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5화
“착검!”
이미 비무가 끝났음을 느낀 유령대 제2부대주 구영은 대원들을 뒤로 물렸다.
구영 역시 검을 거두며 왕귀진과 철용을 잠시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제 유령대와 흑풍대 사이의 모든 훈련은 끝이 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흑풍대에 대한 훈련이 끝난 것이다.
지금 상황이 어찌되었든 근 일 년간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땀을 흘렸었다. 그렇기에 마지막 말이라도 몇 마디 건넬까 싶었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흑풍대를 보자 그럴 분위기가 아님을 느꼈다.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라도 가벼운 인사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한참이 지나도 흑풍대의 무거운 분위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 흑풍대의 마음을 유령대원 누구라도 잘 알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혀를 내두를 만큼 모두가 정말 지독하리만치 일 년간 오로지 무공만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이제껏 약하고 무능한 삼류 마인이라며 무시 받고 소외당하던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교내에서도 한 명의 마인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던 자신들에게 기회를 준 주군, 흑풍마군 마현을 위해.
하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또한 제대로 된 상승마공을 익히지 못하고 이미 나이를 먹어 버린 몸의 한계 역시 넘지 못했다. 아무리 마심단이 마교에서 알아주는 영단이라고 해도 이미 막히고 굳어 버린 기혈까지 뚫어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흑풍대원들의 실력이 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노력의 대가를 받았다.
마심단과 더불어 교 소속 마인이라고 해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상승마공에 의해 삼류 마인에서 벗어나 모두 절정마두에 올랐다.
특히 애초부터 가장 두각을 드러냈던 대주 왕귀진과 철용은 초절정마두의 경지에 한걸음 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그들은 강해졌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상대적 기준이지 마교 내에서의 절대적 기준은 아니었다. 분명 강해졌지만 여전히 그들은 약자였다.
엄밀히 따지면 지금 흑풍대는 마교 호원소속의 무력단체와 교주, 부교주, 그리고 세 공자의 직속 무력단체에 비교하면 가장 약하다.
사실상 오늘도 흑풍대가 이처럼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도 유령대가 어느 정도 손속에 여유를 둔 탓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승패가 갈리는데 이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복잡한 감정과 여전히 약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는지 몇몇 흑풍대원들의 발 앞에 물기가 한두 방울 떨어졌다.
그런 흑풍대의 모습에 오히려 허진이 착잡한 눈길로 그들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허진 역시 마현 못지않게 그들을 눈여겨보아온 탓에 그들이 어떤 심정으로 연무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침울하게 서 있는지 느낄 수가 있었다.
반면 오히려 마현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현이 원하는 흑풍대는 최고의 검사들로 이루어진 무력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상의 상태가 되었군.’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님,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려무나.”
마현은 석단을 내려와 연무장 위로 올라갔다.
마현이 가까이 다가와서야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흑풍대원들이 군례를 취했다.
“주군을 뵈옵니다!”
“주군을 뵈옵니다!”
마현은 그들의 군례를 받으며 왕귀진과 철용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왕귀진과 철용의 눈도 붉게 변해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마현의 명에 왕귀진과 철용의 고개가 오히려 더욱 숙여졌다.
“주군의 기대에 못 미쳐 죄송합니다.”
“너희들은 약하다.”
“…….”
“하지만 내가 너희들을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
마현은 몸을 돌렸다.
“모두들 따라와.”
* * *
마현이 흑풍대를 데리고 간 곳은 자신의 지하 연무실이었다.
지하 연무실 한편에는 침상과 탁자가 놓여 있었다.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가릉이 지하 연무실로 들어서는 마현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가릉의 인사를 받은 마현은 흑풍대를 이끌고 지하 연무실 중앙으로 향했다.
“일 년간 고생했다.”
그 말에 흑풍대원들의 표정이 다시 침울하게 바뀌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너희들은 너희가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여전히 저희는 약합니다.”
대답하는 왕귀진의 목소리에는 울분과 한이 담겨 있었다.
그토록 노력했는데 여전히 약한 자신과 동료들을 새삼 느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너희들은 약하다.”
“…….”
“…….”
“무인으로서 너희들은 약하다.”
“…….”
“…….”
흑풍대원들의 고개가 더욱 숙여졌고, 침울하게 바뀌었다.
“그 기분을 잊지 마라. 그러면 된다. 왜냐하면 오늘 너희들은 무인의 길을 버리는 것과 동시에 더욱 강해질 테니까…….”
마현의 말은 쉽게 믿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현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왠지 강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맹목적인 믿음 때문이었을까.
한껏 풀이 죽고 생기를 잃은 흑풍대원들의 눈에 다시 열기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흑풍대주.”
“예, 주군.”
“그대부터 하지.”
마현은 왕귀진을 데리고 침상 앞으로 걸어갔다.
“웃통을 모두 벗고 누워라.”
“예, 주군.”
왕귀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상의를 모두 벗고 침상 위에 반듯하게 누웠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무인의 길을 포기해도 괜찮나?”
“속하는 주군의 수하입니다.”
마현은 그 믿음직한 대답에 웃음을 보이며 가릉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가릉은 기다렸다는 듯이 마정석 하나를 꺼내 마현에게 넘겼다.
“고통이 상당할 것이다. 참아라.”
“알겠습니다.”
왕귀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턱 선이 불룩 솟아오르는 것을 보면 어금니를 꽉 깨문 듯 보였다.
“후우.”
마현은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잠시 감아 정신을 집중했다. 동시에 서클 단전에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현은 마정석을 들어 왕귀진의 명치에 위치한 임맥 중 구미혈(鳩眉穴) 위에 올려놓았다. 마공심법이든 정공심법이든 심법을 일으키면 임맥을 타고 반드시 구미혈은 지나간다. 그래서 마현은 구미혈 자리에 마정석을 박으려 하는 것이다.
앞으로 흑풍대가 자연스럽게 단전에서 마력을 끌어올리면 구미혈을 통과하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그 마력에 마정석이 바로 반응하게 된다.
“크으으으!”
마정석이 몸을 뚫고 명치 아래로 박혀 들어가자 그 고통에 왕귀진의 꽉 다문 이빨 사이로 고통에 찬 목소리가 비집고 흘러나왔다.
데스나이트의 몸에 마정석을 완전히 삽입한 것과는 달리 마정석은 왕귀진의 몸 안으로 완전히 박히지 않았다.
마정석은 왕귀진의 명치 부분에 약 3분의 2쯤 박혔다.
“하모니(Harmony)!”
마현이 융화 마법을 시전하자 마정석과 왕귀진의 피부가 맞붙은 부분이 녹으며 뒤엉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정석과 왕귀진의 피부는 둘이 아닌 하나로 변했다.
이제 왕귀진의 구미혈은 마정석 안으로 파고들어 구미혈 자리에 마정석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마정석이 완벽히 왕귀진의 몸에 안착되자 마현의 두 손 위로 여러 개의 원형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그 마법진들은 이리 뒤틀리고 저리 뒤틀리며 원형의 모양에서 탈피하며 마치 조각 퍼즐처럼 다시 거대한 하나의 마법진으로 합쳐져 갔다.
화르르륵―
하나로 합쳐진 마법진에 불길이 치솟았다.
불에 뒤덮인 마법진은 왕귀진의 명치 부근에 박힌 마정석 주위를 배회하다가 안으로 스며들었다.
왕귀진의 입에서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크아아악!”
치지지직!
동시에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후우우웅―
가볍게 진동하는 마정석에서 불로 만들어진 한 줄기 선이 흡사 뱀처럼 왕귀진의 가슴으로 뻗어 나왔다. 실타래에서 실이 끊임없이 풀려나오듯 마정석에 불로 만들어진 선이 왕귀진의 가슴을 태우며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어나갔다.
서서히 크기가 커져가는 그 기하학 무늬는 왕귀진의 마정석 주위를 맴돌던 커다란 마법진의 모양과 똑같았다.
그렇게 왕귀진의 가슴에 인두로 지진 낙인처럼, 그리고 문신처럼 마법진이 새겨졌다.
그렇게 가슴을 가득 채우고 불로 이루어진 한 줄기 선이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마정석을 다시 통과해 아래로 내려왔다.
마정석 아래로 뻗어 나온 불의 선은 한 줄기가 아니었다.
열 줄기였다.
마정석을 기준으로 아래로 뻗어 나온 열 줄기 불의 선은 자그맣고 동그란 마법진을 하나씩 그리고 사라졌다. 마정석을 중심으로 복부에 반월 형태로 만들어진 자그만 열 개의 마법진 중앙은 비어 있었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던 왕귀진은 마법진이 문신처럼 다 새겨지자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모든 작업이 끝나고 뒤로 물러나는 마현의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마현은 숨을 크게 내쉬며 소매로 얼굴을 가득 채운 땀을 닦아냈다.
“다음.”
마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흑풍대원들을 쳐다봤다.
왕귀진의 지독한 비명과 고통에 찬 표정을 봐서일까. 흑풍대원들은 찔끔 몸을 움츠렸다. 그 순간 마현의 눈에 실망감이 돋았다.
“대주님께서 하셨으니 다음은 제가 하겠습니다.”
움츠리는 흑풍대원들 사이에서 부대주 철용이 앞으로 나섰다.
“나는 강해지겠다. 강해진다면 어떤 고통도 무섭지 않다.”
철용은 흑풍대원들을 쳐다보며 나직하지만 힘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하고는 성큼성큼 침상 앞으로 걸어가 왕귀진을 바닥에 고이 눕히고는 웃통을 벗고 침상 위로 올라가 누웠다.
확실히 무리를 이끄는 이는 뭔가가 달랐다.
“시작하겠다.”
마현의 말에 철용은 눈을 감았다.
* * *
구슬땀을 흘리는 마현 곁으로 가릉이 수건을 들고 다가와 공손히 내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군.”
“내 수하를 위하는 일에 수고는…….”
마현은 가릉이 내민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지하 연무실 바닥을 가득 채운 서른 명의 흑풍대원들을 하나하나 쳐다봤다. 그 시선의 끝에 왕귀진과 철용이 있었다.
“보기와는 달리 믿음직스럽습니다.”
가릉의 말에 마현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보이는가?”
“그렇게 보입니다.”
가릉 역시 마현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하긴 아무리 강해지고 싶다고 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법은 아니었지.”
마현은 서른 명의 흑풍대원들의 가슴에 박힌 마정석과 가슴과 복부를 가득 채우며 세겨진 마법진들을 쳐다보았다.
사람의 신체에 마법진을 새겨 넣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술자의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시술에 따른 피시술자의 고통이 그냥 말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 피부란 것이 마법무구처럼 조각하듯 새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달아오른 인두로 피부를 태워 강제로 흠을 만드는 것처럼 마법진을 불로 강제로 태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람의 피부에 마정석이 박혀 있고 그 주위에 흉측한 문신이 그려지는 것이다.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술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흑풍대원들이 타고난 마인이라고 해도 거부감이 들기는 마찬가지. 그 거부감과 두려움을 깨트린 것이 바로 왕귀진과 철용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앞으로 저들은 무림에서 공포의 대상이 될 거야.”
마현은 시선을 돌려 가릉을 쳐다보았다.
흑풍대원을 바라보는 가릉의 눈빛은 반짝거렸다.
“궁금한가? 저들이 가질 능력이?”
마현은 가릉의 눈빛을 보자 입가를 말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가릉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오늘 저녁이다.”
“……?”
가릉은 다시 고개를 들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