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12화
“호여정으로 가시는 길입니까?”
마현은 다가와 포권을 취하며 물었다.
“그래요.”
설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너는 이만 물러가도 된다.”
마현은 시녀를 물린 뒤 설린과 한한파파보다 약 반걸음 앞서 걷기 시작했다.
우연찮게 마주치기도 했고 허진의 말이 떠올라 동행을 했지만, 마현은 이내 후회했다. 함께 길을 걷고 있었지만 할 말이 없었던 까닭이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 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무슨 말이라도 한 번 해보자는 심산으로 용기를 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도도한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피식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마현은 괜스레 더욱 어색함을 느끼며 묵묵히 걸음만 내딛을 뿐이었다.
마현은 몰랐지만 그런 마현을 설린은 내심 곁눈질로 관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현이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슬쩍 쳐다보더니 피식 웃음을 내뱉으며 다시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실소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설린은 걸음을 멈추고 한한파파를 향해 얼굴을 살짝 내밀며 물었다.
“파파, 혹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뜬금없는 말에 한한파파는 곱게 화장한 설린의 얼굴을 세세히 살폈다.
“아무것도 안 묻었는데요, 아가씨.”
“정말?”
“아무렴요, 평소보다 더 고우십니다.”
한한파파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설린은 미간에 옅은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획 꺾었다. 자신이 발을 멈추자 저만치 멈추고 서 있는 마현의 눈에 바로 들어왔다.
‘이 사람이 정말?’
설린은 메마른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났다.
* * *
마교 내원에는 자그만 호수 하나가 있었다.
그 호수 위에 세워진 아담한 정자가 바로 오늘 마현이 갈 호여정이란 곳이었다.
벌써부터 그곳에는 선남선녀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생각보다 늦는군.”
칼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십대 초반의 사내였다. 사내는 마치 사냥꾼처럼 팔 전체가 드러나는 조끼 모양의 호피에 헐렁한 무복 하의를 입고 있었다.
피부는 구릿빛이었고, 그다지 크지 않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단단한 바위를 연상시키는 듯한 근육들이 울퉁불퉁 돋아 있었다.
또한 몸 곳곳에는 맹수의 발톱으로 짐작되는 무수한 상처들이 마치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아이, 참. 오빠는 그 급한 성격 좀 죽여.”
옆에 앉아 있던 소녀가 그런 사내를 보며 퉁명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그 소녀 역시 몸에 착 달라붙은 가죽 옷을 입고 있었는데, 앳된 얼굴과는 달리 매끈한 몸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소녀는 탁자 위에서 벌러덩 누워 배를 드러낸 채 가릉거리는 백묘(白猫)의 배를 간질이듯 쓰다듬고 있었다.
두 남매는 남만야수궁의 소궁주와 그의 여동생으로 호아왕(虎牙王) 야율황기와 야화(野花) 야율선이었다.
“하하하, 야율 형. 원래 미인은 늦게 나타나는 법이 아니겠소.”
장대한 체구에 굵직한 목소리를 내며 껄껄 웃는 사내는 남해태양궁 소궁주, 태양신성(太陽新星) 양곽원이었다.
“쳇, 그깟 계집이 예쁘면 얼마나 예쁘다고…… 그래봤자 천으로 몸뚱이를 칭칭 감고 나타나겠지.”
“오빠!”
야율황기의 말에 야율선이 눈을 부라렸다.
“아, 알았다고…… 쩝.”
“하하하하.”
야율황기와 야율선의 대화로 조금 지루해졌던 자리에 웃음이 감돌았다.
“이거 제가 늦은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무량수불.”
그때 한 사내가 호여정 위로 올라왔다.
그는 무당파 학방이었다.
학방이 나타나자 사람들의 눈에 실망감이 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무림맹에서 온 이들은 대부분 나이가 제법 있었고, 후기지수라 일컬을 만한 연배가 없었기에 참석하지 않으리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학방이 호여정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무림맹의 입장에서 그냥 모른 척 빠지기에는 체면이 상한다고 생각했던지 그나마 무림맹의 사절단으로 온 이들 중에 비교적 젊은이 축에 끼는 학방을 보낸 듯싶었다.
“아닙니다, 어서 올라오시지요.”
추도영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비어 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학방 역시 이 자리가 동석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나이가 서른 하나였다. 후기지수라 부르기에는 나이가 조금 많은 것이다.
이제는 서서히 정파 후기지수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있는 처지였다. 또한 후기지수 때 불렸던 ‘태극검룡’, 줄여서 태룡이라는 별호도 이미 내려놓은 상태였다.
나이로만 따진다면 여기서 가장 연장자인 추도영과 서너 살 차이가 나지만 추도영은 후기지수의 대표 격인 인물이었고, 자신은 이제 후기지수가 아닌 기성세대로 편입되어 가는 입장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더욱이 여기 모인 이들 모두 무림맹과는 그다지 좋은 친분을 가진 세력들이 아니기에 분위기는 더 어색해졌다. 사실 학방 역시 무림맹 어르신들의 명이 아니었으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휴우,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질 한두 명쯤 데리고 올 것을…….’
그렇게 후회를 해보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그나저나 빙화뿐만 아니라 새로 공자 자리에 앉은 사공자도 보이지 않는군.”
야율황기는 특유의 칼칼한 목소리로 좌중을 둘러보며 들으라는 듯 제법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낄낄낄, 그래도 나름 처신을 하는 자이니 너무 역정 내시지 않아도 됩니다.”
도종극이 음산한 웃음을 섞어 말했다.
“사형제지간인데 그 사공자와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듯싶습니다.”
양곽원이 반짝이는 눈빛을 갈무리하며 은근슬쩍 도종극을 떠보았다.
“양 소궁주는 말조심하시오.”
의외로 다른 곳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로 사공찬이었다.
“누가 누구와 사형제지간이란 말입니까? 크흠!”
사공찬은 격한 헛기침을 내뱉으며 식어 있는 찻잔을 들어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자자, 그만들 하여라. 이해해 주시오.”
추도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공찬과 도종극을 가볍게 꾸짖은 후 양곽원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사공자는 교주님이 아닌 부교주님의 제자입니다.”
“……이런, 결례를 저질렀군요. 미안하오, 이공자.”
양곽원은 사공찬을 향해 포권을 쥐어 보였다.
“내 조금 있다 벌주로 세 잔 마실 터이니 그만 화를 푸시오.”
“내 잘못도 없다 할 수 없으니 같이 마십시다.”
양곽원의 사과에 사공찬 역시 포권으로 답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때 마현이 호여정 위로 올라섰다.
마현은 포권을 쥐며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괜찮…….”
추도영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인사를 건네고 있었지만 그의 음성은 이어지지 못했다. 마현 뒤로 설린이 호여정으로 올라온 탓이었다.
설린은 가볍게 목만을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여기에 앉으시지요.”
추도영은 의도적으로 비워 놓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것은 마교 칠장로 삼안혈화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나란히 앉으면 자연스럽게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고 거기에 술까지 더해져 흥이 동한다면 좀 더 쉽게 친해질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든 설린과 친해지려고 추도영은 누구보다도 먼저 호여정에 도착해 그녀의 자리를 비워두었다. 나름 의미심장한 미소를 애써 감추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빈자리로 그녀를 안내했다.
설린은 눈만 살짝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올리고는 추도영이 가리킨 비어 있는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늦어서 미안하다든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든지 그런 말은 일체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그녀를 불평하지 않았다.
“언니, 오랜만.”
자리에 앉는 설린을 향해 한 손을 탁자에 괴고 있던 야율선이 나머지 한 손을 가볍게 흔들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설린은 그런 야율선을 향해 살짝 눈인사를 건넸다.
그 덕분에 마현은 따가운 눈초리를 받지 않고 조용히 비어 있는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본의 아니게 그 자리는 설린의 바로 맞은편이었고, 그 옆에는 학방이 앉아 있었다.
마현은 어색한 자리에서 그나마 아는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학방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옆에 앉아 있다 보면 상황상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손정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교와 정파를 떠나 살짝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학방 역시 어색한 자리에서 그나마 마교로 오면서 안면을 익혔던 마현이 옆자리에 앉자 웃으며 마현을 반갑게 맞았다.
“오랜만입니다, 설 소저. 아니 이제는 소궁주라 불러야 하나요?”
“편한 대로 하세요.”
설린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하하, 여전합니다. 설 소저.”
호탕하게 웃으며 양곽원이 모두에게 제의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소궁주니 뭐니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들 말고 그냥 편하게 부릅시다. 대부분 동년배이니 극존칭를 쓰는 것도 조금 자제하고…… 어떻습니까?”
양곽원의 말을 굳이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친해지자고 마련한 자리니 오히려 다들 반기는 입장이었다.
“학방 도인은 대우를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야율선의 말에 좌중의 이목이 학방에게 쏠렸다.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짓던 학방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쾌활하게 웃었다.
“그럼 저는 선배라는 호칭으로만 만족할까 합니다, 무량수불.”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거참 이럴 줄 알았으면 선이 따라 빙궁에 한 번 갈걸 그랬나? 나는 야율황기요.”
야율황기는 칼칼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설린을 향해 대뜸 자신을 소개했다.
“설린이예요.”
“쩝, 확실히 예쁘군.”
야율황기의 칭찬에도 설린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우리 남만처럼 그 뽀얀 살결만 좀 드러내면 더 예쁘겠구만……. 뭘 그리 불편하게 온몸에 천을 칭칭 감았는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구먼.”
“오빠!”
야율황기의 애매모호한 중얼거림을 들은 야율선은 소리를 빽 질렀다.
“하하하하하.”
“하하하.”
제법 가벼워진 분위기여서인지 남매의 대화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어찌 보면 짓궂은 농담에 화를 내거나 얼굴을 살짝 붉힐 법도 하건만 설린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여전했다.
그 탓인지 약간의 어색함이 감돌았다.
그렇다고 그녀에 대한 관심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다들 애써 밝은 분위기를 내며 설린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오늘 자리에 모인 사내들, 남해태양궁의 양곽원, 남만야수궁의 야율황기, 그리고 마교의 대공자에서 삼공자까지. 애초에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마현과 도인인 학방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설린과 한 마디라도 더 나누려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는 사이 하나같이 화려하고 좀처럼 볼 수 없는 진미들로 푸짐한 상이 차려졌다. 술까지 더해지자 분위기는 한층 더 흥이 살아났다.
물론 설린과 그녀로 인해 약간은 소외된 야율선은 제외하고였다. 그리고 설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두 사내, 학방과 마현 역시 제외였다.
야율선은 조용히 학방과 이야기를 나누는 마현을 잠시 쳐다보다가 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언뜻 스쳐 지나가는 것이긴 하나 마현을 향한 설린의 시선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마치 재미난 장난감을 찾은 어린아이처럼 반짝였다.
“사공자 되세요?”
“그렇습니다.”
“재주도 좋으시네…….”
야율선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