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16화
“제법 시간이 걸렸군.”
“이자의 실력으로 보아 저기 저자와 같은 무영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철용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무영대주를 힐끗 쳐다보며 대답했다.
“순수한 무력으로만 따진다면 흑풍대를 훨씬 상회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수(多數)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지. 그것도 절대로 죽지 않는 다수 말이야.”
“충!”
마현의 말에 철용은 가슴을 쭉 펴며 군례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가지고 오라.”
마현의 말에 철용은 비단에 곱게 싸여진 목함을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주군, 이게 무엇입니까?”
가릉은 비단에 싸인 목함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공자에게 전해줄 선물이다.”
“……?”
“한 번 보겠나?”
마현은 목함을 가릉 앞으로 내밀었다.
“송구하지만 신이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가릉은 몸을 일으켜 비단을 푼 후 목함을 열었다.
“히익!”
목함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사검의 머리였다. 사람의 머리가 안에 들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가릉은 순간 놀라 헛바람을 삼켰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흠…….”
가릉은 목함 안에 든 사검의 머리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흐음.”
가릉은 눈가를 살짝 찌푸리는 것과 동시에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잠시 후 가릉이 눈을 번쩍 뜨더니 목함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자인가?”
“딱 한 번 본 적 있는 자입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금세 떠오르지 않았지만 분명 본 적이 있는 자이옵니다.”
가릉은 목함을 닫은 후 다시 비단으로 곱게 묶었다.
“……아마 소신의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대공자의 수신호위 중 한 명일 것입니다.”
“수신호위? 웅천수검?”
“그렇습니다. 대략 십여 년 전 교주님이 제자들을 받아들이기 전 제자가 생기면 주기 위해 몇몇 아이들을 수신호위로 키웠습니다. 그때 훈련을 받던 아이였습니다. 그 후 다시 보지는 못했지만 대공자의 수신호위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툭 툭 툭.
마현은 탁자 위를 주먹으로 가만히 내려쳤다.
“무영대와 대공자 사이를 이어주는 자인 모양이겠군.”
“소신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가릉 역시 마현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영대주가 누워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가릉은 눈을 반짝이며 마현 옆으로 다가갔다.
마현은 한쪽 무릎을 꿇은 후 무영대주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려다놓았다. 이어 마현의 서클 단전에서 피어오른 검은 마기가 무영대주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블라인드 마인드(Blind mind)!”
검은 마기가 무영대주의 머리를 완전히 휘감자 그는 경련을 일으키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을 뜨라.”
마현의 말에 무영대주가 눈을 떴다. 하지만 마치 정신을 잃은 사람의 눈꺼풀을 강제로 벌린 것처럼 무영대주의 눈동자에는 생기도 초점도 없었다.
“이제부터 내가 너의 주인이다.”
마현의 말에 무영대주의 눈이 뒤집어지며 몸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금제가 발동된 것이다.
“나를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대공자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르 몸을 떨던 무영대주의 몸이 거짓말처럼 딱 멈췄다.
“나를 섬기며 대공자를 죽이는 것이 진정으로 대공자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논리에 맞지 않는 명령이었다.
“사공자를 섬기며 대공자를 죽이는 것이 진정으로 대공자를 향한 충성…….”
무영대주는 그냥 새하얀 백지에 먹물이 스며들듯이 마현의 말을 받아들였다.
“너의 직책은?”
이런 세뇌 마법의 과정에서 세세한 답변을 주고받을 수는 없지만 간략한 정보 정도는 얻을 수 있었기에 마현은 무영대주의 직책을 물어보았다. 그래야만이 더욱 세세한 명을 머릿속에 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영대……, 대주.”
“무영대주?”
마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생각 이상으로 대어였다.
마현은 차갑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시 세뇌 마법을 시전했다.
“대공자를 죽이고 나서 무영대를 나에게 바치는 것 또한 진심으로 대공자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대공자를 죽이고 나서 무영대를 사공자께 바치는 것 또한 진심으로 대공자에게 충성하는 것…….”
마현은 자신의 명을 그대로 흡수하는 무영대주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대공자를 향한 충성이 무엇이라고?”
마현은 마지막으로 세뇌가 확실히 되었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대공자에 대한 진정한 충성은…… 대공자를 죽이고, 무영대를 사공자께 바치는 것…….”
무영대주의 말을 들으며 마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좀 더 쉬어라.”
마현은 검은 마기를 거두며 세뇌 마법을 끝냈다.
가릉과 철용은 화등잔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마현과 무영대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뇌 마법의 원리는 몰랐지만 무영대주의 말로 인해 대충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있었다.
“어, 어떻게……?”
철용보다 더 놀란 것은 가릉이었다.
“가릉.”
“예, 예? 아, 주군.”
가릉은 놀랄 겨를도 없이 마현의 부름에 허리를 숙여야 했다.
“자네가 한 번 수고를 해줘야겠는데…….”
마현은 탁자 위에 놓인 목함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뜻을 알아들은 가릉은 고개를 숙였다.
“소신이 정성을 다해 대공자께 선물을 바치고 오겠습니다.”
“자네에게 미안하군.”
“당연히 소신이 해야 할 일이옵니다, 주군.”
가릉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잘 전해 주고 오라. 아, 무영대도 잘 쓰겠다는 말도 전해 주고.”
마현은 완전히 잠이 든 무영대주를 보며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 * *
추도영은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웅천수검 사검과 무영대주가 벌써 왔어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났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주군.”
웅천대원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추도영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마의당 가릉 당주께서 찾아와 뵙기를 청합니다.”
“가릉 당주가?”
“예, 주군.”
느닷없는 그의 방문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추도영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확실한 관계는 알 수 없었지만 가릉은 마현과 상당한 친분을 쌓고 있었다.
‘혹?’
추도영은 사검과 무영대주를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것이다. 하지만 왜 나를 찾아왔지?’
아무리 추도영이 머리를 굴려 봐도 가릉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는 찾아온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안으로 모셔라.”
일단 찾아온 이를 이유도 묻지 않고 내칠 수 없어 가릉을 들어오게 했다. 웅천대원이 밖으로 나가고 가릉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가 당주.”
조금 전 초초해하던 모습과 달리 추도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가릉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대공자.”
“이리로 앉으세요.”
추도영은 가릉의 인사를 받으며 그를 탁자로 안내했다.
“어쩐 일로 이 추모를 뵙자고 한 것인지…….”
추도영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마음의 여유가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했다. 비록 추도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릉을 대하고 있다지만 가릉은 그보다 더 깊은 연륜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연륜으로 인해 가릉은 추도영의 얼굴에서 초조함을 읽었다.
가릉은 주름이 가득한 미소를 그리며 가지고 온 목함을 추도영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추도영은 비단에 쌓인 목함을 받아들며 물었다.
“주군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주군?”
가릉의 가래가 낀 카랑카랑 목소리에 추도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어차피 곧 아실 일이지요.”
순간 추도영의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졌다.
“흠…….”
추도영은 신음을 내뱉으며 목함을 감싼 비단을 풀었다. 그리고 목함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추도영의 뺨이 씰룩거리는 것과 동시에 눈동자가 파르르 요동쳤다.
그는 마른침을 소리 죽여 삼키며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무릎 부근의 무복 하의를 떨리는 손으로 움켜잡았다.
“아, 그리고 이 말씀도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추도영은 시퍼런 살심을 숨기지 않고 가릉을 노려봤다.
“보내주신 선물 잘 쓰시겠답니다.”
“선물?”
“무영대, 그리고 무영대주.”
주름이 가득한 가릉의 미소에는 마현을 닮은 사악함이 담겨 있었다.
“에고고, 이거 나이를 먹으니 오래 앉아 있기 힘이 드는군요.”
가릉은 볼일이 끝나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주님 회갑 연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때 다시 뵙지요.”
가릉은 묘한 억양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웅천각을 나가 버렸다.
추도영은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탁자 위에서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입술을 자근자근 씹는 추도영의 뺨이 분노로 씰룩거렸다.
* * *
사공소의 환갑 연회로 모두가 바쁜 이때, 오히려 사공소는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항상 마주전의 주인이었던 그였지만 지금은 허진을 비롯한 마교 고위층 수뇌부들에게 마주전을 넘겨주고 자신은 마휴당에서 유유자적 쉬고 있었다.
“교주님, 속하 율기이옵니다.”
마휴당으로 군사 율기가 찾아왔다.
“본좌의 연회로 바쁠 그대가 어쩐 일로 찾아온 것인가?”
“드릴 보고가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율기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보고서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러한 때 율기가 보고서를 가져왔다면 분명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사공소는 보고서를 펼쳐 읽었다.
보고서를 읽어가는 사공소의 눈가에 주름이 점점 깊게 패여 갔다.
“쯧쯧쯧.”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사공소는 혀를 찼다.
“에잉, 못난 놈.”
결국 사공소는 눈살을 더욱 찌푸리며 다음 장을 펼쳤다.
“흠?”
사공소는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앞으로 당기며 바로 앉았다.
“아둔한 놈 같으니라고…….”
사공소는 보고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자질이 있어 뽑았지만 역시 그릇이 아니었던가?”
사공소는 보고서 첫 장을 가득 채운 추도영에 관한 보고를 내려다보며 탐탁지 않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몰래 무영대를 키우는 것마저 눈감아 주었더니만…… 쯧쯧. 그나저나 이 보고는 무엇인가?”
사공소는 율기를 힐끗 쳐다보며 보고서 뒷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강시의 일종인가?”
“저 역시 처음 보는 것이라 무어라 말씀을 드릴 것이 없습니다. 현재 비마대는 물론 비영대에까지 지시해 이와 유사한 사건이나 사료가 있는지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래? 오십여 구의 해골들이라…….”
“단지 소신의 생각에 의하면…….”
“의하면?”
“강시의 일종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짚어볼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놀랍게도 마의당 가 당주가 사공자의 수하가 되었사옵니다.”
율기의 말에 사공소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꼬장꼬장한 가 당주가?”
“예, 교주님.”
율기는 허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전부터 가 당주가 강시 복원을 위해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연구가 진척되었다는 보고를 접했습니다.”
“일 리가 있는 말이군.”
사공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율기의 추측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역시 그릇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인가?”
사공소는 마현과 추도영의 이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