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7화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곧 죽여주마, 사공찬.’
마현은 사공찬의 눈빛을 무시하며 그 옆으로 서 있는 두 사내를 주시했다.
조금 나이 든 쪽은 기골이 장대했고, 어린 쪽은 체구는 작았지만 단단해 보였다.
‘기골이 장대한 자는 대공자 추도영이겠고, 마지막에 서 있는 자는 삼공자 도종극이겠군.’
그들을 주시하고 있을 때 사공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마현은 고개를 돌렸다.
“내 저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이려 했지만 이미 사제지간을 맺은 후였다.”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말의 앞뒤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었지만 누구도 그걸 입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어느 누가 교주와 부교주 사이의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교주로서 입 밖으로 낸 말을 거둘 수는 없는 법.”
사공소는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마현이 비록 부교주의 제자이기는 하나, 또한 본좌의 네 번째 공자 위를 내린다.”
그 말에 대전에 모인 수뇌부들은 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뜨며 사공소를 올려다보았다.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입 밖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비록 전례가 없다고는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누구든 힘이 강하면 교주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이 마교이니, 마찬가지로 누구나 소교주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공자 자리에 앉힐 수가 있다. 하지만 이론상으로 단지 그럴 수 있다는 것뿐이지 사실 마교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
“단 부교주의 제자이니 본좌의 가르침은 없다.”
비록 큰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장내에 모인 수뇌부들은 웅성거렸다.
“본좌는 마현에게 흑풍마군(黑風魔君)이라는 별호를 내리며, 4명까지의 수신호위와 30명까지의 직속 무력단체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한다.”
마현이 놀랄 사이도 없을 정도로 사공소는 단숨에 모든 말을 꺼냈다. 그 말이 끝나고 나서야 마현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사공소를 올려다보다가 그 뜻을 이해하고 깜짝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경악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허진에게로 눈을 돌렸다.
허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흠…….’
마현은 나직한 침음성을 속으로 삼키고는 고개를 돌려 사공소를 올려다보았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마현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런 마현을 향해 유달리 차가운 눈빛을 보내는 세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 * *
마현은 부교주 허진의 제자가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교주 사공소의 제자로 공자 위에 올라 소교주 자리를 두고 다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특별히 어떤 조직에 얽매이는 게 싫은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조직에 몸을 담을 수도 있고, 이왕 조직에 몸을 담는다면 수장 자리에 앉고 싶은 것이 바로 마현이었다.
허나 마교는 아니다.
자신은 이곳에서 평생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다.
언젠가는, 무슨 대가를 치루더라도 다시 하르센 대륙으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대전회의가 끝나고 일단 먼저 나온 마현은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현 앞으로 대공자 추도영과 삼공자 도종극이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현은 적당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뭐 대충 알겠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를 하지. 본인은 추도영일세. 그리고 이쪽은 삼사제, 도종극이고.”
“반갑습니다.”
마현은 도종극을 향해 다시 한 번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공자 자리에 오른 것은 축하하지만 벌써부터 검을 뽑으면 쓰나?”
도종극은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목소리에 담긴 시퍼런 칼날이 느껴졌다. 마현은 도종극의 비틀린 입 언저리를 보며 겉으로는 웃었지만 눈빛은 차갑게 식었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도 사제, 그만하거라.”
차갑게 식어가는 분위기 사이로 추도영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원래는 오늘 사공자에 오른 자네를 축하할 겸 자리를 가지려 했지만 알다시피 사공 사제의 몸이 안 좋아 좀 더 뒤로 미뤘네. 며칠 후 내 기별을 넣으면 그때 오게.”
“알겠습니다, 대공자.”
제법 깍듯한 어투로 대답했지만, 추도영의 눈빛은 마현의 태도에서 도발을 읽은 듯싶었다.
“잠시 칼날은 넣어두라고, 하루쯤은 편히 안면을 익힌 후 뽑아도 늦지 않으니까.”
도종극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다시 추도영이 그런 도종극을 말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럼 며칠 후에 보지.”
추도영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과 목소리로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마현은 몸을 돌리는 도종극과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추도영을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숙였던 허리를 펴는 마현의 눈은 추도영과 도종극의 등에 닿아 있었다.
“흠…….”
마현은 뒷짐을 지며 나직하게 침음성을 흘렸다.
‘사공찬이 나에게 온 이유가 삼공자 때문이었군.’
자신을 향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 도종극을 잠시 보던 마현의 눈은 추도영에게 옮겨졌다. 담담한 표정과 그에 어울리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빛이 떠올랐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이었어.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일.’
소교주 자리에 올라갈 생각이 없는 마현은 사공찬과 달리 그 둘과 부딪힐 일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인사는 잘 나눴느냐?”
잠시 홀로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 마현 앞으로 허진이 다가왔다.
“아, 스승님.”
마현은 상념에서 벗어나 허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다지 호의적인 인사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허진은 마현과 나란히 서서 전각 사이로 멀어져 가는 추도영과 도종극을 쳐다봤다.
“그렇겠지.”
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현아.”
“……?”
“이 스승은 말이다.”
허진은 평소와 달리 말끝을 흐렸다.
“모든 것을 걸고 너를 교주 자리에 앉히고 싶다.”
마현은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허진을 쳐다봤다. 허진은 그런 마현의 눈을 직시했다.
“조금 걷지 않겠느냐?”
허진의 말에 따라 마현은 그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딱히 목적지를 정해 놓고 걷는 걸음이 아니었다.
“마교는 과거에도 그래 왔지만, 미래에도 가장 강한 자가 교주 자리에 앉는 것이 율법이다. 하지만 그건 마교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가 다 그러하다.”
어느새 둘은 아담한 연못이 있는 정자에 다다랐다. 허진은 잔잔한 연못을 내려다보며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구라도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마교이지만 아무나 힘을 얻을 수 없는 곳도 마교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선택받은 자만이 최고의 힘을 얻고, 그 힘으로 교주 자리에 앉는다. 그 자리가 바로…….”
허진은 연못에서 시선을 돌려 마현을 쳐다봤다.
“공자라는 자리다.”
“스승님.”
“너로 인해 처음으로 깨졌다. 교주님의 눈에 띄어 직속제자가 되는 것 외에는 수백 년의 마교 역사상 어느 누구도 공자 자리에 앉은 적이 없었다. 앉은 적이 없다고 하기보단 앉을 수 없었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런데 너는 그 자리에 앉았다.”
허진은 조용히 손을 뻗어 마현의 손을 잡았다.
“마주전에서 네가 공자 자리에 올라서는 순간 이제껏 가져보지 못한 욕심이 생기더구나. 이 스승은 이 스승의 스승님처럼, 그리고 그 위 스승님처럼 그저 부교주 자리에 안주하고 만족했다. 어차피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스스로 한계를 지어 버리면서.”
마현의 손을 잡은 허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교주의 제자가 반드시 본교를 이끌어간다는 율법은 이제 유명무실해졌다. 현아, 마교의 율법을 네가 바로 세워라. 마교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고 지켜지지 않았던 율법대로 교주의 제자가 아닌 네가, 소교주 자리에 오르고 교주 자리에 올라라.”
“……스승님.”
마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 스승은 기필코 너를 그 자리에 앉히겠다.”
허진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힘이 가득 차 있었다.
마현은 갈등으로 요동치는 눈빛을 감추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
“제가 어느 날 훌쩍 떠나야만 되는 날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상관이 있느냐? 힘 있는 자에게 그 자리를 물러주면 되는 것을…….”
허진은 무슨 그런 질문을 다하느냐는 표정으로 쉽게 대답했다가 어느 순간 얼굴을 굳혔다. 아직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마현에게 감추어진 비밀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마현 역시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그런 허진의 얼굴을 쳐다만 봤다.
* * *
“휴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마현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저 조용히 힘을 키워 하르센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일이 생길 것이고, 그러다 보면 피치 못할 여러 관계가 만들어질 것이라 짐작했지만 오늘 일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소교주와 교주 자리라…….’
마현은 허진의 눈빛을 보는 순간 거절하지 못했다. 본심대로 응당 거절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다.
“하아…….”
마현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깊은 숨을 터트렸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을 때의 허진의 씁쓸한 눈빛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허진의 인간적인 눈빛을 대할 때마다 마현은 당혹감과 포근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 복잡한 감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현은 심란해져 침상으로 걸어가 누웠다.
막 누워 복잡해진 머리를 비우려 할 때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무슨 일이냐?”
마현은 누운 채로 물었다.
“마의당 가릉 당주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마의당 당주?”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문 아닌 반문을 했다.
마의당이 마교의 의당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당주 가릉이 느닷없이 찾아왔다는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으로 모셔라.”
마현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자 방문이 열리고 어린 시녀 하나와 가릉이 안으로 들어왔다.
자그만 체구에 자글자글한 주름.
하지만 눈빛은 매섭게 살아 있었다.
그런 눈빛 때문이었을까. 가릉의 체구가 그리 작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가서 차를 내오거라.”
마현은 시녀에게 명을 내리고는 가릉을 방 한쪽에 마련된 다탁으로 안내했다.
“사공자이신가?”
서열상 분명 가릉이 마현의 아래일 텐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가릉은 허리를 딱 편 채 눈동자만 위아래로 움직여 마현의 몸을 훑었다.
“뭐, 이 늙은이가 느닷없이 찾아와 미안하네.”
가릉은 마현에게 그다지 예의를 차리지 않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풍문으로 가릉이 상당히 괴팍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과연 그런 듯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마현은 가릉 앞에 앉았다.
“끌끌끌, 젊어서 그런 것인가? 아님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인가?”
가릉은 마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얼굴에 가득 패인 주름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웃는 것인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이었다.
“차가 왔군요.”
마현은 시녀가 가져온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래도 축하인사는 건네야겠지? 사공자 자리에 오른 것을 축하하네.”
가릉의 표정을 보니 그냥 빈말임을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마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는 가릉을 빤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