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22화
어둑해진 실내.
톡 톡 톡 톡.
서탁에 앉아 있는 대공자 웅천마군 추도영은 턱을 괸 채 손가락으로 탁자 위 상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흠…….”
뭔가를 고심하는 듯 추도영의 목소리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이상해…….”
추도영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양손을 포개 무릎 위로 올렸다.
추도영이 이렇게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이유는 바로 마현 때문이었다.
“분명 순순히 내 말을 받아들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눈빛은 차가웠어. 겉으로는 웃을지 몰라도 속으로 분명 칼을 갈 것이라 여겼는데…….”
추도영은 서탁 위에 올려진 한 장의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니……. 내 착각이란 말인가?”
그 한 장의 종이에는 마현의 최근 행적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마현의 움직임은 추도영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분명 마현은 짧은 시간에 힘을 키우기 위해 허진의 직속 무력단체인 유령대를 가질 것이라 여겼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허진이 직접 무력단체를 만들어 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허진 쪽에서는 마현에게 그 어떤 인물도 주지 않았다.
또한 사공찬의 상처로 인해 상당한 마공을 익혔을 거라 예상했었다. 실제로 마현에게서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졌었다. 그런데 보고서에는 허진과 함께 기초 체력 훈련을 한다고 적혀 있질 않은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군.’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들이었다.
더욱이 이해가 안 가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마현이 가릉과 자주 만난다는 것이었다.
가릉이 누구인가?
스스로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잘났다고 여기는 독불장군이었다. 아무도 그와 친해진 자가 없었고, 또한 친해질 수조차 없었다.
심지어 가릉의 제자나 다름없는 몇몇 의술 전수자조차 가릉을 어려워했다. 그런 그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특정 인물을 몇 번이나 만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분명 뭔가 특별한 일을 벌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추도영은 삼매진화로 종이를 태워 버렸다. 이런 인물 동향 보고서는 존재해서도, 또 누군가가 봐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아니야, 내 눈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분명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런데 움직임을 찾을 수 없다는 게 문제야.”
추도영은 재가 된 종이를 내려다보며 미간에 더욱 깊은 골을 만들었다.
‘가뜩이나 사공찬 녀석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난데없이 사공자라니.’
답답했던지 추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어둠이 깔리며 차가워진 바람이 추도영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추도영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나는 반드시 소교주 자리에 오를 것이다. 필요하다면 스승님의 아들인 사공찬을 죽여서라도!’
추도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 야망이 깃들었다.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는 모두 죽여서라도 나는 천하의 주인이 될 것이다, 반드시.’
추도영의 머릿속에 마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직감에 의하면 사공찬보다 더 음흉하고 위험한 놈이라 판단되었다.
‘사공찬의 일을 잠시 뒤로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힘을 가지기 전에 놈부터 제거한다.’
그때였다.
천장에서 그림자 하나가 툭 떨어졌다.
“무슨 일이냐?”
추도영은 창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지금 사공자와 가 당주가 함께 흑풍각을 나섰다는 전갈이옵니다.”
“그래? 사검(四劍)!”
추도영은 자신의 수신호위인 웅천수검(雄天守劍) 중 사검을 불렀다.
“예, 주군.”
“무영대(無影隊)를 시켜 그 뒤를 쫓아라. 무엇을 하는지 반드시 알아오라 하라.”
무영대는 말 그대로 그림자도 없는 조직으로, 추도영이 모든 이목을 속이고 만든 정보단체였다.
대공자라는 신분으로는 만들어서도, 또 가져서도 안 되는 개인 정보단체였다. 하지만 추도영은 암암리에 무영대를 키웠다. 무영대의 존재를 아는 자는 추도영과 그의 수신호위인 웅천수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명!”
추도영의 명에 사검은 다시 천장 위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네놈이 부마전과 흑풍각을 나온 이상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낼 것이다.’
제아무리 살수에 가까운 은신술을 익혔다고 해도 부마전과 흑풍각 안까지 살필 수는 없었다. 굳이 해야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무영대는 절대로 남의 이목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조직이었다.
추도영은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
* * *
마교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정파에서 마인들을 과장되게 묘사할지라도 그들 역시 사람이다.
특히나 칼밥을 먹고사는 이들은 보통 하루의 고단함을 술로 푼다. 저녁이 다가오는 해질 무렵이면 어느 정도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마현은 가릉과 함께 마교 외성에 위치한 주루로 향한 것이다.
주루가 마교 외성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내성에도 있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주루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성향이 다를 뿐이다.
아무래도 고위급 인사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내성 안에 위치한 주루는 격이 높다. 내성 자체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은 일반 마인들이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일반 마인들은 자연스럽게 외성에 위치한 주루를 이용하게 되었다.
마현은 가릉과 함께 외성에서도 가장 허름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길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열되어 있는 건물들은 주루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하나같이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본교 외성에 있다고 해서 어느 정도는 깨끗할 줄 알았는데, 내가 봐도 가히 보기가 안 좋군.”
마현이 눈살을 살짝 찌푸린 이유는 딱히 골목길이 더러워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계층 간의 차별이 있다고 해도 분명 마교 외성 안에 위치한 주루였다.
“세상사가 다 그런 것이 아닙니까.”
마현의 반응에 가릉도 무안했던지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외성의 차별만 있을 줄 알았는데 외성 안에서도 차별이라니…….”
마현은 이곳에 오면서 내성보다야 못하지만 깨끗하고 제법 단아한 주루들을 떠올렸다. 가릉이 마현을 데리고 온 이곳은 마교 출신이 아닌 마인들이 주로 찾은 곳으로써 주루가 밀집한 골목이었다.
하지만 마현은 이 골목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입가는 웃고 있었다.
“바닥이면 바닥일수록 나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지.”
“제가 적당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마현은 가릉을 따라가다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주군.”
『조용하라.』
마현은 전음과 유사한 형식인 매직 마우스(Magic mouth)를 통해 가릉에게 말을 건넨 후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끈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거나 미행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마현은 흑마법사였다.
마법사의 특성상 기감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그렇기에 주위의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어도 어느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클레어보이언트 아이!”
마현의 눈으로 마력이 스며들었다.
클에어보이언트 아이 마법은 투시 마법이면서도 천리안을 가진 이중 마법이었다. 마현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위를 살폈다. 그런 마현의 눈동자가 어느 한곳에 멈췄다.
그곳은 골목길 저편 한 건물의 지붕 위였다. 마현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 세상의 은신술은 하르센 대륙과 많이 다르군.’
마현은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발걸음을 뗐다.
『아무렇지 않은 듯 걸어라. 그리고 저 후미진 골목길로 들어가라.』
『알겠습니다, 주군.』
가릉은 마현의 태도에 재빠르게 상황을 눈치채고는 원래 가는 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골목길로 들어갔다.
마현은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가릉의 몸을 당겨 벽에 바싹 붙었다. 동시에 서클에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은신술이라면 마법을 따라올 것이 없지.’
“림피드 바디(Limpid body)!”
마력이 마현과 가릉의 몸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가릉은 몸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에 흠칫했지만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운 마현의 눈빛을 보고 최대한 진중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이윽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 사내가 골목길 중앙으로 툭 떨어졌다. 그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사내는 당황한 기색으로 골목길 여기저기를 살폈다.
‘응?’
가릉은 놀란 눈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분명 골목길에는 그 사내와 마현, 그리고 자신이 서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벽에 붙어 있는 자신과 마현을 알아차릴 법도 한데 사내는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가릉이 이상함을 느낄 때 사내는 마현과 가릉이 서 있는 바로 앞까지 걸어와 몸을 낮춘 후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살폈다.
마현은 그 순간 손을 뻗어 사내의 목을 움켜잡았다.
“컥!”
사내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동시에 마현의 목소리도 들렸다.
“사운드 아이설레이션(Sound isolation)!”
마현은 주위의 음파를 차단하며 투명화 마법을 풀었다.
“헉!”
목이 잡힌 채 벽에 부딪힌 사내는 갑자기 나타난 마현과 가릉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누구냐?”
“이익!”
이미 틀렸음을 깨달은 사내는 입을 크게 벌렸다.
‘독단?’
그 즉시 마현은 사내의 몸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홀드!”
그러자 사내는 벌렸던 입을 다물지 못하고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저 경악한 얼굴로 눈을 부릅뜬 채 부들부들 떨뿐이었다. 마현은 차가운 눈빛을 띠며 사내의 입 속에 손을 넣어 자그만 독단을 찾아 꺼내 들었다.
“누구냐?”
마현은 다시 한 번 물으며 사내의 몸 일부, 목소리만 홀드 마법에서 풀어주었다.
“으으으으!”
그러자 갑자기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굴이 붉어지며 핏줄이 돋아났다.
“주, 주군. 금제가…….”
다급한 가릉의 목소리가 터졌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푸학!”
사내는 피를 토하는 것과 동시에 목이 아래로 꺾였다.
“이런 지독한…….”
가릉 역시 마현이 사내의 입에서 독단을 꺼내는 것을 보고 잠시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몰라도 금제를 이중으로 걸어놓았던 것이다.
“분명 세 공자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마현은 사내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교주님의 명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이런 자를 키우다니…….”
가릉은 노기가 치밀어 올랐는지 주름진 얼굴을 부르르 떨었다.
“그나저나 이자가 죽어 너무 아쉽습니다. 잡아서 배후를 캤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가릉의 목소리에는 분함이 담겨 있었다.
“죽은 자 역시 내 의지를 거스르지는 못하지.”
마현의 얼굴에는 차가운 조소가 담겨 있었다. 마치 금제를 가한 자를 비웃는 것처럼.
“혼백이 떠나기까지는 사십구 일이 걸리지.”
“……?”
가릉이 마현을 쳐다봤다.
마현은 마법으로 골목길 한쪽에 구덩이를 판 후 시체를 넣고 다시 구덩이를 메웠다. 마현 역시 당장 이자의 혼백을 불러 누가 사주한 것인지 알고 싶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사십구 일이라는 시간이 있지 않은가.
“많이 지체되었군.”
“주, 주군.”
“어차피 잘 되었어. 오늘 새벽 혼백을 부르는 것을 내 몸소 보여주지. 자네가 못 다한 강시술을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마현은 가릉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골목길 밖으로 나갔다.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본인이 겪고도 믿지 못할 일들에 가릉은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더욱이 마현이 오늘 새벽 혼백을 부르는 소환술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 말이 가릉의 정신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가릉!”
“예, 예! 주군!”
이미 골목길을 빠져나가 저만치에서 들리는 마현의 목소리에 가릉은 정신을 차리며 발걸음을 빨리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