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22화
“크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자 마현은 어색함을 떨치기 위해 헛기침을 내뱉었지만 오히려 분위기는 더 어색해졌다.
“그날 호여정에 나오셨다고요?”
“네.”
설린은 그날 일이 떠올랐는지 눈을 약간 치켜뜨며 냉랭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끄응.’
마현은 설린의 차가운 모습에 속으로 앓는 소리를 삼켰다. 마현은 입맛을 다시며 품에서 은가락지를 꺼내들었다.
언변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보니 말로 그녀의 마음을 풀어 줄 자신은 없었다. 그러니 풍월로 들은 대로 보석으로 그녀의 마음을 조금 풀어 보려고 했던 것이다.
“이 마모가 설 소궁주의 마음을 언짢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조금 풀어보려 자그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마현은 품에서 라이트 마법이 새겨진 은가락지 한 쌍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선물이라는 말에 설린은 시선만 탁자 위로 내렸다.
덩그러니 탁자 위에 놓인 싸구려 은가락지를 보자 금세 실망 어린 눈빛이 감돌았다.
은가락지를 선물로 주는 것까지 백번 양보해 좋다고 쳐도, 선물이라면 최소한 그럴 듯하게 포장이라도 해서 줘야 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들자 설린은 속으로 흠칫했다.
전 같으면 누가 무슨 선물을 주던, 또 싫든 좋든 그냥 받았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겉으로 내비칠까 싶어 설린은 더욱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은가락지를 집어 들었다.
“고마워요.”
설린은 그렇게 말했고, 마현 역시 그렇게 들었다. 하지만 마현의 귀에는 결코 고맙다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마현은 그냥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설 소궁주를 이용해 추도영을 꼬드기는 방법은 포기해야 하나?’
마현은 씁쓸한 눈으로 은가락지를 집어 드는 설린을 쳐다보았다.
설린은 은가락지를 그냥 품에 넣을 수 없었기에 예의상 잠시 살폈다.
‘응?’
무심하고, 한편 쌀쌀맞은 그녀의 눈빛이 조금 크게 떠졌다.
그냥 민무늬 은가락지인 줄 알았는데 표면에 아주 미세하지만 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았지만 미세한 공구로 새긴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더욱이 은은한 기운마저 살짝 느껴졌다.
‘그냥 평범한 은가락지가 아닌가?’
설린은 고개를 들어 마현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조금은 씁쓸한 눈빛이 보이자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전에도 그랬는데 알게 모르게 또 상처를 준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긴 마교 공자 신분에 그냥 평범한 은가락지를 줄 리가 없지.’
설린은 조심스럽게 은가락지를 꼈다.
‘응?’
은가락지에 새겨진 무늬는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한 쌍이 겹치며 하나의 무늬를 이룬다는 것을 그제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설린은 은가락지를 살짝 돌려 두 무늬를 합쳤다.
후우웅―
한 쌍의 은가락지의 무늬가 합치되는 순간 설린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패였다.
미약하지만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내력이 조금씩 반지로 흡수되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설린은 고개를 들어 마현을 쳐다보았다.
눈빛으로 이 은가락지가 무어냐고 물었다.
마현은 설린이 은가락지에 관심을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계획이 틀어질 줄 알았는데 다행히 은가락지로 인해 다시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은가락지에 내력을 주입해 보세요.”
마현의 말에 설린은 고개를 내려 은가락지에 내력을 주입해 보았다.
그러자 은가락지에서 은은한 빛이 생겨났다.
그 빛에 설린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퉁!
은가락지에서 생겨난 빛이 반지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 빛은 탁자 아래로 툭 떨어져 더욱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
설린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고운 음색의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아! 잘못 끼셨군요.”
마현은 설린이 은가락지를 잘못 끼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은가락지에 새겨진 마법진 중앙이 손등으로 향해 있어야 라이트 구가 머리 위에 생기는데 현재 설린은 손바닥 쪽으로 끼고 있어 라이트 구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설린 앞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 좀 잠시 주시오.”
라이트 구에 정신을 빼앗긴 설린은 그 말에 무심결에 손을 내밀었다.
“어?”
손을 움직이자 바닥에서 빛을 뿜어내는 라이트 구가 따라 움직였다. 그 광경에 설린은 아이처럼 천진한 눈으로 즐거워했다.
마현은 왼손으로 설린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반지를 잡아 마법진의 중심이 위로 향하게 살짝 돌렸다.
“아!”
마현이 천천히 은가락지를 돌리자 거기에 맞춰 라이트 구도 바닥에서 서서히 원을 그리며 설린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설 소궁주.”
“예, 예?”
라이트 구에 정신을 빼앗긴 설린은 마현의 부름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손을 잠시 보시겠소? 설명할 것이 있으니…….”
마현의 말에 설린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마현은 반지 위에 새겨진 둥근 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보이는 이 원을 중심으로 저기 위에 보이는 광구(光球)가 움직입니다. 대략 이 은가락지에서 3척(尺; 약 90센티미터) 정도의 공간을 두고 저렇게 광구가 떠 있을 겁니다.”
“신기하네…….”
고개를 끄덕이며 은가락지와 라이트 구를 쳐다보던 설린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현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느낀 것이다
설린은 화끈거림을 느끼며 재빨리 손을 뺐다.
퍽!
그 순간 은가락지로 향하던 내력도 끊겨 라이트 구 역시 사라졌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두근, 두근, 두근―
설린은 은가락지를 낀 손을 가슴에 당겨 다른 한 손으로 감쌌다.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에 설린은 화들짝 놀랐다.
혹시 이 심장 소리가 마현에게 들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 긴장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설 소궁주?”
“예, 예?”
설린은 마현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마현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입을 열었다.
“다시 은가락지에 내력을 주입해 보시겠습니까?”
“……아, 네.”
설린은 다시 은가락지에 내력을 주입했다.
우우웅.
반지가 다시 가볍게 울었다.
퉁!
그러더니 다시 빛이 은가락지에서 솟아올랐다. 이번에는 제대로 착용해서 라이트 구가 설린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설린은 은가락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들어 빛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요.”
마현은 희미하지만 설린의 입가에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고 마현 역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설 소궁주를 배웅한다는 미명하에 본산을 잠시 벗어날 수 있겠군. 이제 추도영이 본산에서 나간 나를 그때 공격하게 만드는 일만 남았다.’
설린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자 마현은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부드럽게 웃었다.
마현이 자신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자 설린의 뺨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또한 마현의 손길을 느꼈던, 은가락지를 낀 손이 뜨거워졌다.
“그럼 내일 저녁에 뵙겠습니다.”
마현의 인사에 설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인 후 마객당으로 몸을 돌렸다. 마객당으로 돌아가며 그녀는 양손을 가슴에 포개고 있었다. 그리고 왼손에 낀 은가락지를 오른손으로 연신 만지작거렸다.
희미하지만 미소를 짓는 그 얼굴에는 홍조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마현 역시 몸을 돌렸다.
‘후후.’
마현은 웃는 얼굴로 뒷짐을 지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별빛이 쏟아질 듯 눈에 들어왔다.
‘추도영……. 너는 내 손에 죽는다.’
차갑게 굳은 마현은 냉혹하면서도 살기가 가득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흑풍각 서실.
마현이 들어가자 회회혈마를 비롯한 역천마도와 삼안혈화가 바닥에 엎드렸다.
“주군.”
그들과 함께 온 가릉이 마현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마현은 가릉의 인사를 받으며 탁자로 걸어가 앉았다.
“고개를 들라.”
마현의 말에 세 장로는 바닥에 바싹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흠…….”
마현은 세 장로의 몸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도에게 그토록 참혹하게 구타를 당했는데도, 하룻밤 사이 세 장로는 최소한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수고했군.”
마현이 흡족한 듯 미소를 짓자 가릉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노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세 장로를 향해 눈을 돌렸다.
“하루 동안 생각은 해봤나?”
“……그저 명을 따를 뿐입니다.”
회회혈마가 잘 굽어지지도 않는 몸으로 엎드렸다. 그 뒤를 따라 삼안혈화와 역천마도 역시 낮게 엎드렸다.
“그렇다면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소리인가?”
“…….”
셋은 아무 말도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없지.”
마현의 말에 바닥에 바싹 엎드린 셋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너희들을 보자고 한 이유는 추도영을 죽이기 위해서다.”
세 장로는 마현의 말에 더욱 몸을 떨어댈 뿐 입은 열지 않았다.
“북해빙궁 설 소궁주를 이용하겠다는 것이 그대의 생각이라고?”
마현이 삼안혈화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내일 교주님의 연회가 있는 날이다. 연회가 끝나면 초대 받았던 이들이 돌아갈 것이다. 그때 나는 북해빙궁 설 소궁주를 배웅한다는 명목으로 본산을 벗어날 것이다.”
잠시 말을 끊었던 마현은 다시 말을 이었다.
“할 수 있겠지?”
“……?”
뜬금없는 마현의 질문에 세 장로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대공자의 신분이라고 해도 적어도 본교 안에서 마음대로 검을 뽑을 수 없을 테니, 내가 그 검을 뽑을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다.”
그제야 마현의 말뜻을 알아들은 회회혈마의 눈동자가 몹시 흔들렸다.
“내일 추도영을 부추겨라. 설 소궁주까지 얽혀 있으니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 그 말씀은……?”
회회혈마는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물었다.
“검을 뽑는 내일이 놈이 죽는 날이 되는 것이지.”
마현의 눈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자존심이 강한 놈이니 반드시 틈을 보이는 순간 웅천대를 이용해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 너희 셋은 반드시 내일 추도영의 검을 뽑게 만들어라. 알았나?”
“명!”
세 장로의 대답을 들으며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러가라. 나는 설 소궁주와 선약이 있어……. 아! 지금 이 상황 역시 추도영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좋은 소재이겠군. 후후.”
마현은 차갑게 미소를 머금고는 서실을 나갔다.
“후우…….”
마현이 서실에서 나가자 회회혈마는 마치 숨을 참고 있었던 사람처럼 숨을 크게 내쉬며 목을 둘러싼 옷깃을 손가락으로 살짝 풀었다.
“어떻…….”
삼안혈화는 회회혈마와 역천마도에게 말을 꺼내려다가 가릉을 보자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할 말이 없지는 않겠지. 내가 자리를 피해주겠소. 다만 내 충고 하나 하리다. 주군 뜻을 따르는 것이 편히 사는 길이오.”
가릉은 나직하지만 칼칼한 목소리로 충고를 하고는 몸을 돌려 서실을 빠져나갔다.
“하아…….”
삼안혈화는 가릉이 나가자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삼안혈화, 내게 어떻게 할 생각이냐 물으려고 했소?”
“그래요.”
회회혈마의 물음에 삼안혈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하하하하.”
회회혈마는 허망한 웃음을 터트렸다.
“살다가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회회혈마는 몸을 움직여 벽을 기대고 앉았다.
“나는 살고 싶소.”
“그 말뜻은?”
“나는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소. 대답이 되었을지 모르겠소.”
회회혈마는 고개를 들어 삼안혈화와 역천마도를 쳐다보았다.
“그대들은 어찌할 생각이오?”
“…….”
“…….”
둘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눈빛을 보니 대충 대답은 나온 것 같군. 끙차!”
회회혈마는 벽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자를 찾아갑시다. 살고 싶으면 하라는 대로 해야지.”
“그러네요.”
삼안혈화는 스산한 눈으로 회회혈마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