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25화
후아앙!
그러는 사이 양곽원의 주먹이 마현의 머리로 날아왔다.
“그리스!”
마현은 신형을 다시 한 번 급히 틀며 보법을 밟아오는 양곽원의 발아래에 그리스를 시전했다.
스슷!
지면의 마찰력이 사라지며 양곽원의 몸이 찰나지만 휘청거리며 작은 빈틈이 드러났다.
마현의 눈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내로우 헤비 그레버테이션(Narrow heavy gravitation)!”
마현은 양곽원이 서 있는 자리에 소폭의 중력 마법을 걸었다.
“헙!”
갑자기 어깨를 짓누르는 중력에 양곽원은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무거워진 공기가 양곽원의 몸을 약간 내리눌렀다.
“아이스 볼!”
마현은 다시 손 안에 아이스 볼을 만들어 양곽원의 옆구리를 후려치듯 날렸다.
쾅!
폭음과 함께 다시 양곽원의 몸은 옆으로 주르르 밀려나갔다.
“큭!”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양곽원이 가벼운 신음을 내뱉었다는 것이었다.
양곽원은 몸을 반듯하게 세우며 새하얀 얼음으로 뒤덮인 옆구리를 만졌다. 그러자 그 얼음은 다시 순식간에 물로 녹아내리며 바닥을 적셨다.
마현을 노려보는 양곽원의 눈에서 살심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흠!’
그 모습에 마현은 나직하게 침음성을 삼켰다.
어찌되었든 양곽원은 손님이었다.
‘가급적 좋은 방향으로 끝내야겠군.’
마현으로서는 이 정도면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각인시켰다고 생각했다.
생각만큼이나 움직임도 빨랐다. 마현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제자를 잘 키웠군.”
사공소는 흡족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마현에 대해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모든 것이 교주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허진 역시 마현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않은 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역시 그냥 내 제자로 받아들였어야 했어.”
“이미 늦어 버렸습니다, 교주님.”
사공소의 얄궂은 농에 허진 역시 여유롭게 대답했다.
“음?”
농을 주고받던 사공소는 안력을 키워 비무를 지켜보았다.
쾅! 쾅! 쾅!
비무대 위에서는 폭음과 함께 열기가 마구 터져 나갔다.
마현은 양팔에 자그만 방어막, 암 바클러를 씌워 양곽원의 주먹을 피하지 않고 일일이 막아가며 그의 품으로 다가갔다.
외형적으로 마현이 밀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양곽원의 맹렬한 공격에도 피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모습은 가히 패도적으로 보였다. 또한 그 공격 속에서도 비틀거리지 않고 무겁지만 힘 있게 내딛는 발걸음은 더욱 강렬하게 보였다.
‘마, 맞지 않고 있다!’
주먹을 내지르는 양곽원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분명 자신의 주먹이 마현의 몸 곳곳을 때리고 있었지만, 그는 느꼈다.
그리고 보았다. 모두가 희미하지만 얇고 투명한 막에 가로막혀 마현의 몸에 그 어떤 충격도 주지 못하고 있음을.
“이익!”
양곽원은 입술을 씹으며 내력을 극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마현의 얼굴을 향해 내질렀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면 속도가 떨어지는 법.
“아이스 에로우!”
큰 동작으로 인해 만들어진 작은 틈 사이로 마현은 보통 아이스 에로우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얼음화살을 양곽원의 목으로 날렸다.
쌔앵!
얼음 화살은 공기마저 날카롭게 꿰뚫으며 양곽원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피할 수도 없는 속도로 날아오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양곽원은 패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양곽원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수비를 포기하고 주먹에서 힘을 뺐다.
‘흠?’
하지만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이내 눈을 떴다.
그 순간 그의 눈은 더욱 크게 떠졌다.
마현은 양곽원의 주먹 앞에 머리를 내민 상태였고, 그 자세 그대로 손을 뻗어 양곽원의 목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양곽원은 잠시 공황에 빠졌다.
그의 눈에 마현이 뒤로 물러나며 포권을 취하는 모습이 보였다.
“손속에 사정을 두셔서 감사합니다.”
마현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와아아아아!”
“우와아아아!”
“마현, 만세!”
“양곽원, 만세!”
“마교, 만세!”
“남해태양궁, 만세!”
그 순간 귀가 멍멍할 정도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양곽원은 알아차렸다.
사람들의 눈에는 무승부에 가까운, 하지만 극적인 차이로 자신이 이긴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양곽원의 입술이 떨렸다. 바로 모멸감 때문이었다.
“아, 아니오. 이 승부는 마 공자의 승리나 다름없소.”
하지만 보는 눈이 있어 양곽원 역시 포권을 취하며 비무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모멸감에 휩싸인 양곽원의 눈에 마현을 향해 활짝 웃고 있는 설린의 얼굴이 보였다.
양곽원은 죽일 듯이 마현을 노려보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손톱이 파고들어 손바닥에서 피가 났지만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 양곽원을, 이 양곽원을…….’
양곽원의 가슴에서는 살기와 함께 설린의 화사한 웃음을 혼자 가져가 버린 마현에 대한 질투심이 피어올랐다.
“나를 제대로 만족시키는군.”
다른 이들은 몰라도 사공소는 보았다. 아니 몇몇 정도는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이 비무는 마현의 압승이라는 것을.
사공소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짝. 짝. 짝!
사공소가 박수를 치자 마주전 안은 함성과 함께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본좌를 위해 흥을 돋구어준 두 아이에게 선물을 내리겠노라. 둘은 앞으로 오라!”
사공소의 말에 마현과 양곽원은 비무대에서 내려와 사공소 앞으로 걸어갔다.
“내 눈이 즐거울 정도로 좋은 승부였다.”
사공소는 양곽원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 남해태양궁 양곽원 소궁주에게 만양초(滿陽草)를 내리노라.”
만양초는 극양의 영약이었다.
최고의 영약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영약도 아니었다.
“가,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이는 양곽원의 목소리는 축 가라앉아 있었다.
양곽원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한 수치와 모멸은 없었다. 적어도 사공소는 승패를 알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 우리 흑풍마군에게는 무얼 내리면 좋을까?”
사실 사공자면 웬만한 것은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렇기에 사공소 역시 가벼운 고민에 빠진 것이다.
“신이 어찌 이런 날 교주님의 선물을 받겠사옵니까. 그저 마음만 받겠습니다.”
마현은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사양했다.
“본좌도 그러고 싶다만……, 너의 뜻대로 했다가는 천하에 본좌가 구두쇠로 낙인찍힐 것이 아니냐?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받아야 한다. 이건 네게 내리는 명이니라.”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사공소의 가벼운 농담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다면 신,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마현은 다시 한 번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청? 그래 무엇을 원하는가?”
사공소의 말에 마현은 눈동자를 돌려 추도영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불꽃이 튀는 듯했다. 마현은 추도영을 향해 보란 듯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추도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바뀌는 것을 보며 마현은 입을 열었다.
“신이 교주님의 은혜로 공자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공자들과 달리 교주님의 제자가 아닌 부교주님의 제자이옵니다.”
“그래서?”
“그래서 교내 많은 이들이 그런 이유로 신이 소교주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 단정을 짓는 듯하옵니다. 하여 신이 소교주 자리를 쟁취할 수 있음을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천명해 주옵소서.”
“크하하하하하!”
사공소는 마현의 말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교주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도 아니고, 쟁취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천명해 달라고 했다.
사공소는 세 공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냐! 네 청을 받아들이마!”
사공소는 마현의 청에 대한 답을 세 공자를 쳐다보며 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좌중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사공자 흑풍마군 마현이 비록 부교주의 제자이나 그 역시 당당한 공자 자리에 오른 마인이다! 엄연히 율법에 따라 흑풍마군이 소교주 자리를 쟁취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천명하는 바이다!”
“와아아아아!”
“흑풍마군, 만세!”
사공소의 천명에 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현은 허리를 펴며 추도영을 향해 싸늘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퍼석!
술잔이 추도영의 손 안에서 힘없이 부서졌다. 하지만 그 소리는 함성에 묻혀 버렸다. 추도영은 술잔의 파편마저 가루로 만들어 버리면서 주먹을 쥐었다.
그 주먹은 파르르 떨렸다.
손등에 힘줄이 불쑥 솟아오를 만큼.
『대공자님.』
회회혈마의 전음이 들려왔다.
『…….』
하지만 추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살기를 눈동자에 담아 마현을 노려볼 뿐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사공자를 죽일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하오.』
추도영 역시 기회만 된다면 마현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컸다.
『웅천대와…….』
회회혈마는 말끝을 살짝 흐렸다.
그제야 추도영은 고개를 돌려 회회혈마를 쳐다보았다. 그런 추도영의 눈에 비릿하게 웃는 회회혈마의 얇은 입술이 보였다.
『염왕대라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 말에 추도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염왕대?』
『혹시 몰라 얼마 전 미리 포섭을 해놓았습니다.』
회회혈마가 소리 죽여 웃고 있음이 눈에 보였다.
처음 듣는 소리다.
하지만 왜 이제야 그런 사실을 알리는지 추궁할 시간은 없었다.
『알았소. 염왕대까지 힘을 보태준다면…….』
『염왕대주는 이 일이 끝나는 대로 인사를 올리게 하겠습니다.』
『알았소. 자세한 것은 웅천대와 상의를 하시오. 나는 본교를 벗어날 수 없으니까.』
『알았습니다, 대공자. 이 회회혈마만 믿으십시오. 크크크.』
추도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마현을 노려보며 입을 살짝 열었다.
『수검, 웅천대를 준비시켜라.』
『명!』
추도영은 주먹을 말아 쥐며 겨우 살기를 갈무리시켰다.
‘죽기를 원한다면 죽여주지!’
* * *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천산을 빠져나갔다.
사공소의 환갑 연회가 끝나고 설린이 북해빙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교를 떠나는 것이었다.
올 때처럼 새하얀 팔두마차를 중심으로 북해빙궁의 설영대가 뒤따르고 있었고, 그 뒤를 흑풍대가 호위하고 있었다.
“축하해요.”
며칠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설린이 마차에 오르지 않고 마현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이제 정말 공자 자리에 오른 것이잖아요.”
설린의 말에 마현은 피식 웃음을 보였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신분의 한계를 지닌 자의 발악이지요.”
마현의 말에 설린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듣자하니 무공을 익힌 지 이제 삼 년이 조금 넘었다고 들었어요.”
“뭐 대충 그 정도 될 겁니다.”
“그 짧은 시간에 이처럼 대단한 무위를 가지다니 존경스럽네요.”
“다 교주님과 스승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마현의 말에 설린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
“누구나 그런 환경이 주어졌다고 다 공자님처럼 되는 건 아니라 생각해요. 그만큼 공자님이 뛰어나다는 뜻이라 여겨지네요, 저는.”
설린의 말에 마현은 부드러운 표정을 보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마차에서 바라보는 한한파파의 얼굴에는 근심과 대견함이 섞여 있었다.
일행은 천산 협곡을 나와 어느덧 천산 끝자락에 도달했다.
“이제 저는 돌아가야겠습니다.”
마현의 말에 설린의 눈에는 아쉬움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녀의 아쉬움은 원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 한 번 북해로 놀러오세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정식으로 초대하는 거예요.”
설린은 품에서 반투명한 비취에 문양이 새겨진 작고 새하얀 패를 꺼내 내밀었다.
“이걸 보이면 쉽게 빙궁으로 오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설린은 말에서 내려 마차에 올라탔다.
아쉬운 표정을 보이기 싫었던 그녀는 그대로 천산을 훌쩍 빠져나갔다. 북해빙궁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내내 부드러웠던 마현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식었다.
그때였다.
휘익, 휘이익, 착착착!
복면을 쓴 삼십 명의 무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현과 흑풍대를 에워쌌다.
“이제 시작이군.”
마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왕귀진을 불렀다.
“흑풍대주!”
“예, 주군!”
“저들을 모조리 죽여라!”
“충!”
왕귀진이 허리를 숙이는 순간!
투둑, 투둑, 그르르르륵!
땅바닥이 턱턱 갈라지더니 새하얀 뼛조각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낄낄낄낄낄.
-킬킬킬킬!
-먹이다! 먹이! 킬킬킬!
검이며, 도며, 창을 든 삼백의 새하얀 스켈레톤들이 복면을 쓴 삼십 명의 무인, 즉 웅풍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