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18화
허진의 개인 연무장 한구석 돌로 만들어진 탁자 위에 빛 한 덩이가 둥실 떠 있었다.
마현과 허진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허진은 연무장 중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연무장 중앙 위에도 빛 한 덩이가 떠 있었다. 그 빛덩이 아래 모습을 드러낸 연무장은 마치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룬 것처럼 폐허가 되어 있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략 제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보여드렸습니다.”
허진은 연무장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은 마현에게로 이어지지 않고 머리 위에 떠 있는 밝은 빛으로 향했다. 잠시 그 빛을 본 후 허진의 눈은 다시 마현을 향했다.
“……정말 말이 안 나오는구나.”
허진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말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제는 말해 줄 때가 되지 않았느냐?”
허진은 마현의 눈을 직시했다.
마현은 그런 허진의 눈을 마주보다 천천히 입을 뗐다.
“제자의 본 이름은 카칸……, 태어난 곳은 하르센 대륙…….”
마현은 허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비교적 담담하게 자신의 과거를 말했다. 그 음성이 너무나도 무미건조해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마현의 이야기가 진행될 때마다 허진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마현의 이야기는 장장 반 시진 가까이 이어졌다.
허진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잠시 멍하니 마현을 쳐다보다 무거운 숨을 길게 내쉬었다.
“휴우……, 기구한 인생이구나.”
허진은 목이 탔던지 습관적으로 탁자 위로 손을 올렸지만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무안했던지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면서 침을 삼켰다.
“그래서 네가 나의 제자가 되지 않으려 했던 것이냐?”
그나마 갈증이 가셨는지 허진은 측은한 목소리로 마현에게 물었다.
“이렇게 나에게 마음을 열어 줘서 고맙구나. 말을 꺼내기 힘이 들었을 텐데.”
허진은 담담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마현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허허, 그나저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제자라…….”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는 열일곱 소년이었지만 전생의 기억까지 더하면 자신의 나이를 훌쩍 올라선다.
“그래도 제가 스승님의 제자인 것은 변함없습니다.”
“현아.”
허진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마현의 이름을 불렀다.
“이 스승과 술 한잔 나누지 않겠느냐? 오늘은 너와 술 한잔 나누고 싶구나.”
“스승님.”
“오늘은 모든 것을 잊고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보자구나.”
허진은 마현의 팔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주는 이 스승이 살아온 날들이다.”
마현은 허진의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 *
허진은 마현 앞으로 두툼한 책자 한 권을 내밀었다.
“앞으로 네가 익힐 이 스승의 독문무공서이다.”
마현은 그 책자에 적힌 제목을 보았다.
‘마라공(魔羅功)?’
마현은 눈을 빛내며 장을 넘겼다.
“마라역천공에 기반을 둔 무공들이다.”
허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략 내용을 살폈다.
“너의 가장 큰 취약점은 방어다.”
그 말에 마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마라공을 모두 익혀야겠지만 그중에 중점적으로 익혀야 할 것은 보법이다. 더불어 수(手), 장(掌), 권(拳), 그리고 각(脚)법 역시 몇 수 익혀야 한다.”
허진은 무공서를 천천히 살펴보는 마현을 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네가 보여준 호신강기와 비슷한…… 방어막…….”
허진은 실드를 발음할 수 없어 말을 살짝 돌려 설명을 이어갔다.
“방어막의 경우 생각 이상으로 방어력은 좋으나 그 역시 펼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어지간한 무림인들이야 상관없겠지만 고수들은 다르다. 몇 수 손을 섞어 보면 그 빈틈을 충분히 파고들 여지가 크다. 하여 이 스승은 네게 내 모든 독문무공을 가르칠 생각이다.”
마지막 말은 조금 이상해 마현은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네가 마법사로서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한다. 하지만 여기는 네가 태어난 곳이 아닌 무림이다. 이곳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진 힘의 3할을 숨기라는 말이 있다.”
“……?”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이어졌다.
“남들에게는 이 스승의 무공이 7할이오, 너의 마법을 3할로 만들어라. 하지만 너는 마법을 7할, 이 스승의 무공을 3할로 익히거라. 네가 평생 익혀온 마법을 버리지 마라. 이 스승의 무공으로 마법이 가지지 못한 부족함을 채우거라. 지금부터 이 스승의 무공을 익히되 무공은 어디까지나 보조일 뿐이다.”
“스, 스승님.”
“이 스승은 네가 완성된 길을 걷는 것이 보고 싶구나.”
“……스승님.”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허진은 마현의 눈빛에 슬그머니 웃음을 보였다.
“오늘부터 내 독문무공을 모두 전수받거라.”
허진은 웃음을 지우며 진중한 눈빛으로 마현을 쳐다봤다.
“너는 이 스승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내 제자다.”
허진의 얼굴에서 사라졌던 은은한 미소가 다시 피어올랐다.
“스승님…….”
“그렇게 자꾸 부를 필요 없다. 이 스승 어디 안 간다.”
허진은 가벼운 농으로 마현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무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입마관에서의 수업이 전부입니다.”
“그나마 입마관 생활도 엉망이었지?”
마현은 얼굴을 붉혔다.
“처음부터 가르쳐야겠군. 무공에 관한 것은 내가 가르치겠지만 그밖에 잡다한 것들을 가르치기 위해 내 따로 사람을 불렀다.”
“예?”
허진이 자신을 가르칠 사람을 따로 불렀다 하니 마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공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래서 너에게 무공 이외의 것을 가르칠 사람을 부른 것이다.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니 성심을 다해 배우거라.”
“알겠습니다.”
허진이 누구를 불렀는지, 또 그가 무엇을 가르칠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분명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마현은 지금 당장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지만 허진이 자신에게 베푸는 정성을 느꼈기에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올 때가 되었는데…….”
허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녀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가 당주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안으로 모시거라.”
‘가 당주?’
시녀의 말에 마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내 마의당 당주 가릉이 안으로 들어왔다.
“부교주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가릉은 허진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가 당주, 내 부탁을 넣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승낙해 줄지는 몰랐소.”
비록 허진이 부교주이나 가릉에게 존대를 하는 것은 그의 스승과 가릉 사이에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옵니다.”
“여기는 내 제자 현이라 하오.”
허진의 말에 가릉이 몸을 돌렸지만 마현에게 바로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눈치를 살짝 살폈다.
“설마 스승님이 가 당주를 부른 줄 몰랐습니다.”
“음……?”
분명 초면일 텐데 가릉을 대하는 마현의 목소리에 제법 친근함이 느껴졌다.
“이야기가 좀 편해지겠습니다.”
마현은 가릉에게 손짓을 하며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자네도 앉으라.”
“예, 주군.”
마현의 말에 가릉은 허진을 대할 때보다 더욱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후 비어 있는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주군?’
허진은 눈을 크게 뜨며 가릉과 마현을 쳐다봤다.
가릉이 누구인가?
마교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한 이를 뽑으라면 누구라도 그의 이름을 거론할 것이다.
더불어 괴팍하기로 소문이 자자해 누구와 쉽게 어울리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 가릉에게 마현은 편히 하대를 했고, 가릉은 ‘주군’이라 부르며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허진은 마현과 가릉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라고 눈으로 채근했다.
“이렇게 부교주님께 인사를 드릴 줄은 이 늙은이도 몰랐습니다.”
가릉은 자글자글한 웃음을 보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떻게 된 것이오?”
허진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허허허.”
그 물음에 가릉은 그저 웃음만 보일 뿐이었다.
대답하려고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렇게 되면 강시, 즉 데스나이트의 존재를 언급해야 했다.
그렇기에 가릉은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그 사실을 밝혀야 한다면 그건 자신이 아닌 마현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드리겠습니다.”
마현이 가릉 대신 대답했다.
허진은 마현과 가릉 사이에 무언가 비밀이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아니 몰라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가릉이 마현의 가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가릉이 가진 무공은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그가 마교에서 쌓아올린 인망은 가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전에…….”
마현은 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스승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부탁?”
허진은 마현이 내미는 종이를 받아들고는 펼쳤다.
종이에 적힌 글을 읽는 허진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마현과 가릉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내 자세한 것은 모르나…… 내 짐작이 맞다면…….”
허진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가 당주, 참 많이 변했구려.”
허진은 주름이 가득한 가릉을 쳐다봤다.
“이제 말씀을 낮추십시오. 이제는 제 주군의 스승님이십니다.”
가릉은 몸을 낮추었다.
“주군을 모시니 모든 게 바뀌게 되더군요.”
“흠…….”
허진은 무거운 음성을 토해내며 가릉을 쳐다보다 마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디에 쓰려고 이걸 준비하려 하느냐?”
“흑풍대를 만들 생각입니다.”
허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환단이 아니라 마심단이라…….”
허진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마환단이면 모를까 마심단은 교주님의 윤허가 있어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흑풍대에 대해 생각해 둔 것이 있느냐?”
“세세한 밑그림은 아직 그리지 않았지만 대략적인 것은 이미 생각해 두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닌 마심단이다. 자칫 그들의 입에서 마심단의 존재가 외부로 유출된다면 너는 상당한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본교에서 누구의 손때도 묻지 않은 이들을 뽑을 생각입니다. 그렇기에 마심단이 필요합니다.”
세세한 사항을 듣지 않았지만 허진은 마현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본교에서 손때가 묻지 않은 이들은 오로지 하급무사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큰 힘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충성심이 강한 손발이 될 것입니다.”
“흠…….”
허진은 나직한 침음성을 흘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았다, 내 신중하게 한 번 생각을 해보겠다.”
허진은 그 종이를 품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