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15화
“어떤가?”
마현은 그런 흑도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세 흑사신을 쳐다보며 상태를 물어보았다.
“고맙다.”
흑권은 상당히 만족한 듯한 목소리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주 마음에 든다.”
흑검은 살짝 웃음을 보였다.
“…….”
흑창은 비록 말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여 만족스러움을 표현했다.
마현은 흑도에게도 물어보려 고개를 돌렸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만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봐, 주인.”
흑도가 마현을 불렀다.
다른 세 흑사신은 마현에게 별다른 호칭을 쓰지 않았지만 흑도는 언제가부터 주인이라는 호칭을 썼다.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그런지 그냥 이 상황을 편하게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말까지 높인 것은 아니었다.
“크크크크.”
흑도는 세 흑사신을 흘겨보며 기분 나쁠 정도로 음산하게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왜?”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 마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약속 지켜야지.”
“약속?”
그 뜬금없는 말에 마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강한지 붙게 해준다고 했지?”
흑도는 도신(刀身)의 배(背)를 혀로 날름 핥았다.
그 모습에 마현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하려고 했다. 나 역시 너희들의 정확한 실력을 알고 싶으니까.”
“크흐흐흐흐.”
흑도는 다시 세 흑사신을 쳐다보며 더욱 음산하게 웃음을 내뱉었다.
“이왕이면 이 싸움을 서열 쟁탈전으로 하지. 크크크크. 이긴 놈은 장(長), 지는 놈은 졸(卒).”
흑도는 자신감 넘치는 눈동자로 세 흑사신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왜 겁나냐?”
목소리에 살짝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
“어차피 내 수신호위들이니 다른 건 몰라도 수장 자리는 있는 게 편하겠지.”
지금 흑도의 모습이 탐탁지 않았지만 이들의 서열은 필요할 듯 싶었다.
“기대하라고, 내가 수장이 되면 너희 셋은 아주 죽었어, 크크크크.”
“보자보자 하니 그 끝을 모르는구나! 오냐, 본좌가 너를 상대해 주마.”
흑검이 싸늘하게 흑도를 노려보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려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언젠가는 부딪혀야 할 터. 본좌가 먼저 하겠네.”
흑권이 흑검을 제치며 앞으로 나섰다.
흑검은 흑도를 잠시 노려보다가 흑권에게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뜻대로 하십시오.”
흑검은 흑도와 달리 흑권에게 아주 깍듯했다.
“고맙네, 양보를 하기 어려웠을 텐데…….”
“아닙니다, 어차피 다들 한 번씩 손을 나눌 테니 조금 뒤로 늦어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흑검은 그리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흑권은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려 흑창을 쳐다봤다. 흑창은 아무 말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여 자신은 상관없음을 알렸다.
“고맙네.”
흑권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흑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노인장부터 하시려고?”
흑도는 도를 위아래로 휙휙 내리그으며 어깨를 풀었다.
“젊은 친구가 말이 너무 험하네.”
“본좌도 백 살 넘게 살다 죽었어, 왜 이래?”
빈정이라도 상한 듯 흑도가 험악하게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주먹 아니면 말이 통하지 않을 친구군.”
“어차피 본좌도 그 말을 기다렸다고, 크크크.”
흑도는 도를 들어 기수식을 취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에 맞춰 흑권 역시 주먹을 말아 쥐며 자세를 잡았다.
후우우웅―
둘에게서 뿜어져 나온 사기들로 인해 지하 연무실은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찼다.
“이제 진정한 강자가 누구인지 가려 보자.”
먼저 움직인 자는 흑도였다.
섬광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흑권에게 다가서며 도를 휘둘렀다.
쐐애애액!
흑권은 사방을 조여오는 도의 그림자 속에 주먹을 내밀었다.
깡!
마치 쇠와 쇠가 부딪힌 것 같은 타격음이 들렸다.
어느새 둘은 일 장 가량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이제 제대로 시작해 볼까?”
흑도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도를 옆으로 내밀었다.
후우우우웅.
묵직한 도가 파르르 떨리며 울음을 토해냈다.
동시에 흑도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사기가 도로 모아져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흑도의 도에서 피어난 강기, 도강을 보자 마현의 눈동자가 급격히 커졌다.
분명 사공찬의 검강과 같은 오러 블레이드였다.
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분명 달랐다.
오러 블레이드면 다 같은 오러 블레이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후우우웅.
흑권의 손에서 울리는 고막을 찢을 듯한 공명음.
그것을 시작으로 흑권에 손에 권강이 맺혔다.
‘어, 어떻게 인간의 몸에…….’
사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데스나이트였다.
하지만 마현이 그런 생각을 한 까닭은 지금 흑권과 흑도가 보이는 능력이 그들이 살아생전 펼쳤던 능력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탓이다.
두 그림자가 한순간 마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어 들려온 굉음.
콰아앙!
그리고 길게 울려 퍼지는 파열음.
한 번의 울림 같았지만 그것이 아님을 마현은 느꼈다.
마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흑권과 흑도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까닭이다.
‘이, 이게…… 이 세계 인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무공이란 말인가?’
안력을 수련하지 않은 마현의 눈은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간간히 보이는 흐릿한 그들의 잔형과 지하 연무실 곳곳에서 퍼지는 굉음, 폭발하는 사기만이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펑!
마현 가까이에서 흑권의 사기와 흑도의 사기가 터졌다.
폭발의 여파로 그 파장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마현의 몸을 덮쳤다.
마현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시, 실드!”
마현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삼키며 실드를 쳐 몸을 보호했다.
콰과광!
고막을 찢어 버릴 것만 같은 굉음이 터졌다.
우르르르.
힘의 여파 때문일까. 지하 연무실은 무너질 듯 바르르 떨며 자욱한 먼지와 돌가루를 토해냈다.
한순간 부딪힘으로 지하 연무실을 가득 채웠던 사기가 사라지자 중앙에 거리를 두고 흑권과 흑도가 마주보고 있었다.
흑도의 도는 흑권의 목을 살짝 벤 후 지나가 있었고, 반면 흑권은 흑도의 품에 안기듯 파고들어가 있었다. 그런 그의 주먹이 흑도의 가슴에 맞닿아 있었다.
“젠장!”
거칠게 푸념을 내뱉으며 흑도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겸연쩍은 얼굴로 도를 거두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됐어! 다른 놈들은 몰라도 흑권 선배 위에 선다는 게 사실 조금 찝찝했으니까. 흑권 선배, 아니 흑권 수장. 앞으로 잘 부탁하오.”
흑도는 금세 흑권에 대한 태도를 싹 바꾸었다.
“허어, 참.”
흑권은 그런 단순한 흑도를 보며 그저 헛웃음만 내뱉을 뿐이었다.
“크크크, 그럼 2인자 자리에 앉아 볼까?”
흑도는 흑권에게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야! 흑검, 너부터 나와!”
흑도는 도를 까딱거리며 흑검을 가리켰다.
“오늘 네놈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놓겠다.”
흑검은 검을 억세게 틀어잡으며 흑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버르장머리 좋아하시네. 안 그래도 네놈의 그 건방진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어. 오늘 그 건방진 눈빛을 영원히 지워주지.”
흑도는 고개를 돌려 마현을 쳐다봤다.
“시작한다. 엥?”
흑도는 마현의 멍한 표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마현의 대답이 없자 흑도는 아무런 고민 없이 흑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작하라는 뜻이겠지.”
흑도는 도를 움켜잡자마자 신형을 띄웠다. 동시에 흑검 역시 검을 들어 흑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몸마저 움찔하게 만드는 파장에 마현은 정신을 차렸다.
검과 도가 부딪히며 내지르는 파열음과 동시에 강렬한 폭발의 여파가 몸으로 느껴졌지만, 역시나 흑검과 흑도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짙은 패배감이 밀려왔다.
‘우물 안에 개구리라는 소리가 나를 두고 한 말이구나.’
마현은 윗니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내 새하얀 윗니는 입술에서 배어나온 피로 인해 빨갛게 물들어갔다.
7서클이면 이 세상 어느 검사와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7서클이 되어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지금 마현의 눈에 보이는 흑사신의 무위는 충격을 넘어 경악에 가까웠다.
쾅!
“으아악! 이건 말도 안 돼! 말이 안 돼!”
검과 도가 만들어낸 파동과 흑도의 절규가 지하 연무실을 가득 채웠지만 마현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다른 세상의 일인 것처럼,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인 것처럼 보였다.
쾅, 쾅, 쾅, 콰과광―!
다시 파열음이 들리는 것을 보니 흑도와 흑창이 싸우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훗, 흑도 네가 서열 꼴찌다.”
좀처럼 듣기 힘든 흑창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악! 이건 무효야, 무효. 그래, 으흐흐흐흐.”
흑도는 미친 사람처럼 흐느끼더니 곧 시퍼런 안광을 내뿜으며 조용히 구석에 서 있는 가릉에게 달려들었다.
“가릉, 이놈! 솔직히 말해. 내 몸 대충 만들었지? 그렇지 않다면 왜 내가 저런 놈들에게 전부 하나같이 반 수 차이로 지냐고!”
흑도는 가릉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컥컥.”
가릉은 입을 쩍 벌리고 힘겹게 숨을 토해냈다.
“시끄럽다. 다들 물러가.”
그때 마현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렸다.
푹, 푹, 푹―
동시에 흑사신들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무효야, 무효……, 흡!”
흑도는 끝내 절규를 하며 어둠으로 돌아갔다.
“가릉, 그대도 가라. 홀로 있고 싶다.”
마현은 벽을 등받이 삼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하, 하하하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그것은 결코 즐거운 웃음이 아니었다.
아직 싸워 보지도 않은 상대에게……, 그것도 수하들의 싸움을 보고 지독한 패배감에 휩싸인 마현은 그저 허망한 소리만 토해낼 뿐이었다.
* * *
마현은 지하 연무실 중앙에 누워 라이트 마법으로 만들어진 빛을 쳐다봤다.
얼마나 그렇게 누워 있었을까.
하루?
이틀?
어쩌면 그 이상의 날이 지나갔을 수도 있다.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낸 탓일까. 시간이 흐르자 머리가 멍할 정도의 강한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마현은 미러 이미지 마법으로 허공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켰다.
“꼴좋다!”
마현은 마치 천장에 찰싹 달라붙은 것 같은 자신의 허상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그러자 천장에 붙어 있는 허상이 마현을 향해 똑같이 비웃었다.
“그만한 일에 충격을 받다니, 너답지 않아.”
마치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러면서 자신에게 말하는 또 다른 자신을 보며 마현은 눈을 감았다.
짝 짝 짝.
마현은 눈을 번쩍 뜨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세차게 몇 번 때렸다.
“으차!”
마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천장에 달라붙어 있던 허상이 바닥으로 뛰어내려와 마현 앞에 섰다.
마현은 그 허상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지금이라도 무공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마현은 똑같이 자신에게 말을 퍼붓는 또 다른 자신을 보자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러자 허상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어느 정도 마음을 다스린 마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일단 직접 이 세상의 무공을 견식해 봐야겠지?’
마현은 마기를 끌어올리며 흑사신들을 소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