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11화
마교 본산으로 들어서며 조금 전부터 이것저것 설명을 하기 시작했는데, 실상 그의 시선은 설린에게 고정되어 있다시피 했다.
“하아, 대단하군.”
“……허어.”
문제는 그 감탄사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온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설린의 표정은 무심함 그 자체였다.
‘과연 빙화라 이건가?’
추도영은 내심 오기가 끓어올랐다.
빙화라 불리는 별호답게 그 성격이 무척이나 차갑고 도도하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그녀는 상상 이상이었다.
아무리 차갑고 도도하다 한들 이처럼 자신이 떠들었으면 그 어떤 반응이라도 한 번쯤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강하면 강할수록 꺾는 맛이 있는 법이지.’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마침 추도영과 설린의 눈이 마주쳤다. 추도영은 습관적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설린은 턱을 살짝 치켜들며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는 대로 삼안혈화 장로를 한 번 만나봐야겠군.’
여인을 녹이려면 같은 여인에게서 그 해답을 듣는 것이 빠를 거라고 추도영은 생각했다. 그가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현은 걷는 내내 곁눈질로 무림맹 사람들을 살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림맹 무리 안에 있는 무당파 도인들이었다.
마현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무당파지만 보이는 이들은 모두가 낯선 얼굴이었다.
‘하긴 수십 수백의 도인들이 모여 있는 무당파이니…….’
마현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협곡 위로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잘 지내냐, 손정?’
파란 하늘 속에 둥실 떠다니는 구름 한 점이 마치 손정의 얼굴처럼 보였다.
‘씩씩한 녀석이니 잘 적응했겠지.’
손정을 떠올린 탓인지 마현의 시선이 다시 무당파 도인들에게로 향했다.
“무당파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때 무당파의 대표로 온 학방이 옆으로 다가왔다.
“아닙니다. 그저 무당파의 진무각주 청허진인의 무명이 워낙 쟁쟁한 터라 한 번 눈여겨본 것뿐입니다.”
마현은 대충 둘러댔다. 청허진인과의 인연을 굳이 밝힐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밝혀 봐야 실이 되면 실이 되었지 득이 될 리 만무했다. 그리고 손정이 청허진인의 제자로 들어갔으니, 잘하면 손정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일부러 그리 말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학방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른 이가, 그것도 마교의 사공자가 무당파 청허진인에 대해 좋은 뜻으로 아는 체를 하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허 사숙께서는 요즘 바빠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즘 제자 한 명을 두었는데, 그 막내 사제 가르치는 재미에 쏙 빠지신 듯합니다, 하하하.”
이렇게 쉽게 손정의 이야기를 들을 줄 몰랐던 마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드리웠다.
“그렇습니까? 청허진인의 제자라면 필시 대단하겠군요.”
그러면서 넌지시 손정에 대한 궁금증을 내보였다.
“아무렴요. 무당파 장문인을 비롯해 사숙님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한 기재입니다. 조만간에 무림에 신성 하나가…….”
침이 튀도록 말을 쏟아놓던 학방은 불현듯 무안한 듯 말을 멈췄다.
무당파의 자랑인 청허진인과 그 뒤를 잇는 막내 사제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흥에 겨워 자랑만 늘어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거 본의 아니게 자랑만 늘어놓았습니다, 험험험. ……무량수불.”
무안함이 헛기침으로도 가시지 않았던지 학방은 도호까지 덧붙였다.
“아닙니다.”
그렇게 어색하게 대화가 끊겼다.
마현은 협곡 사이로 난 대로로 고개를 돌렸다.
‘잘 지내고 있구나…….’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마현의 모습을 지켜보는 눈빛이 있었으니, 바로 설린이었다.
창밖으로 협곡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설린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일행의 가장 앞쪽에 선 마현에게 멈추었다.
그는 함께 마교로 들어가는 일행들 중 한 번도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제껏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내지 않은 유일한 사내인 것이다.
“음…….”
묘한 감정이 생긴 것일까.
설린이 그녀답지 않게 비음을 삼키며 창문에 걸린 휘장을 내려 버렸다.
“아가씨, 어디 아프십니까?”
그 갑작스러운 행동의 변화에 한한파파는 깜짝 놀랐다.
“아니. 괜찮아.”
딱히 표정이나 말투의 변화는 없어 보였지만 한한파파는 왠지 뭔가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걱정스런 눈으로 설린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 피곤한가봐.”
설린은 그런 한한파파의 시선을 피해 눈을 감았다.
* * *
“소궁주님.”
마차 밖으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린을 호위해서 온 북해빙궁 설영대의 대주였다.
“무슨 일이냐?”
한한파파는 창문을 가린 휘장을 걷었다.
“천마등선비입니다.”
“흠…….”
가래가 잔뜩 낀 침음성을 흘리며 한한파파가 설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잠시 후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설린이 조용히 감았던 눈을 떴다.
“마교로 왔으니 마교 법을 따라야겠지.”
달깍.
설린이 몸을 일으키자 설영대주가 냉큼 문을 열었다.
“내리세요, 아가씨.”
한한파파가 먼저 내리고 이어 설린이 내렸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 천마등선비 앞에서 강한 거부감을 표출시키던 일행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저 창문으로만 보이던 설린의 얼굴만으로도 가슴이 울렁였는데, 그녀의 전신이 한눈에 들어오자 그 아름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가씨, 저곳입니다.”
설린이 뚜벅뚜벅 천마등선비 앞으로 걸어갔다.
마현은 막 천마등선비에 예를 다하고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런 마현의 시선과 설린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자연스럽게 마현의 무덤덤한 얼굴이 그녀의 눈을 스쳐지나갔다.
자철석(磁鐵石)에 이끌린 듯 설린의 눈동자가 마현을 따라 움직였다.
“아가씨?”
때마침 들린 한한파파의 음성에 설린은 정신을 차리며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응?”
“예를 올리셔야지요.”
“아, 나도 오체투지를 해야 하는 거야?”
그 목소리에 옆을 지나던 마현이 발걸음을 잠시 세웠다.
“아닙니다, 그저 예만 취하면 됩니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
설린은 마현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전하려 했지만 이미 마현은 그녀의 말과는 상관없이 훌쩍 걸음을 내딛은 후였다.
자신의 등 뒤로 걸어가는 마현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설린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혔다.
“무례한 자군요.”
옆에서 지켜보던 한한파파가 기분 나쁘다는 듯 속삭였다. 설린은 한한파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조금 나쁘네.”
설린은 살짝 인상을 쓰며 천마등선비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당연히 오늘 처음 본 사이였고, 예를 갖추어 인사도 나누었다. 더구나 그다지 무례한 짓도 하지 않았다.
굳이 무례함을 따지자면 조금 전처럼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렇다고 ‘왜 다른 사람처럼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냐’며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태어나 처음 겪는 무관심 때문인지, 설린은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다.
가슴 속에서 욱하는, 정확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열기가 설린의 속을 긁어댔다.
“정말 무례한…… 아, 아가씨?”
무심코 대답하던 한한파파의 눈이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몇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너무도 오랜만에 설린이 자신의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이다.
하지만 습관처럼 다시 공허한 표정으로 돌아간 설린은 그런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한한파파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공손히 천마등선비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한한파파의 뚫어질 듯한 시선이 멀어지는 마현의 뒷모습에 가 꽂혔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밤.
마현은 흑풍각을 나섰다.
오늘밤 호여정(湖艅亭)에서 석찬(夕餐) 자리가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무림맹을 제외한 세외삼궁은 차기 궁주들인 소궁주들을 이번 연회에 각 궁의 대표로 보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마교의 네 공자들과 세외삼궁 소궁주들의 자리가 마련된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가능하면 새외삼궁 소궁주들과 두터운 친분을 나누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말주변이 없는 네가 잘 해낼지 걱정이 되는구나.”
“…….”
“동년배들의 모임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고 오면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예.”
마현은 흑풍각을 나서기 전 허진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러자 쓴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마현은 스스로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말수도 없는 편이고, 상대가 먼저 다가오지 않는 이상 누군가와 그다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가벼운 마음이라…….’
허진의 말을 다시 떠올리니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든 되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현은 그렇게 호여정으로 향했다.
그 시각, 북해빙궁에 내어준 마객당 귀빈실.
설린이 한한파파의 잔소리를 들으며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답답해, 파파.”
“그래도 입으셔야 합니다, 아가씨.”
한한파파는 설린을 달래며 새하얀 비단으로 지어진 화려한 궁장을 입혔다.
중원의 격식에 맞는 옷은 아니었지만 북해빙궁 고유의 복식이 살짝 가미되어 중원의 궁장보다는 많이 간소했고, 활동하기에도 편했다. 하지만 설린은 그마저도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냥 편하게 입으면 안 될까?”
“안 됩니다.”
한한파파는 딱 부러지게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이 북해라면 몰라도 저희는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이곳의 예를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아가씨. 그리고 지금 가시는 자리는 닷새 후 열리는 마교 교주의 환갑 연회보다 더 중요한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
“새외삼궁과 마교의 차세대 주인들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좋든 싫든 안면을 익히고 화합을 도모해야…….”
“알았어, 입을게. 입으면 되지?”
잔소리가 언제 끝날지 모르게 끝없이 이어지자 설린은 한한파파의 입을 막으며 궁장을 입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한한파파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설린이 다시 궁장을 입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대략 반각의 시간이 지나서야 설린은 궁장을 모두 입을 수가 있었다.
모두 갈아입고 다시 곱게 화장을 한 후에야 설린은 마객당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객당 밖에는 마교에서 보내온 시녀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린과 한한파파는 그 시녀를 따라 자리가 마련된 곳으로 향했다.
“음?”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한한파파는 설린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그녀가 쳐다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길 끝에서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마현이었다.
마현 역시 설린과 한한파파를 발견했는지 발걸음을 틀어 그녀들에게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