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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무림에 가다-76화 (76/351)

# 76

1화

조용한 밀실.

회회혈마가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사내, 염왕대주 파도귀(破刀鬼) 기건양을 쳐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 대주.”

기건양을 부르는 회회혈마의 목소리는 자못 심각했다.

“결국 은원의 빚을 받으시려는 겁니까?”

과거 기건양은 회회혈마에게 목숨을 빚진 적이 있었다. 그때의 빚으로 인해 기건양은 그 어떤 것이든 회회혈마의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약속을 했었다.

회회혈마는 기건양을 쳐다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 빚이니 갚아야겠지요. 알겠습니다.”

“고맙네.”

“하지만 약조대로 이번 한 번뿐입니다.”

기건양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를 말이겠는가? 이번 한 번이면 충분하네.”

회회혈마는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결국 대공자께서 검을 뽑아든 모양이군요.”

회회혈마가 대공자 추도영의 사람이니 그 부탁 역시 대공자와 관련된 일이라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그것 말고는 특별히 회회혈마가 자신을 찾아와 부탁할 일은 없을 것이다.

“검이야 뽑았지.”

약간은 자조적인 목소리로 대답하는 회회혈마의 목소리에 기건양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검을 뽑기는 했는데……. 대공자가 아니라 사공자일세.”

기건양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지금 사공자라 하였습니까?”

“오늘 연회가 끝나면 사공자는 북해빙궁 사신을 배웅하러 본교를 벗어날 것일세. 그때 웅천대와 함께 사공자를 쳐주게.”

회회혈마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사공자 마현이 칼을 뽑아들었다고 했는데, 회회혈마의 부탁은 대공자의 무력단체인 웅천대와 함께 사공자를 치라는 것이 아닌가.

“정확히 말하자면 사공자를 치는 시늉을 해달라는 거지.”

회회혈마의 말에 순간 기건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말씀은?”

회회혈마는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공자를 함정에 빠트리는 것입니까?”

역시 회회혈마는 고개만 끄덕였다.

“배신이군요.”

회회혈마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을 띠었다.

그가 비단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이 방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배신이라……, 후후후.”

회회혈마는 씁쓸한 웃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나라고 별수 있나?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네.”

마현을 떠올리자 회회혈마는 몸이 다 떨렸다.

그것을 보며 기건양은 그저 나직한 침음성만을 머금을 뿐이었다.

“흠…….”

“어찌되었든 자네만 믿네.”

회회혈마는 마저 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거니와 목숨 빚도 있으니 그리 하겠습니다.”

회회혈마를 마중하기 위해 기건양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려 방을 나가던 회회혈마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 자네에게 충고 한 마디 해도 되겠나?”

기건양은 고개를 살짝 숙여 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공자와 부딪히지 말게. 그분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더 좋고…….”

회회혈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무서운 분입니까?”

“흐음…….”

회회혈마는 무거운 신음을 토해내며 기건양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오늘 보게 되겠지만…… 짧은 내 식견으로 보건대 교에서 가장 무서운 이는 바로 사공자일 거네.”

회회혈마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약속을 지켜줄 거라 믿고 가네.”

회회혈마는 기건양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방문을 빠져나갔다. 기건양은 회회혈마가 나간 방문을 잠시 쳐다보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가장 무서운 이가 사공자, 흑풍마군이라…….’

기건양은 이미 차갑게 식은 차를 마시며 회회혈마가 빠져나간 방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누구보다도’라는 수식어를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기건양은 회회혈마에 대해 잘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적어도 기건양이 아는 회회혈마는 비록 음침하고, 권력을 탐하고, 암수를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자이지만, 그런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쉽게 누군가를 배신할 만큼 가벼운 인물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교에서 가장 무서운 이가 사공자 흑풍마군이라고 했다.

“흠…….”

기건양의 입에서 다시 무거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회회혈마의 마지막 말이 자꾸 떠올라 마음을 무겁고 심난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중립은 용납될 수 없다는 무언의 압박인가?’

사실 회회혈마가 굳이 자신에게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할 필요가 없었다.

회회혈마라면 자신이 이끄는 염왕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광풍적월대나 지옥참마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굳이 은원을 들먹이며 나를 끌어드린 이유가 뭔지 알겠군.’

나름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이 있어 기건양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일단 은원은 갚아야 하니…….’

기건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연회가 끝이 났다.

추도영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마현과 설린의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장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 추도영 옆으로 회회혈마가 다가왔다.

“조금 전 염왕대 기 대주와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광풍적월대나 지옥참마대도 아니고 여전히 중립을 고수하던 염왕대를 움직이다니요…….”

추도영은 흡족한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이 기회에 사공자도 잡으면서 염왕대마저 손에 넣으시면 이거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가 아니겠습니까?”

추도영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록 회회혈마와의 은원 관계로 염왕대가 움직이는 것이지만, 염왕대주와 대원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던, 외부의 시각으로는 분명 추도영의 편으로 돌아섰다고 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되면 결국 염왕대는 좋든 싫든 추도영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번 일은 호원칠무대 중 세 무력단체가 자신 아래 있음을 온 교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정말 이 추 모는 이장로가 있어 든든합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회회혈마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표정은 허리가 숙여지는 순간 변했다.

그것을 전혀 알 리 없는 추도영이 마현이 사라진 마주전에서 시선을 떼고 회회혈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이장로의 충심은 언젠가 꼭 보답하겠습니다.”

추도영은 회회혈마의 어깨에 손을 살포시 얹은 후 가볍게 두들겼다.

‘며칠 전만 해도 본인 역시 그런 꿈에 젖어 있었소. 하지만…… 이제는 그럴 기회가 없을 것이오.’

그리 생각했지만 회회혈마는 그저 허리를 한 번 더 숙일 뿐이었다.

“남들 눈이 있으니 나는 웅천각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장로께서 이 일을 잘 마무리해 주실 거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추도영 자신이 직접 나서고 싶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마현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회회혈마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모두가 자신이 한 일임을 알게 될 것이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추도영은 회회혈마의 대답에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마주전을 빠져나갔다.

그런 추도영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회회혈마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미안하오, 대공자.’

회회혈마답지 않은 표정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본인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소. 그리고 염왕대 역시 대공자가 아닌 사공자에게 바치는 선물이오.’

잠시 복잡한 눈빛을 띠던 회회혈마의 눈빛이 순간 굳은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 * *

연회가 마무리되는 그 시각.

추도영의 웅천각 중앙 대연무장에 웅천대가 질서정연하게 정렬했다.

“주군으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웅천대주는 웅천대원들을 향해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후, 염왕대와 함께 사공자 흑풍마군을 친다.”

대원들의 몸에서 은은한 투기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주군을 위해 반드시 우리 손으로 흑풍마군의 목을 쳐야 한다, 알겠나?”

“충!”

웅천대가 일제히 군례를 취하며 복명했다.

* * *

마교로 들어서는 천산 협곡에 위치한 자그만 터.

기척을 죽인 채 웅천대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무리가 그곳에 나타났다. 바로 웅천대가 기다리던 염왕대였다.

“늦어서 미안하오.”

염왕대주 기건양이 웅천대주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이렇게 주군을 위해 큰 힘을 실어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오.”

웅천대주는 기건양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염왕대를 살폈다. 염왕대는 모두 백 명이었는데 모습을 드러낸 수는 그 절반인 오십 명이었다.

“은밀함을 위해 염왕대 제1대와 4대만 데리고 왔소.”

웅천대주의 눈길을 알아챈 기건양이 간단히 설명했다.

“오히려 많은 수는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어 일부러 수를 줄였소. 그리고 웅천대와 우리 염왕대 1대와 4대만으로도 흑풍대를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웅천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확실한 것이 좋긴 하나 지나치면 오히려 못한 법도 있는 법이다. 그게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물론 일이 터지면 다들 추도영이 벌인 일이라는 것을 짐작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증으로 끝나야지 물증이 남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때 웅천대원 하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사공자가 북해빙궁 인물들과 함께 본교를 나섰습니다.”

“알았다.”

보고를 받은 웅천대주는 굳은 눈빛으로 기건양을 쳐다보았다.

“주군께서는 오늘 일을 잊지 않으실 겁니다.”

웅천대주는 기건양에게 믿음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가자!”

“명!”

기건양 역시 염왕대에게 명했다.

“준비하라.”

“충!”

대원들의 우렁찬 음성이 공터에 울려 퍼졌다.

“이미 매복 장소를 보아두었습니다. 우리가 앞장서겠소.”

“알겠소.”

그렇게 웅천대와 염왕대는 몸을 은밀히 감춘 채 자리를 벗어났다.

협곡을 따라 내려온 웅천대와 염왕대는 천산에서 서북쪽으로 이어진 길이 훤히 보이는 곳에 다시 몸을 숨겼다.

염왕대주는 웅천대의 뜻에 따라 몸을 숨기며 주위를 살폈다.

‘과연 매복 장소로 이보다 좋은 곳이 없겠군.’

자신들이 몸을 숨긴 이 자리는 관도가 훤히 보이는 곳이지만 반대로 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그런 지형이었다.

그렇게 몸을 숨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드디어 문제의 손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웅천대 사이에 은은한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살기를 느끼며 염왕대주는 조용히 염왕대 1대와 4대의 부대주들을 전음으로 불렀다.

『예, 대주.』

『하명하십시오.』

그들을 향해 기건양이 마지막으로 명했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우리는 오늘 사공자와 흑풍대를 치지 않는다.』

『명!』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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