니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철용을 쳐다보았다.
“사실 부대주의 생각입니다.”
“대, 대주.”
그걸 솔직히 말해 버리자 오히려 철용이 더 당황한 듯했다.
“클클클, 누구 생각에서 나오면 어때? 안 그렇습니까, 주군?”
가릉은 무안해하는 왕귀진과 철용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이장로가 늦는군.”
“염왕대 기 대주를 데리고 온다고 그랬습니다. 아마 그래서 늦는 것 같습니다.”
삼안혈화가 마현의 말에 대답할 때 마침 문이 열리며 회회혈마가 안으로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군.”
회회혈마는 너무나 거대한 뱃살에 잘 접히지도 않는 허리를 애써 숙이며 예를 올렸다.
“앉으라.”
“기 대주도 함께 왔습니다.”
회회혈마는 미리 보고하지 않고 기건양을 데리고 와서 그런지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 탓인지 얼굴에는 금세 구슬땀이 맺혔다.
“같이 들어오라.”
마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회회혈마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소매로 얼굴에 가득한 땀을 닦았다.
“들어오게.”
회회혈마의 뒤를 따라 기건양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염왕대주 기건양이라고 합니다.”
이미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처음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기에 기건양은 예를 다해 허리를 숙였다.
“구면이군. 이장로와 함께 앉으라.”
하지만 비어 있는 의자는 하나뿐이었다.
“저희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철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가려고? 아구아구!”
신나게 음식을 먹던 왕귀진이 고개를 들어 철용을 올려다보았다. 철용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왕귀진을 노려보았다.
“수하들만 따로 놔두기 그래서 그렇습니다.”
철용은 난처한 얼굴로 왕귀진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럼 조금 있다 연무장으로 가지.”
“속하들은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철용은 영문도 모르는 왕귀진을 잡아끌다시피 하며 방을 빠져나갔다.
회회혈마와 기건양은 왕귀진과 철용이 나가자 빈자리로 가 앉았다.
“가 당주에게 들었다. 수고했다.”
마현은 술병을 들어 회회혈마에게 내밀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주군.”
회회혈마는 공손히 마현의 술을 받았다.
“그대들도 한 잔씩 하지.”
마현은 가릉부터 시작해 삼안혈화와 역천마도에게 술을 한 잔씩 따랐다.
“이제 내 사람이 된 것 같군.”
마현은 특히 세 장로를 보며 흐뭇하게 웃음을 지었다.
“내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너희들에게 특별히 줄 것은 없다.”
마현은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따랐다.
“후에 내가 더 큰 힘을 갖게 된다면 그대들에게 교의 미래를 주지.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거뿐이다.”
마현은 그러면서 가릉을 쳐다봤다.
“가 당주, 그대도 오래 살게. 이왕 세 명의 교주님을 모셨으니 한 명 더 모시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겠지?”
마현은 어느새 비어 있는 가릉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고 홀로 조용히 앉아 있는 기건양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대도 한 잔 받으라.”
“감사합니다.”
기건양은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홀로 딱딱한 표정을 하고 술잔을 들었다.
마현은 술을 마시는 기건양을 잠시 쳐다보다 회회혈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장로, 그대는 나에게 줄 선물을 잘못 골랐어. 그러니 내 마음만 받지.”
“주, 주군…….”
회회혈마는 마현이 기건양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인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기 대주.”
“예, 사공자님. 아니 대공자님.”
“우리 같은 속물처럼 그대는 권력에 먹히지 말고 전처럼 오로지 본교만을 위해 일하라.”
회회혈마에게 반강제적으로 끌려온 기건양이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가 불편했다.
또한 그는 마현이 자신의 수하가 되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할 줄 알았다.
헌데 아니었다. 기건양은 마현의 말이 너무나도 뜻밖이었는지 고개를 들어 마현을 잠시 빤히 응시했다. 이내 기건양은 실례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왜, 본인의 말이 이상한가?”
“…….”
사실 그러했지만 기건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긴, 이상하게 들릴 법도 하지. 하지만 나는 말이다.”
마현은 술을 가볍게 입에 털어 넣었다.
“모두가 권력에 눈이 멀어 아옹다옹해도 오로지 조직을 위해 살아가는 몇몇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 그러니 그대가 내가, 그리고 여기 있는 이들이 못하는 그 일을 해주었으면 하는 것뿐일세.”
마현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 난 후 기건양의 술잔에 다시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목소리는 싸늘했다.
“하지만 말이야.”
마현은 기건양의 눈을 응시했다.
“권력에 눈이 멀거든 그때 본인을 찾아오라. 본인은 내 술을 받은 이가 다른 이의 아래로 가는 것을 보기 싫어한다. 그래서 검을 뽑으면 그자부터 죽이게 되지.”
술잔을 받는 기건양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더불어 술잔도 떨리며 술 몇 방울이 튀며 흘러내렸다.
“한 잔 마시고 가게.”
마현은 미소를 보이며 술병을 거뒀다.
기건양은 애써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술을 마셨다.
“그럼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다음에는 좀 더 편히 보았으면 하는군. 오늘 수고했네, 편히 쉬게.”
기건양은 허리를 깊게 숙인 후 방을 빠져나갔다.
기건양이 나가고 안에는 마현과 세 장로, 그리고 가 당주만 남았다.
“흠…….”
마현은 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영대주뿐인가?”
그 말에 세 장로의 눈빛이 반짝였다.
마현에 대해 모두 안다고 여겼는데 그들이 모르는 인물, 단체가 더 있었던 것이다.
“무영대주.”
마현의 목소리는 뚜렷한 방향 없이 방 안으로 퍼졌다.
“예, 주군.”
역시나 방향을 알 수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가릉은 이미 무영대주를 알고 있었기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세 장로는 달랐다.
추도영이 무영대의 존재를 세 장로에게까지 숨겼기에 몰랐던 것이다.
“괜찮다, 나오라.”
마현의 말에 지붕에서 검은 그림자가 툭 떨어졌다.
옷도 옷이지만 무영대주는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이미 가릉과 흑풍대에게는 얼굴을 보였기에 어쩔 수 없다지만 그 외의 다른 이에게는 자신의 얼굴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앉으라.”
“속하는 이렇게 서 있는 것이 더 편합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렇군.”
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무영대원들과 상의는 해보았나?”
마현의 물음 탓인지 복면에 뚫린 구멍으로 드러난 눈동자가 떨렸다.
“그대와 무영대는 본인이 원하는 바를 충분히 해주었다. 애초의 약속이 여기까지이니 원하는 바가 있으면 말해 보라. 자유를 원한다면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를 주겠다.”
잠시 말이 없던 무영대주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차피 세상에 없는 이들이 바로 무영대입니다. 달리 자유를 얻는다 해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는 몸들입니다. 주군께서 저희들을 거둬 주십시오.”
무영대주는 바닥에 엎드렸다.
“금제가 사라졌기에 자유를 가져도 되건만…….”
마현은 바닥에 엎드린 무영대주의 머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우우웅!
마현의 손과 무영대주의 머리가 공명했다. 그러자 무영대주의 머리에서 검은 색 안개가 흘러나왔다. 바로 마현이 무영대주의 머리에 심어 놓았던 마기였다.
그 마기는 원 주인을 찾아 마현의 손으로 스며들었다.
무영대주는 금제를 막기 위한 또 다른 금제가 해제되었음을 느끼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는 이제 온전한 자유를 얻었다. 생각이 바뀌면 지금 다시 말하라.”
“어찌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습니까. 저와 무영대는 주군께 의탁하기로 이미 논의를 마쳤습니다.”
“일어나라.”
무영대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현은 무영대주를 향해 술잔을 내밀었다.
“나에게 충성을 다오.”
조금은 뜬금없는 말이었다. 무영대주는 그 뜻을 파악할 수 없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무영대주를 향해 마현이 술잔을 살짝 흔들었다. 그때서야 뜻을 파악한 무영대주는 탁자 앞으로 걸어가 술병을 들어 공손히 술을 따랐다.
마현은 그 술을 단숨에 마시고는 무영대주에게 내밀었다.
“무영대를 대표해서 내 마음을 받으라.”
“감사합니다, 주군.”
주군이라는 단어가 새삼 마음에 들었던지 마현은 미소를 지으며 무영대주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술잔을 받아든 무영대주는 복면을 반쯤 벗어 입만 드러낸 후 술을 마셨다.
“이제 내 식구니 다들 인사를 나누라.”
마현은 세 장로에게 무영대주를 소개했다.
“이장로 회회혈마일세.”
“삼안혈화예요.”
“역천마도요.”
“무영대주요.”
세 장로의 인사에 무영대주는 고개만 살짝 까닥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인사를 나누자마자 마현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럼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지붕 위로 사라졌다.
“크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영대주의 행동에 기분이 나빴던지 회회혈마는 거친 헛기침을 내뱉었다.
“주군, 저자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회회혈마의 질문에 대한 답은 옆에 앉아 있던 가릉이 했다.
“장로들께서는 그를 모르지만 그는 장로들의 속고쟁이까지 훤히 꿰뚫고 있는 이라오. 클클클.”
“……?”
“뭐, 뭐예요?”
“아마 삼안혈화 장로의 몸에 난 점도 알고 있을 게요. 그리고…… 무영대주, 오늘 칠장로 젖가리개 색은 무언지 말해 줄 수 있나?”
가릉은 농담 삼아 천장으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오늘은 젖가리개를 안 했습니다.”
“꺄악!”
“으응?”
삼안혈화는 가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고, 가릉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하하하!”
“푸하하하하!”
* * *
마현은 조용히 술자리에서 나와 부마전으로 향했다. 대전회의 이후 아직까지 스승인 허진의 얼굴을 보지 못한 이유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