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10화
개벽권마는 마현의 말에 그저 나직한 침음성만 날렸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천검마와 무적창마 역시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비슷한 분위기를 보였다.
그러자 사라졌던 기광을 다시 뿜어내며 광풍도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황당하다는 듯 떨떠름한 목소리를 낸 광풍도마가 이내 악다구니를 썼다.
-너희들은 자존심도 없나? 뭐를 고민해! 가당치도 않은 능력으로 우리를 깨운 저놈을 죽여야지!
마현은 그런 광풍도마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정한 서열을 가리고 싶지 않나?”
광풍도마의 몸이 순간 움찔거렸다.
“나와 계약하는 순간 마음껏 싸울 수 있다. 그리하면 누가 진정한 강자인가를 확인할 수 있지.”
-크크크, 어린 애송이가 잘도 입을 나불대는구나. 본좌가 그런 얄팍한 수에 넘어갈 것 같으냐? 천하를 오시했던 본좌다. 그런 본좌가 너 같은 애송이를 섬길 것 같으냐?
광풍도마가 그때까지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검과 창을 옆으로 밀치며 마현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본좌는 어느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을 생각이 없다. 고로 너를 죽여 버리겠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를 죽여봐.”
마현은 턱을 살짝 들어 목을 완전히 드러냈다.
-네놈이 살고 싶어 해도 죽일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하지만 이건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나를 죽인다면 너는 평생 저 셋의 아래라는 것을.”
마현은 들어올린 턱으로 다른 세 데스나이트를 가리켰다. 살기를 내뿜은 채 도를 들던 광풍도마의 몸이 순간 딱 멈췄다.
-누가 가장 아래라는 것이냐!
“그거야 본인도 모르지. 하지만 세간의 평은 네 명의 마도 영웅 중 그대가 가장 아래다.”
마현은 보란 듯이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광풍도마를 쳐다보며 마현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나와 계약을 하면 누가 가장 서열이 위인지 확실히 정할 수 있다.”
광풍도마는 순간 마현과 나머지 세 데스나이트를 번갈아 쳐다보며 고민했다. 하지만 결정이 어려운 듯 쉽사리 대답을 하진 못했다.
-본좌는 그대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없다.
대답은 광풍도마가 아닌 개벽권마에게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도 솔직한 마음이지. 그래서 묻겠노라, 왜 우리를 깨웠느냐? 그리고 원하는 바가 무엇이냐?
마현은 광풍도마를 지나쳐 개벽권마에게로 걸어갔다.
“원래 처음엔 원하는 바가 있었지만 솔직히 지금은 없다.”
-…….
“하지만 굳이 찾는다면 나의 수신호위가 되라는 것이다.”
-그대는 광오하구나. 저들이 내 후대의 인물들이기에 자세히는 모르나 본좌의 이름에 필적한 생애를 살았던 자들이라고 들었다. 그런 이들을 수신호위로 삼는다라……?
“…….”
마현은 아무런 말없이 개벽권마를 쳐다봤다.
-거부한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것이고, 그대들은 다시 기약 없는 어둠 속에 잠들겠지.”
마현은 개벽권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대를 주군으로 모실 수 없기 때문이다.
“주군으로 받들 필요는 없다. 단지 나를 지켜주기만 하면 된다. 물론 계약상 주종 관계를 맺게 되겠지만.”
눈빛을 보니 갈등하는 듯하나 선뜻 대답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더불어 세상의 빛도 볼 수 있게 해주지. 그 모습으로 세상 밖으로 나갈 수는 없지 않나.”
개벽권마는 무심코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앙상한 뼈만이 삐거덕거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주종 관계는 후에 나를 인정한다면 그때 맺어도 된다. 물론 원치 않으면 안 해도 된다.”
-…….
개벽권마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현은 고개를 움직여 네 데스나이트에게 시선을 건넸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차피 다들 생각하고 있지 않나? 계약을 맺을 것인지, 아니면 나를 죽일 것인지.”
-……계약을 받아들이겠다.
심사숙고하던 개벽권마가 대답을 하자 마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돌렸다.
-다시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받아들이겠다.
파천검마와 무적창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크크크크.
그러자 광풍도마가 음산하게 웃었다.
-주종 관계가 아니라고 했으니 본좌 역시 좋다. 그리고…….
광풍도마가 해골을 돌려가며 나머지 데스나이트들을 쳐다봤다.
-진정한 서열을 가리자고.
모두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현의 눈이 반짝였다.
우우웅―
마현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사라졌던 마기를 담은 자그만 마법진이 다시 허공에 만들어졌다.
“그대들의 주인으로서 새로운 이름을 내리노라!”
네 개의 마법진이 사방으로 흩어져 각각 데스나이트들의 이마로 날아갔다.
“그대의 이름은 지금부터 흑권(黑拳)이다.”
후우우웅!
이마 앞에서 어두운 빛을 토해내던 마법진이 개벽권마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대의 이름은 흑검(黑劍)이다!”
“그대의 이름은 흑창(黑槍)이다!”
“그대의 이름은 흑도(黑刀)이다!”
차례대로 마법진이 데스나이트들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우우우우웅!
동시에 데스나이트들의 몸에서 마기가 뿜어 나왔다. 그 마기들이 서서히 머리 위로 모이더니, 어느 순간 이마 중앙에 새겨진 마법진으로 스며들었다.
마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마현은 계약의 충격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서서히 허물어져가는 데스나이트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나를 주군으로 모시지 않는다 해도 어둠의 마나로 주종관계가 성립되지. 너희들 생명의 근원은 바로 나! 고로 이 마현의 명을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마현의 미소는 더욱 차갑게 변했다.
-이, 이놈!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던 찰나 광풍도마, 아니, 조금 전 흑도라 이름 붙여진 그가 살기를 폭사시키며 마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쐐애애액!
하지만 시커먼 강기를 담은 그의 도는 마현의 목 바로 앞에서 뚝 멈췄다. 온몸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힘을 주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는 마현의 목을 베지 못했다.
-이익!
흑도는 도를 틀어 마현의 머리를 내리그었다.
하지만 이 역시 마현의 머리 바로 위에서 딱 멈췄다.
마현은 손을 뻗어 도를 아래로 내렸다.
“한 가지 더! 너희들은 나를 죽이지도 못하지. 그게 데스나이트의 맹약이니까! 크하하하하!”
마현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동시에 네 기의 데스나이트에게서 살기가 폭사되었다.
“피곤하니 다음에 이야기하지. 이제 쉬어라.”
마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데스나이트들의 신형이 바닥 으로 푹 꺼졌다.
* * *
가릉은 마현을 만난 이후 그의 방 지하에 만들어진 석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항상 지하석실을 가득 채운 퀴퀴한 약재 냄새도 사라진 지 오래고, 냄새를 피우며 부글부글 끊어 오르던 정체 모를 약물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 석실이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았던 불길마저 꺼져 있었다.
가릉은 단지 의자에 앉아 석실 한구석에 놓인 여섯 구의 시신만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인지 가릉은 식사마저 거르며 오로지 여섯 구의 시신만 내려다볼 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딸랑 딸랑 딸랑―
그때 석실로 통하는 문에서 자그만 방울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가릉은 흠칫했다.
마른침을 삼킨 후에도 한동안 여섯 구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가릉은 자리에서 일어나 굳게 닫힌 문으로 걸어갔다.
“누구냐?”
“사공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 밖에서 마의당 의원 하나가 마현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가릉은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젊은 의원과 그 뒤로 마현이 보였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의윈이 다시 계단을 올라가자 석실 문을 사이에 두고 가릉과 마현이 마주보고 서게 되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가릉은 전과 달리 공손하게 허리를 반쯤 숙이며 문에서 한 걸음 비켜섰다.
마현은 가릉을 지나쳐 그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섰다. 자연스레 안을 살피던 중 마현의 눈이 연구실 한구석에서 멈췄다.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여섯 구의 시신을 본 것이다.
마현은 가릉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흠…….”
마현은 허리를 숙여 여섯 구의 시신을 이리저리 살폈다. 눈으로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찔러 보기도 하고 마나를 주입해 보기도 했다.
“상당히 흥미롭군.”
한식경 정도 여섯 구의 시신을 나름대로 살펴본 마현은 허리를 펴며 가릉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들인가?”
“그렇습니다.”
마현은 시신들 옆에 놓인 의자로 걸어가 걸터앉았다.
“그래, 결정은 했나?”
“먼저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가릉의 말에 마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것이 좋겠지.”
마현의 오른손에서 순식간에 검은 마법진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졌다.
“소환, 흑사신(黑死神)!”
구르르르.
바닥이 들썩거리며 네 구의 해골이 튀어 올라오자 가릉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너 이 새끼……!
흑도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마현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와 도를 휘둘렀다.
“소용없음을 알 텐데…….”
무시무시한 속도와 힘으로 도를 내리그었지만 흑도는 역시나 마현의 몸에 그 어떤 상처도 만들 수 없었다.
-으으으…….
결국 분노가 치밀 대로 치밀어 올라 화를 억누르지 못한 흑도는 구석에 서 있는 가릉을 쳐다봤다.
-네놈이라도 죽여야겠다.
흑도는 가릉을 향해 순간 튀어나갔다.
쐐애애액!
도는 검은 궤적을 그리며 가릉의 목을 베어갔다.
“헉!”
가릉은 느닷없이 자신을 향해 도를 휘둘러오는 해골의 모습에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뒤로 물러났다.
“그만!”
그 순간 마현의 입에서 짧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턱!
그러자 흑도의 도뿐만 아니라 몸까지 마치 석상처럼 그대로 굳어 버렸다.
“조용히 서 있어.”
마현의 말에 흑도는 몸을 파르르 떨며 도를 내리고 반듯이 섰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네놈을 죽여 버리…….
“조용!”
마현이 짧게 다시 명령하자 흑도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하지만 흑도는 살기 어린 기광을 번뜩이며 턱관절을 여전히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그만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나?”
마현의 말에 흑도의 동공에서 더욱 귀기 어린 살기가 만들어졌다.
“나는 분명 너희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최대한의 자유를 주겠다는 약속도 지킬 것이다.”
흑도처럼 살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와 달리 흑권은 차분하게 입을 뗐다.
-하지만 우리들 중 누구도 너의 명을 반드시 따를 것이라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나는 거짓을 말한 적 없다. 아닌가?”
마현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흑사신 어느 누구도 바로 입을 떼지 않았다.
“이제 익숙해져라. 그게 편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해 주지. 너희들을 종처럼 막 부리지는 않겠다. 생전의 위명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겠다. 그럼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가?”
-…….
-…….
-…….
“나는 결코 정의롭지는 않지만 적어도 입 밖으로 꺼낸 약속은 지킨다.”
마현의 눈빛에 결국 세 흑사신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들에게 선택권은 없어졌으니까.
마현은 고개를 돌려 흑도를 쳐다봤다.
“대략 일이 마무리되면 흑도, 네가 원하는 대로 서열 싸움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 그럼 됐나?”
흑도 역시 좋든 싫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 편히 쉬어.”
마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도의 입에서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가릉.”
마현이 가릉을 불렀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현이 낯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가릉은 흑도를 보며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