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7화
“비록 강압적인 명에 의해 나갈 수밖에 없었으나…… 차마 공자님들의 사적인 다툼에 수하들을 밀어 넣을 수 없어 도, 돌아섰습니다.”
기건양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많이 편해져 있었다. 그런 기건양이 갑자기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쿵!
기건양은 대전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소리쳤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다.
이로써 모든 잘못이 이미 죽은 대공자에게로 돌아갔다.
“물러가라.”
사공소는 이마를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흑풍마군.”
“예, 교주님.”
“굳이 죽일 필요까지 있었는가?”
사공소의 목소리가 무거움을 벗어나 차가워졌다.
“신은 적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사옵니다.”
“그래도 대공자다! 죽이더라도 불탄 기둥에 그토록 참혹하게 수급까지 건 것은 과했다.”
“마음을 주고받은 적이라면 응당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했겠지만, 그는 비열한 적이었습니다.”
사공소는 마현의 대답에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더 이상 추궁할 것이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해도 더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표면적으로 마현은 교의 율법대로 행했을 뿐이었다. 그 진의는 어떻든 간에.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
사공소는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사유야 어떻든 간에 감히 사공자가 대공자를 처참하게 죽인 것은 명백히 잘못한 일. 엄중한 벌로 다스려야 할 줄 아옵니다.”
당주급 인사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보아하니 사공찬이나 도종극 파벌 쪽 인사인 듯 보였다.
마현은 그 인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쳐다보았다. 마기도, 살기도 담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지그시 쳐다볼 뿐이었다.
“신 역시 그 의견에 동…….”
그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인물이 일어나다가 그런 마현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순간 말문이 탁 막혔다. 이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가 싶더니 황급히 입을 다물며 자리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전 의견을 낸 당주 역시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 버렸다.
‘과거 교주님을 보는 듯하군. 클클클.’
가릉은 그 모습에 속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느낌은 가릉뿐만 아니라 사공소 본인도 여실히 느꼈다. 아직은 여의주를 물지 못한 이무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여의주를 입에 문 채 승천의 때만 기다리는 잠룡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현은 이미 눈빛만으로 대전 안의 분위기를 휘어잡고 있었다.
이대로는 결론이 나오지 못함을 깨달았다.
“흑풍마군은 잠시 물러나 있으라.”
“명을 받드옵니다.”
마현은 허리를 깊숙이 숙인 후 몸을 돌렸다.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 마현은 깊은 심해와도 같은 눈빛으로 대전 안의 모든 인물을 응시한 후 마주전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조용하던 마주전에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율법대로 행했다고는 하지만 대공자를 처참하게 죽였나이다. 엄하게 다스려야 하옵니다.”
“그러하옵니다, 교주님. 부디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아니옵니다. 비록 죽은 자가 대공자이오나 사공자는 율법대로 행했을 뿐이옵니다. 그런 이에게 중한 벌을 내린다 함은 교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옵니다. 그러니 선처를 내려 교의 율법이 살아 있음을 교인들에게 알려야 하옵니다.”
“그건 당치도 않는 말이옵니다.”
여전히 통일되지 않은 의견이 팽팽히 대립했다.
“신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
혈월마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란이 사그라졌다. 감히 대장로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마냥 내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하라.”
“사공자에 대한 처우보다 이제 공석이 되어버린 대공자 자리를 먼저 해결하는 게 더 급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마현의 처벌에 대해 떠들던 사람들의 눈빛이 그 한 마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공소는 그 모습에 낯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생각하는 바가 있는가?”
“신의 생각에 의하면 순리대로 이공자를 대공자에 임명하심이 어떨까 하옵니다.”
“독혈마군을?”
“그러하옵니다, 교주님.”
혈월마성은 공손히 대답했다.
“신의 생각은 다르옵니다.”
그때 회회혈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인가?”
잠시 당황하는 혈월마성을 향해 회회혈마가 다부진 음성으로 말했다.
“선례를 따르는 것이 옳을 줄 아옵니다.”
“……?”
“당연히 율법에 따라, 그리고 선례에 따라 흑풍마군이 대공자 자리에 앉는 것이 옳은 일이란 생각이 드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
혈월마성이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대장로.”
“선례라니, 선례라니! 여기가 어디라고 그 가당치 않은 말을 내뱉는가?”
“가당치 않은 말이라니요. 그렇다면 지금 대장로께서는 지금 제가 없는 말을 지어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혈월마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회회혈마의 표정과 눈빛에서 자신이 모르는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교주님. 이 노신이 한 말씀 올리고 싶사옵니다.”
이어 들려온 칼칼한 목소리에 혈월마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홱 돌렸다.
‘가, 가릉?’
혈월마성은 가릉과 회회혈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둘 사이에 눈빛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가릉은 비록 당주의 신분일 뿐이지만 세 명의 교주를 섬기며 오랜 시간 마교와 함께한 인물이었다. 그의 말이 주는 무게는 장로급 이상으로 무겁다.
“소신의 기억에 의하면 대략 50여 년 전으로 기억하옵니다, 교주님.”
가릉의 말에 사공소는 불현듯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50여 년 전, 교주님이 소교주님으로 계실 때의 일이 생각나시옵니까? 비록 지금과 다른 사안이었지만…… 그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으로 이 노신은 기억하고 있나이다.”
“가 당주! 지, 지금 무얼 말하는 겐가?”
혈월마성은 당황했던지 말을 살짝 더듬으며 가릉의 말을 자르려했다.
“대장로, 지금 그저 당주라고 해서 그렇게 말을 막아도 되는 것이오?”
“무어라?”
“당주의 말이라고 지금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요!”
“억지로 과거의 일을 들먹이려고 하니 그러는 것이 아닌가!”
가릉의 말을 시작으로 잠시 사그라졌던 소란이 다시 피어났다.
“조용! 조용!”
사공소가 역정이 담긴 목소리를 터트렸다.
“모두 조용하라!”
사공소는 조용해진 대전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강한 자가 군림한다!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공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풍마군을 대공자로 임명한다.”
“교, 교주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옵니다!”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죽고 싶은 자, 입을 열어라!”
사공소의 몸에서 거부할 수 없는 마기가 폭사되었다.
“하지만 대공자를 처참하게 죽인 죄 또한 가볍지 않다. 흑풍마군을 대공자로 임명하는 것과 동시에 징마동(懲魔洞)에서 2년간 폐관수련을 명한다!”
“교, 교주님!”
다시 당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명을 받드옵니다.”
하지만 그 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목소리 또한 흘러나왔다.
* * *
쾅!
주먹이 두꺼운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는 거센 힘을 이기지 못하고 괴로운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대공자라니요, 대공자라니요.”
혈월마성은 사공찬 앞에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대공자라…… 정녕 아버지께서 그리 명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도대체 교주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그리하셨는지 정말 이 몸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혈월마성의 목소리 역시 표정처럼 거칠었다.
“대공자라…….”
사공찬은 팔짱을 끼며 미간을 좁혔다.
“후후…….”
심각해진 표정과는 달리 사공찬의 입에서는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또한 입가에 잔잔한 미소도 그려졌다.
“대장로.”
혈월마성은 사공찬의 모습이 전과 많이 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참으로 대단한 녀석입니다.”
“예?”
“3년 만에 대공자 자리라…….”
사공찬은 피식 웃으며 혈월마성을 향해 말했다.
“만약 내가 사공자, 아니 이제 대공자라고 불러야 하나? 어찌되었든 대공자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군요.”
혈월마성은 사공찬의 이야기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부드러워진 사공찬의 분위기만은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런 그를 내가 정당하게 누르고 소교주 자리에 오르면 아버지께서는 나를 인정해 줄까요?”
“…….”
혈월마성은 말없이 사공찬을 바라봤다.
예전의 그가 날카로운 검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 칼날에서 내려와 대로를 편히 걷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새 자신의 주군은 한층 더 부드럽고 깊어져 있었다.
사공찬은 이미 비어 버린 찻잔을 손으로 매만졌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습니다. 대공자를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아서 그냥 신세한탄 해본 것입니다.”
사공찬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차를 들었다.
“……소주군.”
“2년간 징마동에서 폐관수련이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더 강해지겠군요.”
“…….”
혈월마성은 그저 사공찬의 말을 들어주었다.
“대장로,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만 해주십시오. 무엇이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저는 그가 강해지는 것보다 더 강해질 것입니다.”
“……!”
“그러니 2년간 저도 폐관수련에 들어갈까 싶습니다. 준비를 해주십시오.”
“……소주군!”
혈월마성의 눈이 흔들렸다. 당황해서가 아니다.
사공찬을 볼 때마다 가장 아쉬웠던 것이 편협한 듯한 성격과 마음에 담아두고 생각하지 않는 불같은 성격이었다. 그게 사라졌다.
정말로 이제는 어디에 내어놔도 한 단체를 충분히 이끌어갈 수 있는 수장다운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 노신이 책임을 지고 소주군의 폐관수련을 준비하겠습니다.”
사공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굳게 닫힌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사공찬의 머리를 시원하게 건드리고 지나갔다.
“아버지와 술 한 잔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말에 활짝 개었던 혈월마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당당하게 소교주 자리에 오르는 날, 제가 직접 술병을 들고 찾아갈 생각입니다.”
사공찬은 파란 하늘을 망연히 쳐다볼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 * *
어둑한 밤하늘에 별들이 깔렸다.
흑풍각 내에 조촐한 술상이 차려졌다. 그 자리에는 마현을 비롯해, 가릉과 삼안혈화, 역천마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끼이익.
그때 방문이 열리며 왕귀진과 철용이 안으로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군.”
왕귀진과 철용은 마현을 향해 군례를 취했다.
“앉으라.”
마현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 둘에게 비어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거하게 술상을 차려주고 오는 길인가?”
왕귀진과 철용이 자리에 앉을 때 가릉이 물었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 보면 흑풍각 뒤 대연무장 쪽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