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21화
“회회혈마, 역천마도, 그리고 삼안혈화.”
“…….”
“…….”
“…….”
“그대들 셋이 추도영을 따르는 핵심 인물들이지?”
“……그렇습니다.”
회회혈마가 대답했다.
“차라리 죽여라.”
그때 역천마도가 마현의 노려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중한 상처로 인해 홀로 서지는 못하고 벽에 기대어 섰다.
“그대도 죽고 싶나?”
마현은 고개를 돌려 삼안혈화를 내려다보았다.
“사,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삼안혈화는 바닥에 바싹 엎드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역천마도 앞으로 걸어가 그의 머리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죽고 싶다는데 그렇게 해줘야지.”
마현의 몸에서 검은 마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마기는 역천마도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죽음을 원하는 자, 죽음보다 더 무서운 죽음을 맛보리라. 피어 오브 데스(Fear of death)!”
마현의 몸에서 더욱 짙은 마기가 뿜어져 나왔고, 그 마기는 역천마도의 몸을 휘감더니 머리로 스며들었다.
“컥!”
그러자 역천마도의 몸이 기이하게 꺾이고 뒤틀렸다.
부들부들 떠는 눈동자는 이내 흰자위로 뒤덮였다.
“크으으으으!”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역천마도는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몸은 한층 더 격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결국 역천마도는 넘어가는 통나무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크아아악!”
이내 역천마도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에 회회혈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뺨의 살들이 눈에 띌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삼안혈화는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여전히 엎드린 상태로 후들후들 몸을 떨고 있었다.
“으아아악, 크으으, 크아아아아악!”
역천마도는 잘 돌아가지도 않는 팔로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 그냥 죽여주십시오.”
보다 못한 회회혈마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대도 죽고 싶나? 저렇게?”
비명을 지르는 역천마도를 싸늘하게 쳐다보던 마현의 눈동자가 회회혈마에게로 향했다. 나락처럼 깊고 빙하보다 더 싸늘한 그 눈동자에 회회혈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좌우로 마구 뒤흔들었다.
“으으으, 주, 죽여줘! 그냥 죽여…… 크아아악!”
역천마도의 비명에 마현은 고개를 돌렸다.
“흡……, 푸하!”
마현의 싸늘하면서도 공포감을 주는 시선이 사라지자 회회혈마는 막혔던 숨을 겨우 내쉴 수 있었다.
“아직 죽으려면 멀었군.”
마현의 목소리에 회회혈마는 몸이 굳어졌다.
“사, 살려……. 크아아악!”
마현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역천마도의 외침은 죽여 달라는 말에서 살려달라는 애원으로 바뀌었다.
회회혈마는 역천마도의 처절한 절규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입술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직 멀었군. 살려달라고 하는 자세가 영 시원찮아.”
마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역천마도는 부들부들 떨며 비틀어지고 꺾인 몸을 겨우 움직여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힘겹게 마현을 향해 엎드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크으으으!”
“죽고 싶다고 한 것은 바로 너다.”
“크으으으, 으으으. 컥! 이, 이 지독한 고, 고통에서 벗어, 벗어나고 싶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크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역천마도를 내려다보며 마현은 싸늘하게 물었다.
“살려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겠나?”
“모,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마현은 입가를 말아 올리며 역천마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후우웅!
역천마도의 몸에서 검은 마기가 뿜어져 나와 마현의 손 안으로 스며들었다.
“헉헉헉.”
마현을 향해 엎드린 역천마도의 얼굴에서는 피와 땀이 뒤범벅이 된 채 뚝뚝 떨어졌다.
쿵!
잠시 엎드린 상태로 온몸을 후들후들 떨던 역천마도는 곧 땅바닥에 처박히듯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역천마도는 나에게 목숨을 주겠다고 했는데…….”
마현은 말끝을 흐렸다.
“저, 저는 이미 목숨을 드린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삼안혈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현은 고개를 돌려 회회혈마를 쳐다보았다.
“드, 드리겠습니다.”
우우웅!
회회혈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골검이 다시 한 번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회회혈마는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회회혈마는 마현 앞에 오체투지했다.
그제야 마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간간히 울음을 토해내는 골검들을 다시 어둠으로 돌려보냈다.
“가릉.”
“예, 주군.”
그동안 숨죽인 채 마현과 세 장로를 지켜보던 가릉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이들을 보살펴 주어라. 그리고 내일 저녁 내게 데리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주군.”
마현은 가릉의 대답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내일 보지. 좋은 꿈들 꾸도록.”
그 말만 남기고는 마현은 삼안혈화의 거처를 나섰다.
* * *
달빛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내비치는 호수, 그리고 호여정.
설린은 의자에 앉아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눈의 초점은 약간 흐렸다. 무심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눈동자는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으로 인해 언뜻언뜻 흔들렸다.
“하아…….”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늘 한한파파에게 왜 마현이 나오지 않았는지를 들었다. 그리고 내일 사과의 뜻으로 자신을 초대하겠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설린은 조용히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심장은 조용히 뛰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럴까?’
묘한 감정이 자꾸만 심장을 흔드는 느낌을 받았다.
설린은 마현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의 형상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머리를 흔들면 흔들수록 마현의 얼굴은 더욱 또렷하게 떠올랐다.
잔잔한 호수보다 더 평온한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남자였다.
“하아…….”
설린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략적인 일이 마무리되자 마현은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바로 북해빙궁의 빙화 설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제법 친해져야 했다. 최소한 다른 이들보다는 더.
“흠…….”
마현은 미간을 좁히며 나직한 신음을 머금었다.
‘이거 참!’
마현은 손을 들어 코끝을 긁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마현은 여자와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 사실 관심도 없었지만, 엄밀히 말해 관심을 쏟을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선물인가?’
마현은 여자들이 장신구 따위 같은 보석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자신이 여자 때문에 이렇게 고민할 줄은 이제까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내일 보석류를 하나 구해야겠군.’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무심코 내딛던 걸음이 마현을 호여정 앞으로 이끌었다.
‘음?’
굳이 호여정에 올라갈 이유가 없었던 마현은 흑풍각 쪽으로 발길을 돌리려다가 정자 위에 누군가가 있음을 발견했다. 천천히 안력을 높여 살펴보니, 설린이었다.
마현은 발길을 돌리려다가 멈췄다.
내일 자리를 마련해 어색하게 만나는 것보다 차라리 지켜보는 이 아무도 없는 지금, 그냥 단둘이 조용히 만나는 것이 더 편할 거라는 생각 들었다.
사실 그러는 편이 마현에게도 더 편했다.
막 호여정으로 발을 내딛으려던 마현은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차! 선물.’
마현은 그녀에게 줄 선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호여정으로 가 그녀를 만날 것인지, 아니면 선물을 준비해 내일 만나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한다.’
그때 근처를 지나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때?”
“어머 어머, 이거 웬 거야? 샀어?”
“예뻐?”
“너무 예쁘다.”
“이거 이래봬도 순은으로 만든 가락지다.”
“부럽다.”
“부럽지? 이거 살려고 일 년이나 돈을 악착같이 모았다는 거 아니야. 호호호호.”
그 소리에 마현은 조용히 시녀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 돌렸다. 호여정과 조금 떨어진 길목에 시녀 둘이 걸어가며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은가락지라……, 그 정도면 어찌 되겠군.’
마현은 두 시녀 앞으로 걸어갔다.
“흠!”
갑자기 마현이 나타나자 시녀들은 당황한 듯 잠시 우왕좌왕하더니 이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예, 사공자 흑풍마군님이십니다.”
마침 은가락지를 손가락에 끼고 있는 시녀가 마현의 얼굴을 아는지 공손히 대답했다.
“안다니 말하기가 편하겠군.”
마현은 그 시녀 앞으로 다가갔다.
“네가 지금 끼고 있는 은가락지 새로 산 것이냐?”
마현의 말에 시녀는 본능적으로 은가락지를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곧 마현의 눈빛에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예.”
그 대답에 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봐라.”
“예?”
마현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번쩍 들어 마현을 쳐다보았다. 곧 시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른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허!”
마현이 일부러 노기를 담아 가볍게 책망하자 시녀가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은가락지를 빼 마현에게 건넸다.
마현은 시녀가 내민 은가락지를 들어 살폈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평범한 민무늬 은가락지였다.
‘차라리 잘 되었군.’
마현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은가락지를 품에 넣었다.
“은가락지는 내가 좀 써야겠다.”
시녀는 한층 움츠러든 어깨를 살짝 떨 뿐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못했다.
“나를 안다니 내일 흑풍각으로 오너라. 은가락지 값은 내 두어 배 더 쳐주겠다.”
마현은 몸을 돌려 호여정으로 향했다.
호여정으로 가며 마현은 은가락지를 손에 넣고 주물럭거렸다.
한 쌍의 은가락지가 손바닥 안에서 살짝살짝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여기에 가벼운 마법 하나 정도 걸어주면 되겠군. 근데 무얼 걸어주지?’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그냥 가볍게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인도 아니고, 그냥 잠시 친해지면 되는 사이였다. 그 후의 일은 자신과 상관없었다.
‘라이트 마법이나 걸어줘야겠군.’
가장 흔하고 쉬운 마법을 떠올렸다.
‘룬어를 알려줄 수 없으니…… 조작으로 라이트 마법이 실현되게 만들어야겠다.’
마현은 손을 뻗어 은가락지를 향해 마력을 내뿜었다.
한 쌍의 은가락지 위로 기이한 무늬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사실상 마법무구를 만들 때 지금처럼 그냥 마력을 이용해 소형 마법진을 입히는 것보다 미세한 세공으로 1차 가공을 한 후 그 위에 마법진을 입히는 것이 더 좋다.
그렇게 해야 좀 더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다.
지금 마현이 하는 것처럼 그냥 은가락지 위에 마법진을 입히면 수명은 몇 년 가지 못한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마현은 그냥 은가락지 위에 바로 마법진을 새겼다.
워낙 쉬운 마법이고 은 자체가 연성이 있는 금속이라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아 한 쌍의 은가락지 표면에 기이학적 무늬가 새겨졌다.
‘이만하면 되겠군. 어쩌면 과분한 선물이 될지도 모르겠어.’
마현은 은가락지를 품에 넣은 후 호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호여정 위에 앉아 있는 설린이 보였다.
마현은 그런 설린을 보며 조금은 차가운 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호여정 위로 올라갔다.
“흐음!”
마현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 인기척에 설린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현과 눈이 마주쳤다.
희미하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호여정이 어두워 마현은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마현은 설린이 앉아 있는 맞은편으로 걸어가 마주보며 앉았다.
설린 역시 마현이 자리에 앉자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
“…….”
그렇게 마주 앉은 둘은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마현은 마현대로 일단 오기는 왔는데 마땅히 건넬 말이 없었고, 설린 역시 가슴에서 급격히 솟아오르는 묘한 감정으로 인해 표정을 더욱 딱딱하게 굳힐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