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2화
다탁 위로 향긋한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는 찻잔을 내려다보는 추도영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다. 마치 뒷간에 가서 뒤를 닦지 않고 그냥 나온 사람처럼 찜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9개월이 흘렀다.
9개월 전, 마현과 가릉의 뒤를 쫓던 자신의 비밀 정보조직인 무영대 대원의 시체가 흑풍각에서 나와 마의당으로 옮겨졌다.
마치 보란 듯이…….
긴장감이 증폭되고 그 어떤 반응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마현은 부마전 내 흑풍각에 틀어박혀 외부와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그 시간 동안 추도영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여러 방면으로 손을 써놨지만 결국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논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결론만 따진다면 자신이 마현의 손에 놀아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짜증과 함께 불쾌감이 치솟아 올랐다.
“대사형, 계십니까?”
그때 삼공자 귀영마군 도종극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쩐 일이냐?”
불쾌감과 짜증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졌던 추도영이었다. 그런데 도종극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하지만 부드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도종극은 걸어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덥다, 시원한 냉수 한 잔 가져와.”
도종극이 뒤따라 들어온 시녀에게 명령하며 추도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사형. 사공자, 그놈 말입니다.”
“왜? 무슨 움직임이라도 있는 게냐?”
추도영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움직임은 무슨……. 부마전 안에 무슨 꿀이라도 발라놓은 모양인지 여전히 밖으로 나오지도 않습니다.”
마현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날 이후 꼬리를 만 놈인데, 정말 대사형의 말대로 우리에게 어금니를 드러내겠습니까?”
도종극은 여전히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어금니를 들이민다고 쳐도 그 어금니가 어디 어금니입니까? 삼류 마인들로 만든 흑풍대로 뭘 할 수 있다고…….”
마침 시녀가 가져온 냉수 사발을 본 도종극은 목이 탔던지 받자마자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건 우리 생각만일 수도 있다. 부교주가 그냥 놔두었다는 게 마음에 걸려.”
“참 답답합니다, 대사형.”
도종극은 과장되게 가슴을 탕탕 쳤다.
“부교주야 발언권과 힘을 가지고 있다지만 가진 세력도, 그를 따르는 파벌도 없습니다. 물론 부교주의 힘으로 흑풍대를 만들어 줄 수 있지만 우리 쪽 사람이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에 사공자가 직접 흑풍대를 만들도록 허락한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도종극은 답답하다는 듯 추도영을 쳐다봤다.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그리 말하려 했지만 추도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제 사공자에게서는 신경을 끄고 우리 밀약에 따라 이사형의 목이나 먼저 칩시다.”
도종극은 목소리를 살짝 낮춰 은밀히 말했다.
추도영과 도종극의 밀약은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둘이 힘을 합쳐 사공찬을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둘이 힘을 갖춘다고 해도 현 교주의 독자인 사공찬의 존재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또 자칫 교주가 부자의 정을 느껴 사공찬을 편애하게 된다면 제아무리 둘이 기를 써도 소교주 자리에는 오를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컸다.
물론 그 밀약을 맺을 당시 소교주 자리를 위협하는 이는 사공찬이 유일했지만, 후일 그런 존재가 나타난다면 역시 힘을 합쳐 제거하자는 내용도 밀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그렇게 둘만 남기 전에는 서로 상대방의 영역에는 침범하지 않기로 약조했었다.
추도영은 이 밀약을 들어 도종극을 이용해 마현을 견제하려 했었다.
“대사형이 이렇게 심장이 작은 줄 몰랐습니다.”
여전히 침묵에 빠져 고민하는 추도영의 모습에 도종극은 드러내놓고 낯을 찌푸렸다.
“말조심해라.”
도종극을 향한 추도영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맴돌다 사라졌다.
“거참, 성격 한번 급하시기는……. 낄낄낄.”
그런 모습에 도종극은 특유의 웃음을 터트리며 탁자 위에 올려놓은 부채를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
“어차피 사공자가 언제까지 부마전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만은 않을 것 아닙니까? 움직임이 보인다 싶으면 이사형을 꼬드겨 움직여 보지요. 어차피 둘은 이미 편한 사이가 아니니까……. 낄낄낄.”
도종극은 사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은 원하지 않는 방향이었다.
가능하면 도종극과 마현을 부딪히게 하고 싶었던 추도영이었다. 하지만 마현이 움직이지 않으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단 도종극의 말대로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삼사제 말대로 일단 그리 해야겠군. 하지만…….’
추도영은 고개를 들어 도종극을 쳐다봤다.
‘그 싸움에 너도 끼어들어야 할 것이야.’
“삼사제 말대로 하지.”
그런 마음과 달리 추도영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 * *
흑풍각 내 마현의 서실.
마현은 가릉과 함께 서탁 위에 놓인 목각 인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목각 인형에는 수많은 점들이 빼곡히 찍혀 있었다.
목각 인형은 무공 수련을 위한 것이 아닌 의원들이 보통 의생 시절에 의술을 닦기 위해 사용하는 인형이었다.
“신기하군. 단순히 혈을 짚어 지혈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몸을 마비시킬 수도, 또 목소리를 나오지 않게도 할 수 있다니…….”
가릉은 몸소 시범까지 보여 마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무림인으로서 꼭 알아야 할 필수 지식을 가르쳤다.
다른 것은 몰라도 마현은 지혈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마현은 흑마법사였다.
백마법사와는 달리 치료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 전쟁 중 몸에 상처가 나면 응급처치로 그 부분을 마법으로 얼리거나 뜨거운 열기로 지져 지혈을 하곤 했었다.
물론 부작용이 상당했지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그런 것까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또한 전쟁이 잠시 중단되거나 했을 때 아군 백마법사들을 찾아가 치료를 하면 되니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하르센 대륙에는 의원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돈 있는 자는 백마법사들을 찾아가거나 아니면 빛의 신관들을 찾아가면 그만이고, 하층민들은 그들만의 민간요법이 있었지만 검증되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다지 효험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실정이다 보니 마현 역시 치료 쪽에는 무지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현은 의원의 길을 걷지는 않겠지만 제법 심도 있게 공부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음을 느낀 가릉이 펼쳐진 책들을 접어 정리했다.
“유령대 연무장으로 가볼 텐데 함께 갈 텐가?”
“예, 주군.”
마현은 가릉과 함께 흑풍각을 나와 유령대 제2부대 연무장으로 향했다.
창 창 창―
연무장에 가까이 다가가자 병장기 소리가 들려왔다.
“큭!”
“컥!”
더불어 짧은 비명 역시 들려왔다.
굳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유령대의 손에 나가떨어지는 흑풍대의 비명임이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무장에 들어서니 흑풍대 대원들이 바닥에 쓰러져 끙끙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가히 보기가 좋지 않군.”
마현은 바닥에 나뒹구는 흑풍대를 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상당히 좋아진 상태입니다.”
마현은 흑풍대를 자주 찾지 않았지만 가릉은 거의 매일 한 번씩 들려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마심단은 지급하지 않았나? 만들어진 지 제법 되었을 텐데…….”
가릉의 보고에 의하면 마심단이 만들어진 것이 2달 전이었다.
“구 부대주와 상의 끝에 한 일주일 후쯤 지급할 생각입니다.”
마현은 고개를 돌려 가릉을 쳐다봤다.
가릉은 마현의 눈빛이 무얼 묻는지 알아차리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구 부대주는 좀 더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고 현재 익히고 있는 마공심법을 비롯해 마공이 완전히 몸에 익은 후 지급하는 게 더 좋을 것이란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노신 역시 그게 좋을 것 같다 판단했습니다.”
“흠…….”
마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고개를 돌려 연무장을 쳐다보았다.
“현재 순수하게 갈고 닦여진 실전 감각만 따진다면 유령대에 못지않습니다. 더불어 구 부대주는 주군의 뜻에 따라 방어 칠(七), 공격 삼(三)에 맞춰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이후 마심단이 지급되고 반 갑자에 이른 마력을 온전히 흡수만 한다면 주군께서 원하시는 대로 어느 무력단체와 부딪혀도 쉽게 지지 않을 것입니다.”
가릉은 마현에게 현재 흑풍대의 상태를 아주 세세히 설명했다.
“일동 정렬!”
그때 구영이 연무장 구석에 마현과 가릉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훈련을 중지시켰다.
“오셨습니까?”
구영은 그렇게 유령대와 흑풍대를 정렬시킨 후 연무장 아래로 내려왔다.
“내가 방해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닙니다. 안 그래도 이제 오전 훈련을 마치려던 참이었습니다.”
막 구영과 대화가 시작되자마자 연무장이 떠나갈 듯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군을 뵈옵니다!”
“주군을 뵈옵니다!”
흑풍대 전원이 마현을 향해 군례를 취한 것이다.
마현은 구영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연무장 위로 올라가 흑풍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얼굴이며 팔이며 할 것 없이 온몸에 자잘한 상처들이 빼곡히 나 있었다.
마현이 짐작한 것보다 훈련의 강도가 훨씬 더 강한 모양이었다. 많이들 힘이 들었을 텐데 그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표정들이 마음에 드는군.”
마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흑풍대원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전부 주군의 은혜입니다.”
흑웅귀 왕귀진이었다.
그가 앞으로 나와 대답을 하는 모습도,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쳐다보는 흑풍대원들의 모습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은연중 왕귀진이 흑풍대를 이끌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현은 흑풍대를 뽑으며 대주와 부대주를 뽑지 않았다.
굳이 서두를 일도 없었거니와 자연스럽게 그들을 이끄는 자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네가 은연중 우두머리가 된 듯 보이는데…….”
마현의 말에 왕귀진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주군.”
왕귀진 옆에 서 있던 거한이 허리를 숙이며 대신 대답했다.
“이름이…… 철용이라고 했던가?”
“소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셔서 황공하옵니다.”
철용은 더욱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대가 그 다음인가?”
철용은 아무 말 없이 허리를 다시 한 번 숙였다.
마현은 그런 철용과 그 뒤에 서 있는 흑풍대원들의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양이군.”
“어차피 이것도 좋지 않습니까, 주군.”
가릉이 다가왔다.
“왕귀진.”
“예, 주군.”
“현재 공석인 흑풍대 대주는 이제 너다.”
“주, 주군…….”
왕귀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네가 부대주다.”
마현은 고개를 돌려 철용을 쳐다봤다.
“……주군.”
철용 역시 덩치에 걸맞지 않게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제 남은 건 더 강해지는 것뿐인가? 왕 대주, 철 부대주.”
“충!”
“충!”
홀로 독백하듯 말한 마현은 왕귀진과 철용을 불렀다.
“나는 이후 3개월 동안 흑풍대를 보러 오지 않을 것이다.”
“…….”
“…….”
“3개월 후에 보겠다. 강해져 있어라.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들을 내칠 것이다.”
“주, 주군…….”
마현의 말에 왕귀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날 내 마음에 든다면 너희들은 더 강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명!”
이윽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왕귀진은 더욱 우렁찬 목소리로 복명하며 허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