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24화
사천총타로 돌아가려는 이유를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이제 마현은 자신이 함부로 올려다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본교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괜찮다, 말해보라.”
“그게…….”
대답을 할 수도,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왕귀진은 우물쭈물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어허!”
가릉이 머뭇거리는 왕귀진을 향해 나직하게 호통 치며 눈을 부라렸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리 대답하라는 뜻이었다.
“휴우…….”
결국 왕귀진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막상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처지가 떠오른 것이다.
“일 년 전에 소인이 사공자님과 마교로 온 것부터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왕귀진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어깨까지 축 늘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 내용은 마현이 주루에서 왕귀진과 그가 속해 있던 무리가 나누던 이야기에서 유추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왕귀진은 마교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왕귀진은 호원칠무대 중 어느 곳에도 쉽사리 들어갈 수 없었다. 쉽게 결원이 생기지 않는 것도 이유지만, 혹 결원이 생긴다 해도 번번이 들어가지 못하고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기다렸다. 욱하는 개차반 같은 성격을 가진 왕귀진이지만 우직한 면도 있었다. 그래서 참고 또 참으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런 왕귀진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바로 호원칠무대 중 광풍적월대에 결원이 생긴 것이었다.
이 자리만은 확실해 보였다. 모든 심사를 통과했고 마지막 면접에서도 입대를 허락받았다.
그런데 오늘! 바로 오늘이었다.
입대 하루 전 돌연 입대가 최소된 것이다.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왕귀진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이유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들어갈 자리에 다른 이가 들어가 버린 것이다. 자신보다 무공도 약한 이가 단지 그 아버지가 부대주라는 이유만으로.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말하는 동안 감정에 휘말린 것인지 왕귀진은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역시 모두 자신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까지 꺼냈다.
“몇 명이지?”
“예?”
불쑥 던진 마현의 질문은 뜬금이 없었다.
“너의 동료들 말이다.”
“스무 명이 조금 안 됩니다.”
“흠…….”
마현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침음성을 터트렸다.
“모두 믿을 수 있는 자들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그 동료들이 너와 목숨을 나눌 수 있는 자들인가 물었다.”
“비록 본교로 와서 만난 놈들이지만 하나같이 다들 강단이 있는 놈들입니다요.”
마현은 왕귀진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실력은 조금 떨어지나 네가 믿을 수 있는 자들로 모은다면 몇 명까지 모을 수 있나?”
마현의 말에 왕귀진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내렸다.
“제가 인간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아……. 음……. 한 서른 명 안팎입니다.”
왕귀진은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했다.
마현은 흑풍각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몸을 돌려 왕귀진을 쳐다봤다. 왕귀진은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는 마현을 보자 눈을 부릅떴다.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청년, 솔직히 왕귀진의 눈에는 마현이 여전이 아이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올라가지도 못할 태산처럼 다가왔다.
“강해지고 싶나?”
“……!”
왕귀진은 다시 종잡을 수 없는 질문에 눈만 깜빡거렸다.
“강해지고 싶냐고 물었다.”
마현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왕귀진은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
“예?”
왕귀진은 깊숙이 숙였던 허리를 벌떡 일으켜 세우며 마현을 쳐다봤다.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
“…….”
“아무도 너를 아래로 보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
“…….”
왕귀진은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이냐?”
마현의 목소리,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게 날아와 왕귀진의 가슴에 꽂혔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쿵쾅 쿵쾅 쿵쾅!
금방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왕귀진은 주먹을 억세게 말아 쥐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소인의, 목숨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한을 풀 듯 말을 끊어가며 대답하던 왕귀진은 마현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바닥에 엎드렸다.
쿵!
얼마나 세게 엎드렸는지 바닥에서 묵직한 소리마저 들렸다.
“강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목숨까지 드리겠습니다.”
마현은 그런 왕귀진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일 나에게 목숨을 줄 수 있는 자들을 너를 포함해 서른 명 데리고 오라.”
왕귀진은 엎드린 상태로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나에게 목숨을 맡기는 자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 앞으로 나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허리를 숙이지 않게 만들어 주겠다. 알겠나?”
마현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왕귀진에게서 시선을 떼고 흑풍대 막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쿵!
그런 마현의 귀에 땅바닥을 찧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 *
쾅!
콰직― 우당탕탕탕!
두꺼운 원목으로 만들어진 서탁이 단번에 산산조각 났다.
부서진 탁자 사이로 추도영이 화가 잔뜩 치민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앞에 사검이 죽은 듯 엎드려 있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추도영의 노성이 터져 나왔지만 사검은 엎드려 있을 뿐 그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
“그래서 시신조차 회수하지 못했다는 소리냐?”
추도영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렇습니다, 주군.”
추도영은 사검의 말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무영대주가 나섰는데도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
“그, 그러하옵니다.”
추도영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렸다.
“혹 비마대의 짓이 아니더냐?”
사검을 바라보는 추도영의 눈빛은 시퍼런 날이 서 있었다.
“그건 아니옵니다.”
“확실한가?”
“소신의 목을 걸겠사옵니다.”
사검의 말에 추도영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결국 사공자의 소행이라는 소리인가?”
“무영대주의 의견에 의하면 그럴 확률이 구할 이상입니다. 다만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시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신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무영대원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확신하지?”
“무영대에 가한 금제는 주군께서 친히 하셨사옵니다.”
“크흠!”
추도영은 눈가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더욱이 금제에 의해 흘린 피가 미세하지만 흔적으로 남아 있었사옵니다. 그러니 무영대원이 죽은 것은 확실하옵니다.”
추도영은 주름이 잡힌 이마 사이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알았다, 물러가라. 그리고 사공자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마라.”
“명!”
“또! 그뿐만이 아니다. 사공자와 접촉하는 자들에게는 모두 사람을 붙여라.”
“명!”
사검은 부복한 자세에서 머리를 다시 한 번 깊숙이 숙인 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역시 네놈은 단순한 놈이 아니었군.”
추도영은 움켜쥔 주먹을 바르르 떨며 눈에서 살기를 폭사시켰다.
“이것으로 네놈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다.”
섬뜩한 목소리와는 달리 추도영의 표정은 금세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바로 움직이면 꼬리를 붙인 것이 나라는 것을 시인하는 꼴이 된다.’
잠시 인상을 쓰며 고민하던 추도영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했던가?’
추도영은 사공찬과 도종극을 떠올렸다.
‘당분간 몸을 숨긴 채 그 둘을 찔러야겠군.’
잠시 본래의 무덤덤함으로 돌아왔던 추도영의 눈이 다시 시퍼런 살심으로 가득 찼다.
‘나를 농락한 대가는 두고두고 살점을 떼어내듯 고통스럽게 갚아주겠다.’
“게 아무도 없느냐?”
추도영이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당장 방 안을 치워라.”
방 안으로 들어오는 시녀를 향해 추도영이 날카롭게 명을 내렸다.
* * *
그 시각.
마현과 가릉은 흑풍각 집무실에서 한 구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귀진이 돌아간 이후 마현이 직접 그 골목길로 가 재빠르게 시신을 가지고 왔다.
홀로 시신을 가져온 이유는 최대한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가릉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마현과 시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긴장감이 역력한 눈빛으로 가릉은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어느새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젖은 것을 깨달은 가릉은 옷에 대충 땀을 닦은 후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고 있었다.
마현은 시신을 향해 손바닥을 내려 마기를 뿜어냈다.
마기가 연기처럼 아래로 내려앉으며 시신을 에워쌌다.
마현의 그런 모습에 가릉의 눈이 반짝거렸다.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마현의 행동과 말,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집요한 눈빛이었다.
“어둠의 기운의 주인, 나 마현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주검 곁에 맴도는 혼백이여, 일어나 어둠 앞에 경배하라! 소울 서먼즈(Soul summons)!”
마현의 입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왔다.
가릉은 처음 듣는 언어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으며 마현이 내뿜는 마기를 살폈다.
‘마, 마기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언어가 공명한다!’
가릉은 언어 자체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어찌…… 언어가 힘을 가진단 말인가!’
가릉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슈후우욱―
가릉이 놀란 표정을 지을 때 시신의 몸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는 마기를 흡수하며 서서히 선명하게 변해갔다. 흐릿한 연기는 점차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헛!’
가릉은 순간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마치 사람에게서 색을 빼앗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채색 연기는 시신과 똑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하체로 내려가면서 형체가 흐트러지는 것만 빼고는 시신과 완전히 똑같았다.
-……나는, 죽었는데?
그 시신은 주위를 살피며 느릿느릿 목소리를 내뱉었다.
마현은 혼백이 온전히 깨어났음을 깨닫자 그 앞으로 걸어가 눈동자에 마기를 담으며 쏘아봤다.
마현의 눈에 담긴 마기가 뿜어져 나와 혼백의 눈동자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혼백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공포를 느끼는 듯했지만, 못이라도 박힌 듯 마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너는 누구냐?”
-마, 말할 수 없다. 말하면 죽는다. 나에게는, 금제가 있다.
혼백은 답답함을 느낄 만큼 말이 아주 느렸다.
“너는 이미 죽었다.”
-맞다. 나는, 죽었지.
“더불어 너는 내 명을 들을 수밖에 없다.”
순간 마현의 눈에서 더욱 짙은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비록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혼백의 턱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편안한 안식을 원하면 나에게 복종하라!”
-편안한, 안식? 쉬고 싶다. 편히, 쉬고 싶다.
“너의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무영대, 십사호다.
어느새 가릉은 소환술의 놀라움에서 벗어나 마현과 혼백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어디 소속이지?”
-무영대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다.
“무영대의 주인이 누구냐?”
-무영대의 주인은, 주인은 대, 대공자 웅천마군, 추도영.
혼백의 대답에 마현의 눈에서 살기가 맴돌았다. 그런 살심은 곧 미소로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