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23화
여전히 앉아 있는 역천마도를 두 사람이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던 역천마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저녁, 술이나 한잔 합시다.”
“술이요?”
이런 분위기에서 술타령이나 하는 역천마도에게 삼안혈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새로운 주인을 섬겼으니, 이럴 때 술 한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
“그거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변절자들의 술자리라……. 크크크.”
“호호호호.”
“…….”
그들의 웃음에는 씁쓸함과 처연함이 묻어 있었다.
* * *
마주전으로 통하는 마주문과 마주문 사이 넓은 마당에 화려한 연회상들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로 인해 마주전 앞 넓은 마당은 분주했다. 시간이 흐르며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지만 시장바닥처럼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마주전 앞 넓은 마당 양쪽으로 연회상들이 차려졌다. 길게 늘어선 연회상 중앙에는 각각 두 개씩 장막이 쳐져 있었는데 그 장막에는 각각 다른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이번에 초대된 정파를 비롯해 남해태양궁, 북해빙궁, 남만야수궁을 상징하는 깃발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대받은 이들은 각각 자신들의 깃발이 세워진 장막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마주전이 세워진 월대 위에는 또 다른 큰 장막이 쳐져 있었다.
바로 교주와 부교주를 비롯한 마교 고위 인사들과 이번에 초대받아 온 네 개의 세력을 대표하는 이들이 앉는 특별석이었다.
처음에는 비어 있던 특별석 장막 안 의자에도 사람들이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따분함을 느꼈는지 두런두런 소소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는군.”
남만야수궁 소궁주인 호아왕 야율황기가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톡톡 두들기며 비어 있는 의자를 쳐다보았다.
“야율형, 원래 미인은 늦는 법이 아니겠소?”
남해태양군 소궁주 태양신성 양곽원이 야율황기의 말에 너털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흥, 그럼 저는 미인이 아니라는 소리예요?”
그 말을 들은 야화 야율선이 토라진 목소리로 콧바람을 팽 풀었다.
“야율 매(妹)도 한 이삼 년만 지나면 설 소저처럼 늦어도 된다는 소리야.”
“호호호.”
그 말에 마음을 풀었는지 야율선은 입을 가리며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흑풍마군도 안 보이는군.”
야율황기는 인상을 팍 쓴 채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후볐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 심드렁했지만 알게 모르게 설린에게 관심을 쏟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말에 양곽원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마현을 제외한 세 공자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설마 같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겠지?”
양곽원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설린은, 이런 자리에 누군가와 함께 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여인이었다.
“후! 그 설마가 사람을 종종 잡지.”
야율황기는 손톱에 낀 것을 입김으로 훅 불며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양곽원은 야율황기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위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조용해졌음을 깨달았다.
양곽원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거 정말 눈으로 보고도 못 믿을 장면이군.”
양곽원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의 눈동자가 멈춰져 있는 곳은 마주전으로 들어오는 마주문이었다. 활짝 열린 마주문으로 마현과 설린이 다정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임자 없는 몸이라면 납치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군.”
야율황기는 입맛을 다시고 뒷목에 깍지를 끼며 설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름답다는 것은 익히 알았지만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미치겠군.”
“흠…….”
야율황기의 말에 양곽원은 그저 나직한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 역시 설린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지만 화사하게 웃음을 짓는 것을 보니 그 아름다움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빙화라는 별호가 무색하리만큼 설린의 표정은 화사했다.
“곽원아.”
“예, 아버지.”
“설린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설린이라 하심은……, 혹 북해빙궁의 설 소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소궁주 설린을 말하는 것이다. 너도 몇 번 만나지 않았느냐.”
“알고는 있습니다만…… 왜 갑자기 설 소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시는지요?”
“이 애비의 생각에 너와 짝을 지었으면 어떨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예? 설 소저와 소자를요?”
“그래.”
“…….”
“싫으냐?”
“…….”
“이 애비가 보기에 그만한 짝도 없을 것 같아서 말하는 것이다. 외모도 천하절색이겠다, 무공도 그만하면 충분하니 말이다.”
“흠…….”
“내키지 않는 모양이구나.”
“이런 말 드리기 뭣하지만…… 소자는 아무리 설 소저가 아름답다 해도 웃지도, 울지도 않는 그런 석녀(石女)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양곽원은 얼마 전 아버지인 남해태양궁주 양위도와의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양 형, 속이 쓰리오?”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야율황기의 말에 양곽원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화사하게 웃는 설린의 모습이 크게 다가와 눈동자에 선명하게 맺혔다.
설린의 모습이 담긴 그의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며 파르르 떨렸다.
빠드득.
마현과 설린이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본 추도영의 턱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대공자님.』
추도영은 바로 앞줄에 앉아 있는 삼안혈화의 전음에 시선을 돌렸다.
『어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웅천대를 준비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기에는 너무 위험합니다.』
『위험하지만 저런 아름다운 여인을 놓쳐서야 되겠나요? 게다가 소교주 자리와 차후 교주 자리에 쉽게 오를 수 있는 뒷배경까지 주는 여인을?』
삼안혈화는 턱으로 슬쩍 함께 걸어오는 마현과 설린을 가리켰다.
『…….』
추도영은 마현을 노려보며 입술만 자근자근 씹을 뿐 침묵했다.
『대공자님. 이런 말씀을 드리기에는 뭐하지만 우리도 한 배를 탄 입장이에요. 그러니 이번만큼은 저희의 뜻에 따라 웅천대를 이용해 저 사공자를 일찌감치 없애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보이네요.』
추도영은 그 말에 마현에게서 시선을 떼고 삼안혈화를 노려보았다. 삼안혈화 역시 지지 않고 추도영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삼안혈화의 그런 반응에도 추도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말 역시 틀린 바는 없었기 때문이다.
빠드득.
추도영은 다시 이를 갈며 마현을 노려보았다.
‘마현, 이놈! 나를, 나를, 천하의 이 추도영을 이처럼 무참하게 만들어?’
추도영의 뺨이 씰룩거렸다.
마현의 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겉으로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표정이 딱딱하게 변한 추도영의 얼굴을 본 까닭이다.
“제 이야기가 재미없나요?”
마주전 앞 광장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추도영을 주시하던 마현의 귀에 설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아, 아닙니다.”
마현은 얼른 고개를 돌려 설린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미없으신 것 같네요.”
설린의 목소리는 조금 풀이 죽어 있었다.
마현 역시 느낀 거지만, 설린의 감정 변화가 전과 달리 눈에 띌 정도로 드러나고 있었다.
어제 마객당을 떠나며 한한파파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한한파파는 아마도 얼어붙었던 가슴이 녹아 감정을 느끼게 되며 약간의 부작용도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감정들로 인해 마치 어린아이처럼 감정의 기복이 크다는 것이었다.
새하얀 백지에 색색의 물감들이 한 방울만 떨어져도 넓게 퍼지는 것처럼 말이다.
“제가 잠시 딴 생각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그렇게 사과했지만 설린의 표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중요한 일이 불현듯 떠올라서 그런 것이니 마음을 푸세요.”
“중요한 일?”
설린은 표정을 바꾸며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마현을 쳐다보았다.
“제게도 중요하지만 스승님의 한이 어린 일이라…… 다음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피.”
마현이 조근조근 설명하자 설린은 약간 토라진 듯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다음에 꼭 이야기해 주세요.”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도란도란 정겨운 대화를 나누던 둘은 어느새 마주전 월대 앞까지 걸어와 있었다.
“벌써 도착했군요.”
마현의 말에 설린은 무척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쉽네요.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설린의 말에 마현의 눈이 반짝였다.
마현의 눈은 재빠르게 회회혈마와 삼안혈화, 역천마도, 그리고 추도영의 얼굴을 훑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었지만, 설린을 향해 고개를 돌릴 때의 마현은 어느새 부드러운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시면 연회가 끝나고 돌아가실 때 제가 멀리는 아니더라도 천산 밖까지 배웅을 해드리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야기할 시간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설린은 마현의 말에 금세 화색이 도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정말요?”
“예.”
설린의 물음에 마현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힘주어 대답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마현은 설린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월대 위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설린은 아쉬운 듯 마현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그런 설린 곁으로 한한파파가 포근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다가왔다.
“으, 응?”
“오르셔야지요.”
“그래야지.”
한한파파는 설린을 데리고 월대 위로 오르며 마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설린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냥 기우로만 끝났으면…….’
설린이 마현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게 어떤 감정이든 현재 설린은 오직 마현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다.
그런데 한한파파가 보기에 마현은 달랐다.
부드럽게, 분명 친절하게 설린을 대했지만 왠지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지나치게 사무적인 모습이라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다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한한파파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다.
마현은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잘 어울리는군.”
사공찬이었다.
말로만 본다면 칭찬 같지만 목소리를 듣건대 그다지 칭찬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래 보이나?”
마현은 사공찬을 향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보란 듯이 추도영을 향해 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 때문이라도 친해질 필요가 있어서 말이야.”
마현의 은근한 도발에 추도영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졌다.
“하하하하하!”
사공찬은 마현이 자신에게 여전히 하대를 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마현의 말에 즐거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 때문이라…….”
사공찬의 추임새에 마현은 추도영을 향해 노골적으로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추도영은 그런 마현을 충혈된 눈으로 무섭게 치뜨고 노려보았다.
둥. 둥. 둥. 둥. 둥―
그때 웅장한 북소리가 마주전을 가득 채웠다.
“교주께서 납시옵니다!”
그 소리에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추도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전음을 보냈다.
『교주님께 환갑 선물로 무영대주를 바칠까 하는데…….』
자리에 일어서던 추도영의 몸이 딱 멈췄다.
『아주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마현은 싸늘하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