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12화
“미안하네, 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허리를 살짝 숙였다.
“아닙니다.”
이유야 어쨌든 굳이 그와 부딪혀 골치 아픈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담담하게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모두들 아직 안 온 모양이군. 일단 앉지.”
마현은 추도영과 함께 접객실 중앙에 위치한 원탁으로 가 마주보고 앉았다.
“늦었습니다.”
막 둘이 자리에 앉았을 때 딱딱한 목소리와 함께 사공찬이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사공찬의 왼쪽 뺨에 난 길고 선명한 흉터였다. 비록 상처는 치료했지만 그의 몸에 스며든 마기까지는 어쩌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공찬은 약간 절뚝거리며 걸어와 마현의 오른쪽 비어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설마 사제가 올 줄은 몰랐는걸.”
사공찬이 나타나자 추도영은 약간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공찬은 특별히 공적인 행사가 아닌 이상 이렇게 사적으로 추도영이나 도종극을 보지 않는다. 사공찬 스스로 그 둘을 언젠가는 밟고 올라서야 할 적으로만 볼 뿐 사형제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공찬이 쉽게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면도 있었지만 어떨 때는 드러내놓고 그 둘을 적대시하니 추도영과 도종극도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사형께 볼일이 있어 온 게 아닙니다.”
사공찬은 고개를 돌려 마현을 노려보았다.
“네놈에게 전할 말이 있어 이렇게 왔다.”
사공찬의 음성은 물론 노려보는 눈빛까지 어느 하나 살기를 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허어, 이사제. 아무리 부교주님의 제자 신분으로 공자 자리에 앉았다고 해도 그 역시 우리와 같은 공자다.”
추도영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추도영이 그렇게 말을 하거나 말거나 사공찬은 여전히 마현만을 차갑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반드시 너는 내 손으로 죽이겠다.”
“선전포고를 하는 것인가?”
마현이 우습다는 듯 입가를 실룩거렸다.
“선전포고?”
사공찬은 마현의 반문에 피식 웃으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착각을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군. 나는 네놈이 대사형이나 삼사제의 손에 죽기 전에 내 손으로 죽인다고 말하려 왔을 뿐이야. 받은 것이 있으니 돌려줘야 하지 않겠나?”
사공찬은 뺨에 난 흉터를 매만졌다.
“알았나, 삼사제?”
사공찬의 물음과 동시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있나요? 나에게 삼사제라고 꼬박꼬박 불러주시고.”
어느새 도종극이 걸어와 비어 있는 마지막 의자에 앉았다.
“알았냐고 물었다!”
“거 참!”
도종극은 어깨를 들썩이며 팔을 들어올렸다가 팔짱을 꼈다.
“확실히만 해주신다면야, 낄낄낄.”
도종극은 눈을 아래로 내려 마현을 음침하게 쳐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어허, 다들 그만 하여라.”
추도영의 말에 사공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반드시 내 손에 죽어야 하니 내 한 가지 더 알려주지. 대사형을 가장 조심해라. 가끔 보이는 저 웃는 얼굴 뒤에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으니까.”
사공찬은 메마른 웃음을 보인 후 방을 나가 버렸다.
“낄낄낄, 확실히 이사형이 끼면 항상 재미있어 진다니까.”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도종극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미친 사람처럼 웃어재꼈다.
마현은 냉정한 눈빛으로 추도영과 도종극을 쳐다봤다.
“이거 자리가 엉망이 되어 버렸군, 미안하네.”
추도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마현에게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음식을 먹을 분위기가 아니니 가볍게 차 한잔 하겠나?”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마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추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다기를 내왔다.
추도영은 깨끗한 물을 탕관(湯罐)을 이용해 데운 후 찻주전자로 옮겨 차를 우려냈다.
시녀에게 시켜도 되는 일을 추도영은 직접 정성스럽게 차를 우려 마현과 도종극 앞에 놓인 찻잔에 손수 따라주었다.
“마시게. 맛이 나쁘지 않을 거야.”
마현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차향이 코와 입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다지 차를 즐기지 않는 마현이었지만 확실히 차가 좋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낄낄낄.”
도종극은 차를 마시며 뭐가 그리 재미가 있는지 연신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맛이 좋지?”
“……?”
뜬금없는 도종극의 말에 마현은 찻잔을 내리며 그를 쳐다봤다.
“독이 든 차일수록 달콤한 법이지.”
마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차에 독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도종극이 그러든가 말든가 추도영은 상관하지 않고 마현을 직시하며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말일세.”
추도영 역시 찻잔을 내리며 마현을 부드럽게 쳐다봤다.
“사공자, 자네가 그냥 공자 자리로만 만족했으면 한다네.”
“…….”
마현은 그 말에 도종극에게서 시선을 돌려 추도영을 쳐다봤다.
“부교주님의 제자이니 부교주 자리에만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네.”
“크크크, 독차는 달콤하다고 했지?”
도종극은 마현을 쳐다보며 턱을 괴었다.
“나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참으로 듣는 이가 편하다 느낄 정도로 목소리가 아주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의 눈빛을 본다면 그건 단지 목소리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의 자식과 하인의 자식이 동등한 자리에 앉는다는 게 우습지 않나?”
마현의 눈동자는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제아무리 주인이 하인의 자식을 어여삐 봐준다고 해서 하인의 자식이 주인집 재산마저 탐을 내서야 되겠는가?”
추도영은 비유적으로 말을 돌리는 듯 했지만 그 말 속에는 가시보다 더 큰 시퍼런 칼날이 숨어 있었다.
“그러니까, 제 스승님이 하인이고 제가 그 하인의 제자란 말씀이군요.”
“자네는 보기와는 달리 귀가 아주 밝군.”
추도영은 여전히 담담하게 웃으면서 차를 들어 입술을 축였다.
마현은 추도영의 말에 울컥 노기가 치솟았다.
자신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도 참지 못했지만 그 무엇보다 스승인 허진을 하인이라고 빗대어 하는 말을 듣는 순간 그 울컥함이 더욱 강해졌다.
“주인집 자식은 주인의 재산을 물려받고, 하인의 자식은 대를 이어 하인이 되는 게 순리가 아니겠나? 그냥 부교주의 자리를 이어받아 부교주가 되게. 어설프게 욕심을 내지 말고.”
“크크크.”
찻잔을 잡은 마현의 손등에 힘줄이 불룩 솟아올랐다.
“독차가 아주 맛있군요.”
마현은 도종극의 말을 빗대어 말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본인의 경고는 한 번뿐이네.”
“그 경고 뒤엔?”
“죽음.”
“훗.”
마현은 추도영의 대답에 옅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차갑게 식은 찻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잘 마셨습니다.”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대답은 하지 않아도 되네. 그냥 사공자 자리에서 조용히 부교주님의 자리를 이어받게나. 나는 자네가 그리 아둔한 자라 보지 않으니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추도영의 마지막 말에 마현은 오히려 살기를 눈동자 깊숙이 갈무리하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마현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후 돌아서서 그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곤 웅천각을 벗어나기 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웅천각을 향한 두 눈에선 시퍼런 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 *
마현은 굳은 표정으로 부마전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허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굳어 있던 마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스승님의 바람이 아주 간절했던 모양입니다.’
마현은 몰랐지만 허진을 보며 짓는 웃음이 아주 환했다.
“뭐가 그리 좋아 그렇게 웃는 것이냐?”
허진 역시 오랜만에 마현의 웃음을 본 탓인지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스승님, 웅천각으로 가기 전에 드리려던 말씀을 마저 드리려 서둘러 왔습니다.”
마현의 말에 부드럽게 웃던 허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래 말해 보거라.”
마현이 무슨 말을 꺼낼지 대략 눈치를 챈 허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웅천각으로 갈 때 호랑이굴이니 조심하라고 하셨죠?”
느닷없이 웅천각 이야기를 꺼내자 허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랬다.”
막상 대답을 하던 허진의 표정이 조금 불쾌하게 바뀌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자신을 위해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이는 허진의 얼굴을 보자 마현은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의 희미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 세 마리의 호랑이를 잡고 싶어졌습니다.”
마현의 말에 허진의 눈동자가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푸하하하하!”
허진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은 아주 시원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가신 듯 유쾌하게 울려 퍼지는 허진의 웃음은 쉽사리 멈추지 않고 길게 이어졌다.
“잡고 싶으냐?”
웃음을 멈춘 허진은 기뻐하던 표정을 싹 지워 버리고 냉정한 눈빛으로 마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예.”
마현의 굳은 얼굴을 보며 허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만……”
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제자였지만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였다.
웅천각을 가기 전 마현의 눈빛으로 미뤄 짐작하건데 분명 소교주 자리에 관심이 없다고 말할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웅천각을 다녀온 후 달라졌다.
“제게 이빨을 드러내더군요.”
자세히는 몰라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략 짐작이 갔다.
“그게 네 마음이 변한 이유냐?”
마현은 허진의 질문에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웃었다.
“워낙 대단한 놈들이라 잡아서 스승님 방에 장식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내 방에? 푸하하하하!”
미처 생각지 못한 대답을 들어서일까. 이내 허진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래 너를 보지 않았지만 그 이빨을 봤다면 필시 바로 호랑이를 사냥하려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구나.”
허진은 제자가 되던 날 피에 절어 복수심에 불타던 마현의 눈빛을 떠올렸다.
“제자가 호랑이굴에서 호랑이를 잡을 바보는 아닙니다. 더욱이 호랑이를 잡는 사냥도구도 없을뿐더러 솔직히 한 마리라면 몰라도 세 마리는 벅찹니다.”
“…….”
“그래서 좀 더 시간을 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오냐! 그 사냥도구는 이 스승이 챙겨주겠다.”
허진은 마현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스승의 사령신위 넷 중 둘과 유령대 제2부대를 주마. 그만한 사냥도구도 없을 게다.”
파격적인 허진의 제안에 마현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특히 제2부대주 구영의 눈치를 보니 너를 싫어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그들이라면 너의 손발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마현의 약간 커진 눈동자가 밝게 웃었다. 하지만 대답은 그 웃음과 전혀 달랐다.
“싫습니다.”
마현은 냉정하게 그 제안을 거부했다.
“허어.”
허진은 마현의 대답이 기가 막힌 듯 가벼운 탄식을 터트렸다. 또한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제 사냥은 제가 준비하고 싶습니다. 다만…….”
“……?”
“사냥 준비가 끝날 때까지 스승님의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녀석.”
허진의 목소리는 왠지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현아, 아느냐?”
“……?”
“지금 네 말이 이 스승에게 처음으로 한 부탁인 것을…….”
복잡한 감정을 담은 눈동자와 달리 허진의 입가는 희미하지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