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4화
“치, 친하다.”
그렇게 말해 놓고도 스스로가 무안했던지 흑검은 고개를 돌려 마현의 시선을 피했다.
“훗.”
마현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서로의 어깨에,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어깨동무를 가장한 목 조르기를 하는 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흑도와 흑검의 얼굴에도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웃음이 진해졌다. 어깨동무를 한 둘의 팔은 힘줄이 터질 듯 돋아나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힘을 잔뜩 줘서인지, 아니면 목이 졸려서인지 얼굴 역시 잔뜩 붉어져 있었다.
“휴우…….”
결국 마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둘 사이는 물과 기름 같았다.
* * *
파드득.
어두운 그림자가 인기척에 놀라 보름달 속으로 날아올랐다.
사박 사박 사박―
어디가 봉분이고 어디가 땅인지 좀처럼 분간이 가지 않는 묘지터.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삐죽삐죽 제멋대로 자란 잡초가 발목을 붙들었다. 걸을 때마다 잡초 꺾이는 소리가 공동묘지 안을 울렸다.
마현은 품에서 가죽 포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투시술을 시전해 일 년간 묘지터에 파묻어 두었던 마나석들을 찾아 나섰다.
이내 마현은 가장 가까운 곳에 묻어 두었던 마나석을 마법을 이용해 꺼냈다.
만년한옥과 만년온옥으로 만든 마나석은 그 특유의 푸른빛이 사라지고 검회색 빛깔로 변해 있었다.
일 년간 사기를 듬뿍 머금은 마나석은 그 자체만으로도 음산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사기를 흡수한 마나석을 보며 마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호오…….”
그것을 옆에서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보던 흑도가 나직한 감탄사를 터트렸다. 다른 흑사신들 역시 비록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다들 흥미로운 눈길로 사기를 듬뿍 머금은 검회색 마나석을 쳐다봤다.
특히 흑권은 다른 이들보다 더 흥미로운 눈길로 마나석을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흑권은 처음부터 마현과 함께 지금 파묻힌 마나석을 만들었기에 그 호기심은 다른 이들보다 더 컸다.
“주인, 주인.”
흑도는 호들갑을 떨며 마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걸 이용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거야?”
흑도는 마치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마나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음에 드나?”
흑도는 마현의 물음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애초 마인이었고, 지금은 죽음의 기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데스나이트였다. 그러니 사기를 머금은 마나석에 친밀감을 보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마현은 그런 흑도를 보며 피식 웃고는 검회색 마나석, 이제는 마정석이 되어 버린 것을 가죽 포대에 넣었다. 마정석이 가죽 포대에 들어가자 흑도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그제야 마현의 손에서 눈을 뗐다.
마현은 한동안 묘지터를 뒤지며 일 년 전에 묻어 두었던 마나석들을 모조리 찾아 가죽 포대에 담았다. 홀쭉하던 가죽 포대는 어느새 한눈에도 묵직할 정도로 불룩해졌다.
“가 당주의 연구실로 가자.”
마현은 흑사신들을 데리고 마의당 내 지하 연구실로 향했다.
지하 연구실에는 이미 가릉이 와 있었다.
가릉은 지하 연구실 한편을 깨끗하게 치워놓고 마현과 흑사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현은 포대에서 마정석 네 개를 꺼내 가릉에게 건넸다.
“자, 누구부터 할까?”
마현의 말에 흑도가 재빨리 마현 앞으로 튀어나왔다.
“본좌! 본좌!”
흑도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연신 가리키며 두 눈을 나름 초롱초롱하게 뜨며 보란 듯이 깜빡거렸다.
“똥물도 위아래가 있다고 했다.”
흑검이었다.
싸늘한 그 말에 흑도가 눈에 불을 켜고 흑검을 노려봤다.
“서열도 가장 낮은 놈이…….”
흑검은 흑도를 향해 비릿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꼬리를 기분 나쁘게 슬쩍 흐렸다.
“너, 너…….”
하지만 눈매가 달라진 마현의 표정에 흑도는 그저 입술을 달싹거릴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흑검은 고소하다는 듯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이익!”
약이 오른 흑도의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그게 다였다.
이유는 뒤이어 나온 마현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흑검, 흑도.”
“알았다고, 알았어!”
흑도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빽 지르며 몸을 홱 돌렸다.
“그런데 주인!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지금은 저 새끼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흑도는 흑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날뛰었다.
마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쳇!”
그것이 내심 겁이 났을까? 흑도가 얌전히 구석으로 걸어가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마현은 고개를 돌려 흑검을 쳐다봤다.
“험험, 험.”
흑검은 무안한 듯 헛기침을 내뱉으며 마현의 시선을 외면했다. 하지만 마현이 그런 흑검을 계속 주시하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알았네. 내 자중하지.”
그제야 마현은 흑검에게서 시선을 뗐다.
“흑권부터 하지.”
마현은 흑권을 보며 눈으로 침상을 가리켰다. 흑권은 조금 긴장한 모습으로 침상 위로 올라가 반듯하게 누웠다. 마현은 흑권의 상의를 풀어 헤치며 가릉이 내민 마정석을 받았다.
“마나 스캔(Mana scan)!”
마현은 흑권의 신체를 투시해 그의 몸을 세세히 살폈다.
“조금 아플 것이다!”
그 말에 흑권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현은 흑권의 배, 즉 단전 위에 손을 올렸다. 처음 데스나이트로 깨어났을 때에는 없었던 사기가 흑권의 단전에 집중되어 있었다.
데스나이트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생전의 기억과 무공으로 인해 온몸에 고루 퍼진 사기가 자연스럽게 단전으로 모인 듯했다.
원래 마정석을 데스나이트의 심장에 박아야 하지만 흑사신의 경우는 달랐다. 평범한 데스나이트였다면 당연히 심장을 선택했겠지만 흑사신은 이미 다른 존재로 변해 있었다. 그렇기에 마정석을 심장이 아닌 단전에 안착시키려 하는 것이다.
마나 스캔으로 흑권의 중심을 찾은 마현은 그 바로 위에 마정석을 올려놓았다.
마현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룬어로 이루어진 마법 언어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흑권의 단전 위에 올려놓은 마정석과 마현의 손에서 동시에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 마력은 검은 마법진을 허공에 만들며 마정석을 에워 감쌌다.
후우우웅―
마정석은 마법진과 동화되면서 공명음을 냈다. 마정석이 가진 사기로 인해 마법진은 그 자체만의 생명력을 얻었다. 마나의 파장을 만들어내는 마법진과 마정석은 서서히 흑권의 아랫배 피부를 뚫고 밀려 내려갔다.
“흡!”
그 순간 흑권의 눈이 부릅떠졌다.
고통이 생각 이상이었던지 부릅떠진 흑권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마치 늪에 빠진 돌멩이처럼 마법진을 동반한 마정석은 흑권의 몸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마정석이 완전히 흑권의 몸속으로 사라지기 전 마현은 마나로 만든 날카로운 침으로 손가락 끝을 살짝 찔렀다. 그러자 마현의 손가락 끝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마현은 흑권의 몸속으로 이제 거의 다 들어간 마정석 위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툭!
마정석 위로 떨어진 피 한 방울은 마치 솜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흡수되었다. 검회색 마정석은 순식간에 검붉은 색으로 변하며 흑권의 몸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었다.
“흑권, 너는 나의 피를 가짐으로 인해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더라도 나의 감정을 함께 공유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나, 마현은 애초의 약속대로 너에게 제한적이지만 자유를 준다. 그 대가로 너는 나의 완벽한 수신호위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마현의 손바닥 안에 다시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맹세하나?”
“매, 맹세한다.”
고통에 찬 목소리였지만, 흑권의 눈동자에는 희열이 담겨 있었다. 흑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현의 손바닥 위에 만들어진 마법진이 그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푹―!
순간 흑권의 몸이 땅 아래로 푹 꺼졌다.
드르르륵.
마현 바로 앞 땅바닥이 갈라지며 흑권이 천천히 올라왔다.
세 흑사신은 숨을 죽인 채 그 장면을 지켜봤다.
“후우…….”
흑권은 마현 앞에 서며 숨을 길게 토해냈다.
“기분이 어떤가?”
마현은 스스로의 의지로 어둠속에서 깨어난 흑권을 보며 조용히 그 기분을 물어보았다.
“좋네.”
흑권의 말은 아주 짧았지만 목소리에서 희열에 찬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단전을 느끼지 못할 줄 알았는데…….”
흑권은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그답지 않게 감상에 휩싸였다. 흑권은 실제로 자신의 단전에 스며든 마정석을 느끼고 있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흑권은 데스나이트로 깨어나면서 사기를 자연스럽게 단전 부위로 집중시켰다. 그렇다고 죽은 자가 단전을 만들 수는 없는 법. 습관적으로 사기를 단전 쪽으로 집중시킨 것뿐이다.
그런 사기가 마정석으로 인해 완벽한 중심을 찾아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비록 살아 있을 때처럼 온전한 단전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흑권은 만족했다.
“그대에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흑권은 고개를 들어 마현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피의 맹약으로 인해, 아니 그 전에 그대가 살아야만 우리가 살 수 있기에 그 어떤 위험에서도 반드시 목숨을 지켜주겠네.”
흑권은 복잡한 눈빛을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우리의 주군이 될 자격이 생긴다면 본좌는 그대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네. 그게 언제가 될지 몰라도 본좌는 기다리겠네.”
“…….”
방금 흑권이 한 말은 전에도 종종 들어왔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음을 느꼈다.
“좀 쉬고 싶군. 이 기분을 홀로 느끼고 싶네.”
흑권은 전과 달리 자신의 의지로 다시 어둠으로 돌아갔다.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흑검과 흑창은 잠시 숙연한 마음에 입을 꾹 닫은 채 흑권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았다.
“오, 오우! 단전! 단전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지?”
하지만 흑도는 두 팔을 들어 부르르 떨며 격앙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마현 앞으로 훌쩍 뛰어와 섰다.
“다음은 본좌!”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돌로 만들어진 석단 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누우면 되지?”
역시나 대답을 듣지 않고 석단 위로 올라가 반듯이 누워 버렸다.
“으흐흐흐흐. 단전이라……, 크흐으으. 우헤헤헤헤.”
흑도는 뭐가 그리 좋은지 누워서도 연신 헤픈 웃음을 남발했다.
* * *
초가을에 들어섰다지만 아직까지 여름의 뜨거운 기운은 남아 있었다. 그런 열기에 유령대 제2부대와 흑풍대의 열기가 더해지자 연무장은 한여름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창, 창, 창, 창―
연무장은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흠…….”
연무장이 내려다보이는 석단 위.
허진과 마현이 유령대와 흑풍대의 집단 비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현은 흑풍대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미소를 살짝 띠었다.
한눈에도 확연히 흑풍대의 열세가 보였지만 전과 달리 단 한 명도 바닥에 쓰러진 자가 없었다. 유령대의 검에 온몸에 검상을 입고 피를 흘렸지만 흑풍대는 단 한 명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흑풍대는 유령대와 비교해 우위를 점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 실력 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풍대는 끈질기게 버텼다.
하지만 오기와 끈기만으로 실력 차를 극복할 수는 없는 법.
“……졌소.”
더 이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흑풍대주 왕귀진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항복을 선언했다.
“대, 대주.”
그러자 부대주 철용이 거친 목소리로 왕귀진을 불렀다.
“아직 더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왕귀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악과 깡으로 버틴 끝에 아직까지 쓰러진 흑풍대원은 없었지만 모두들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고, 지금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에 반해 유령대는 여전히 강한 힘을 표출하고 있었다.
“대주!”
왕귀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철용이 다시 한 번 그를 다그쳤다.
“흑풍대는 주군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으나, 이런 비무로는 다쳐서도 죽어서도 안 되는 존재들이다. 그건 부대주,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왕귀진의 말에 철용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참이나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모두 검을 거둬라. 우리가…… 졌다.”
철용의 명에 흑풍대원 모두가 하나같이 턱이 부셔져라 입을 꽉 다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누구 하나 검을 쉽게 거두는 이들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