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18화
한한파파는 오랜 시간 설린 곁을 떠나 있을 수 없어 마객당을 벗어나는 순간 최대한 빨리 마현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한한파파는 흑풍각으로 향했다.
혹시나 흑풍각에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마현이 흑풍각 내 서실에 있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가릉과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될 쯤, 한한파파가 찾아왔음을 시녀가 알려왔다.
의외의 방문자에 마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영대를 이용해 대공자 측 장로들의 위치를 알아놓겠습니다.
마현의 얼굴을 살피며 가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하라.”
가릉이 나가고 조금 후 한한파파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이 늙은이가 시간을 방해한 것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마현은 한한파파와 함께 들어온 시녀를 시켜 탁자 위를 치우게 하고 새로이 차를 내오게 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건지요?”
한한파파는 내온 차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마현의 말에 대답했다.
“아가씨 때문에 왔습니다.”
“아가씨? 아! 설 소궁주님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이 늙은이가 염치 불구하고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한한파파의 말에 마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어제 북해빙궁 소궁주께서는 무슨 의도로 그 자리에서 저를 곤혹스럽게 만든 겁니까?”
마현의 말에 한한파파는 그가 자신의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여기고 재차 물었다
“우리 아가씨가 연회 자리에서의 일을 사과하신다고 자정쯤 흑풍마군을 뵈러 다시 나가셨습니다. 이 늙은이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있습니다.”
한한파파의 말에 마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정?’
나오지 않겠다던 그녀의 전음이 기억나 마현은 호여정으로 나가지 않았었다.
분명 나오지 않겠다고 그랬었는데, 한한파파의 말을 들으니 설린은 나왔던 모양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아니니 마현은 그게 사실인지 물었다.
“자정에 설 소궁주께서 호여정으로 분명 가셨습니까?”
“설마…….”
한한파파는 입을 살짝 벌렸다.
“만나기로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한한파파의 목소리가 조금 차가워졌다.
“그 일로 제가 만나자고 했지만 설 소궁주께서 나오시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나가지 않으셨습니까?”
“예.”
마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고, 그 말에 한한파파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오지도 않겠다는 사람을 굳이 보러 나갈 이유는 없지요.”
이내 이어진 마현의 말에 한한파파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왜 설린이 다시 마음의 문을 닫았는지 알 수 있었다. 한한파파는 설린도 설린이지만 마현을 보며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현이 여자의 마음에 대해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했다. 언제 이리 휘고 저리 휠지 모르기 때문이다.
설령 여자가 나가지 않겠다고 해도 남자라면 그 자리에 나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여자의 마음을 왜 모르냐고 타박할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더구나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잘못이라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숨을 푹 내쉬던 한한파파는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꺼냈다.
“이 늙은이가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한한파파는 비록 전후 사정을 알았다고 하지만 이렇게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설린의 닫힌 마음을 다시 열어주고 싶었다.
“부탁이요?”
“염치없는 부탁입니다만 꼭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한한파파의 목소리에서 절실함이 느껴졌다.
“무엇입니까?”
“아가씨를 다시 한 번 꼭 만나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에 마현의 머릿속에 번뜩이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사공소의 환갑 연회 전 추도영의 숨통을 완전히 조여 먼저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 문제는 좀 더 추도영이 쉽게 검을 뽑을 수 있게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몇 가지 방법이 떠올랐지만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그러는 찰나 한한파파가 부탁해 온 것이다.
북해빙궁, 정확히는 설린을 어떻게 잘만 이용한다면 묘수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설 소궁주라…….’
어느새 생각에 잠긴 마현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한한파파는 내심 초조했다. 설린을 만나는 것 자체를 두고 저리 심각하게 고민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고민 끝에 마현은 미소를 지었다.
‘연회가 끝나는 날, 추도영 너는 죽는다!’
마침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알았습니다. 오늘은 제가 선약이 있어 힘들겠고, 모레에 교주님의 연회가 있으니…… 내일 제가 설 소궁주님을 저녁에 초대하지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한한파파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마현 역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야 할 것은 바로 본인입니다, 한한파파.’
고개를 숙인 마현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한한파파가 돌아가고 어둠이 짙게 깔렸다.
“이제 슬슬 움직일 때로군.”
마현은 최대한 조용히, 하지만 단숨에 세 장로들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흑도가 제격이겠군.’
흑사신은 자신의 생명만 지켜주기로 약조를 했지만 마현은 굳이 그것을 지킬 생각은 없었다. 그들을 존중해 강압적인 명령은 내리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놔둘 생각은 없었다.
“흑도, 소환!”
마현은 흑사신 중 흑도를 어둠에서 불러냈다.
스르륵.
“아, 진짜! 주인!”
흑도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마현을 향해 투덜거렸다.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아무리 내가 조금, 아주 조금 주인의 스승한테 실수했다고 해도 말이야. 솔직히 그 아인 주인의 스승이지 나한테는 까마득한 후배라고, 후배!”
흑도는 쌓인 게 많았던지 연신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 생각 같아서는 그냥 확 세상에 나오려다가 참았다고…….”
흑도는 끊임없이 불만을 내뱉었다.
마현은 그런 흑도의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흑도의 성격이 단순하고 직설적이라 다루기에는 편했지만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한바탕 놀게 해주려고 했는데…… 불만이 그렇게 많다면 어쩔 수 없지, 귀환!”
마현은 가차 없이 흑도를 강제 귀환시켰다.
흑도의 몸이 땅 아래로 푹 꺼졌다. 하지만 용수철처럼 땅바닥에서 흑도가 튕기듯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한정적이긴 하지만 흑도는 자유의지로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현은 그런 흑도의 행동에 미소가 지어졌지만 이내 웃음을 감추었다.
흑도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마현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나름 애교를 부리듯 초롱초롱한 눈을 깜빡이며 마현을 쳐다보았다.
“방금 본좌가 잘못한 거 맞지?”
마현이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하하하하.”
흑도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과장되게 웃음을 남발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마현을 불렀다.
“주인.”
“……?”
마현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바탕 놀게 해줄 거지? 응?”
“…….”
“본좌 심심하단 말이다.”
그런 흑도의 투정에 마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는 말에 흑도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지만 마현의 눈과 마주치자 표정을 싹 바꾸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데?”
“조용하게, 그리고 최대한 빨리 제압할 것.”
“끄응.”
마현의 말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흑도는 침음성을 흘렸다.
“싫어?”
“끄응.”
흑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 흑검에게 부탁해야겠군.”
흑검의 이름이 나오자 흑도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니야, 아니야. 본좌가 할게, 본좌가! 본좌 시켜줘.”
흑도는 마현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대신?”
“아, 알았어. 조용히, 그리고 최대한 빨리.”
흑도의 말에 마현은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갈까?”
“크크크, 알았어.”
흑도는 마현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홍등 불빛으로 붉게 물든 삼안혈화의 거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현은 서 있었다.
스슥.
그런 마현 곁으로 무영대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회회혈마는 대공자를 만난 후 역천마도를 찾아가고 있어 일단 삼안혈화부터 제압하시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하옵니다.”
“알았다. 회회혈마와 역천마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말도록.”
“명!”
“무영대주.”
마현은 명을 받들고 다시 몸을 감추려는 무영대주를 불러 세웠다.
“대공자를 잡은 후 무엇을 가지고 싶나?”
그 질문에 무영대주는 살짝 긴장하며 몸을 돌렸다. 눈동자로는 여러 대답을 하는 듯 보였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일이 끝난 후 다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그때까지 원하는 바를 생각해 놓도록.”
“……명!”
무영대주는 허리를 숙인 채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삼안혈화의 거처를 쳐다보던 마현이 뒷짐을 풀었다.
“이제 시작해 볼까? 흑풍대주.”
“예, 주군.”
왕귀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라.”
“명!”
왕귀진의 대답을 들은 마현은 삼안혈화의 거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와 동시에 서클 단전에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세상과 세상을 잇는 소리를 차단한다, 사운드 웨이브 아이서레이션(sound wave isolation)!”
마현의 마력이 넓게 퍼지며 삼안혈화의 거처를 휘감았다.
음파 차단 마법은 저서클 마법이라 시전하기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광범위한 장소에 적용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현은 캐스팅 어를 이용했다.
마현은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삼안혈화의 방문 앞에 섰다.
“흑도!”
마현은 흑도를 소환하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쿠르륵―
마현이 서 있는 바로 옆에서 땅거죽이 불쑥 튀어 오르더니 흑도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크크크.”
흑도는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는 도를 들어 혀로 핥았다.
그 산적 같은 행동에 마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 얻은 신체는 관옥과도 같은 미남의 얼굴이었다. 당연히 그 얼굴과 행동이 조화가 안 되었다.
마현은 고개를 저으며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마현 앞으로 흑도가 재빨리 다가와 먼저 문을 활짝 열었다.
“본좌다! 이년, 어디 있느냐? 크하하하하!”
흑도는 우렁차게 외치며 방 안으로 훌쩍 뛰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