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23화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어느 정도 침착함을 찾은 가릉은 마현을 데리고 소로(小路)에 위치한 주루들 중에서도 그나마 깨끗하고 규모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주루 1층에 들어서자마자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귀가 다 멍할 정도였다. 싸구려 화주의 독한 주향은 코끝을 간질이는 것을 넘어 화끈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게 노인과 막 소년티를 벗은 청년이 들어서자 잠시 주루의 소음이 사라졌다. 하지만 구석으로 가 자리를 잡자 이내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주루 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이런 주루에 있을 술과 안주는 뻔했다.
가릉의 주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독한 화주 한 병과 두어 가지 나물로 만든 소채가 나왔다.
“주군, 한 잔 받으십시오.”
“그러지.”
가릉이 술잔에 술을 따르자 독한 주향이 코끝을 찔렀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군.”
마현은 피식 웃으며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크으!”
생각보다 독한 탓인지 마현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술은 마치 불덩어리를 삼킨 듯 화끈거렸다. 독하기는 하나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첫 잔처럼 단숨에 술잔을 털어 넣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술도 좋지만 그보다 흑풍대에 적합한 이를 찾는 게 더 우선이었다. 그래서 마현은 술잔에 담긴 술을 몇 차례 걸쳐 천천히 마시며 주루 안을 살폈다.
가릉 역시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런 의문은 잠시 마음속에 접었다. 어차피 새벽이 되면 눈으로 확인하고 물을 수 있는 시간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주루 안에서 술을 마시는 마인들의 수준은 마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한참 떨어졌다.
그렇게 조금 실망감이 들 무렵, 시끄러운 소리가 입구에서 들려왔다.
쾅!
“에라이, 개 같은 세상!”
“진정해. 이런 일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누가 몰라서 그래? 그나마 이런 욕이라도 해야 성이 풀리지.”
안으로 십여 명의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자 주루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이 새끼들, 뭘 쳐다봐! 앙? 빨리 자리 안 비워?”
욕지거리를 하며 들어온 사내가 엉뚱한 곳으로 화를 퍼부었다. 그 안하무인격 행동에도 어느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 항의하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시선을 피하는 등 꼬리를 마는 모습들이었다.
딱히 그들의 관계를 알지 못해도 그들이 이곳에 있는 자들보다는 강자라는 사실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그 사내의 엄포 때문일까. 금세 주루 중앙에 자리가 비었다.
사내들은 익숙한 듯,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탁자 세 개를 붙이고는 함께 자리를 잡았다.
‘흐음?’
그 사내들이 들어서자 마현의 눈이 반짝였다.
사내들 중 험한 소리를 지르며 주루 안으로 들어온 이는 마현도 아는 자였다.
바로 사천총타에서 함께 온 흑웅귀 왕귀진이었던 것이다.
마현은 흥미로운 눈으로 왕귀진과 함께 들어온 사내들을 살폈다. 자세히 살펴보니 주루 안에 있는 마인들이 슬슬 피하는 이유가 있었다. 확실히 그들의 몸에서 풍겨지는 마기는 이곳 주루에 있는 마인들보다 짙었다. 또한 눈을 보니 상당한 내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 쓰벌. 왜! 왜! 호원칠무대(護院七武隊) 중 광풍적월대(狂風赤月隊) 결원 자리는 분명 이 왕귀진이 들어가야 할 자리라고. 그런데 뭐? 다른 이가 들어왔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왕귀진은 마치 원수를 만난 것처럼 병이 아닌 독으로 나온 화주를 들고 입 안에 콸콸 쏟아 부었다.
“우라질. 마교는 힘이 우선이라고?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왕귀진은 씩씩거리며 다시 화주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마교 내부는 크게 내원, 외원, 그리고 호원으로 나뉜다.
내원과 외원이 사무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호원은 말 그대로 마교를 상징하는 무력단체들로 구성된 곳이었다. 이 호원 밑으로는 총 7개의 무력단체가 있었다. 그중 광풍적월대는 호원 소속 7개의 무력단체 중 하나였다.
“그만 하게.”
“뭘 그만 해! 새로 광풍적월대에 들어간 놈은 나보다도 못한 놈이라고.”
“그렇지, 자네보다 실력이 하수이지.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광풍적월대 부대주이기도 하고.”
“니미……!”
한 사내의 말에 왕귀진 일행의 분위기는 한순간 침울하게 바뀌었다. 그들의 말을 짐작해 보면 왕귀진이 외부 출신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이유로 광풍적월대에 들어가지 못한 듯했다.
게다가 분위기를 보니 무리의 대부분이 비슷한 사정인 듯했다.
“자네가 보기에 어떤가?”
마현은 턱으로 왕귀진을 가리켰다.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가릉 역시 비교적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저들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마침 안면이 있는 자도 있으니…….”
마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뭘 어떻게 해? 더러워서 짐 싸련다.”
왕귀진은 여전히 술을 벌컥벌컥 마시며 대답했다.
“하긴…….”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나도 이제 포기할까 싶네.”
다른 몇몇은 이미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했는지 상당히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마현은 그런 대화를 들으며 왕귀진 앞으로 걸어가 섰다.
“뭐야?”
왕귀진은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 꼬마는 뭐야? 안 그래도 술맛 떨어지는데…… 안 꺼져? 앙?”
왕귀진은 잔뜩 흥분한데다가 술까지 마셔서 그런지 마현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지 못했으니 못 알아볼 만도 했다.
“오랜만이군.”
나이도 어린 청년이 다짜고짜 말을 낮추자 왕귀진은 마기를 내뿜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잡종 새끼가! 죽고 싶냐?”
왕귀진은 마현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살기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나를 못 알아보는가?”
“내가 너 같은 새끼를 어떻게…….”
왕귀진은 마현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사나운 음성을 토해내다가 딱 멈췄다. 그의 일그러진 눈가가 펴지며 눈동자 또한 벌어지고 있었다.
“너, 너는?”
그러던 왕귀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불현듯 그의 머릿속으로 마현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흐, 흑풍마군?”
왕귀진은 너무 놀랐는지 마현의 별호만 비명처럼 외쳤다.
“그새 이름은 까먹었나?”
마현은 멱살을 잡고 있는 왕귀진의 손을 풀며 구겨진 옷매무새를 바로 폈다.
“마, 마현?”
우당탕탕탕!
왕귀진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주루의 의자들 수십 개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교인이 사공자를 뵈옵니다.”
“교인이 사공자를 뵈옵니다.”
“교인이 사공자를 뵈옵니다.”
주루 여기저기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쿵 쿵 쿵―
동시에 바닥에 부복하는 육중한 소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왕귀진은 하얗게 변한 얼굴로 눈만 껌뻑이며 마현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뒤늦게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와, 왕귀진이 사공자를 뵈옵니다.”
“나를 잊지는 않았군.”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따라와.”
마현은 몸을 돌려 주루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 예?”
왕귀진은 마현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만 들어올렸다.
“따라오너라.”
가릉이 다가와 왕귀진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어허! 말이 많다. 따라오라면 따라올 것이지 뭔 말이 그리 많으냐!”
가릉의 호통에 왕귀진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인적이 없는 골목길.
두 사내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한 사내는 추도영의 웅천각에 모습을 드러냈던 사검이었고, 한 사내는 무영대의 대주였다.
사검은 으슥한 곳에서 주위를 살폈고, 무영대주는 골목길 안을 샅샅이 살폈다.
한참 동안 골목길을 살피던 무영대주가 고개를 들어 사검을 쳐다봤다.
“여기서 흔적이 끊겼습니다.”
그의 말에 사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그만 단서라도 남기지 않았나?”
사검의 물음에 무영대주가 골목길 벽에 미세하게 튄 몇 방울의 핏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곳에서 피를 흘린 듯 보입니다. 아마 금제에 의해 자진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것인가?”
“그렇게 결론을 내려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거 골치 아파졌군.”
사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게 다입니다.”
“무슨 뜻이지?”
“분명 죽었다면 시신을 데리고 간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사공자와 가 당주 역시 둘이 들어왔다가 둘이 다시 나갔습니다.”
무영대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 다른 조력자의 흔적은 없나?”
“현재 사공자에게는 그 어떤 수하도 없습니다.”
무영대주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부교주의 수하일 확률은?”
무영대주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만 철수하라.”
생각 같아서는 더 흔적을 찾고 싶지만 장시간 무영대 대원이 교내에서 활동을 했다간 정체가 드러날지도 몰랐다. 사검은 어쩔 수 없이 철수를 명령했다.
“명!”
무영대주는 나직하게 복명한 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후우…….”
사검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신형을 돌려 웅천각으로 향했다.
* * *
왕귀진은 조금 주눅이 든 모습으로 마현과 가릉을 따라 내원을 지나쳐 부마전 내 흑풍각으로 향했다.
왕귀진이 내원으로 들어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 허진을 모시고 들어온 뒤 근 일 년 만에 내원에 발걸음을 하는 것이다.
그토록 다시 들어오고 싶어 하던 곳이었지만 그런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현과 가릉의 뒤를 따라가기 바빴다.
그러던 왕귀진은 어느 순간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는 나직이 실소를 터트렸다.
처음 마교로 올 때만 해도 왕귀진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저 그런 중소 마도방파의 제자로 있다가 운이 좋아 몸을 담았던 방파가 마교 사천총타로 흡수되며 정식 교인이 되었다.
그렇기에 마교로 오면 이제껏 보지도 못한 상승무공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열심히만 하면 지금보다 고수가 되고 또 마교 주요 조직에도 들어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다 부질없는 꿈일 뿐이었다.
어느새 왕귀진은 마현과 가릉의 뒤를 따라 흑풍각으로 들어섰다.
늦은 저녁임에도 흑풍각은 여전히 흑풍대의 숙소를 짓느라 시끄러웠다.
마현은 흑풍각에 위치한 자신의 처소가 아닌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흑풍대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흑풍대 막사는 여전히 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했지만, 흑풍각과 흑풍대 막사 사이에 난 넓은 공터에는 이미 두툼한 장판석이 깔린 연무장이 완성되어 있었다.
마현은 뒷짐을 진 채 아무 말없이 흑풍대 막사 신축 현장을 바라보았다. 왕귀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마현의 등만 힐끔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왕귀진이 보기에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만은 느낄 수 있었다.
마현이 달라졌다는 것.
처음 사천총타에서 만났던 그때와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달라져 있었다.
“왕귀진이라고 했지?”
“예? 아, 예. 사공자님.”
다른 생각을 하던 왕귀진은 마현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며 얼른 허리를 숙였다.
“저 건물이 무엇인지 아나?”
마현은 왕귀진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물었다.
“소인이야 잘…….”
왕귀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당연히 왕귀진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얼핏 듣기로, 사천총타로 돌아간다고?”
“그, 그렇습니다요.”
“왜 돌아가지?”
“그,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