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13화
마차는 천천히 성도를 벗어나더니 이내 경주라도 하는 것처럼 바람을 거스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차에 난 창문으로 주위 풍경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응?’
편안히 앉아 내다보는 마차 창문 밖으로 육십 기의 인마가 마차 곁으로 다가왔다.
하얀 피풍의를 입고 잡티 하나 없는 백마를 탄 채 마차를 포위하듯 달려오는 육십의 인마는 가히 장관이었다.
마현은 눈동자만 돌려 허진을 쳐다보고는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그들이군.’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내 무당파 사람들과 대치를 하더니 이내 사라진 자들이었다.
‘호위 기사단 같은 자들인 모양인데……, 어쌔신의 분위기가 난다.’
마현이 유령대를 자세히 보고 내린 판단이었다.
그런 호기심도 잠깐, 마교 본산으로 가는 여정은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것뿐인데 그런 구경도 하루 이틀이지, 며칠째 이어지자 시들시들해졌다.
처음 허진이 함께 마차에 오를 때 여러모로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는 말 한 마디 붙이기는커녕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는 조금 귀찮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혹 생기기까지 했다.
마현은 너무 심심한 나머지 마나 수련이나 할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허진은 현재 자신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는 절대자였다. 미미한 마나 파동이라도 생긴다면 금방 알아차릴 것이 분명하다.
일단 마현 자신은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마현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은 이제 더 이상 마현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눈은 창밖으로 향해 있었지만 마현은 생각에 빠졌다.
이런저런 생각은 결국 마교로까지 이어졌고 어느 순간 마현은 자신이 마교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고 있는 것은 손정이 알려준 것인데 그것도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것이라 정확한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자신이 앞으로 몸담아야 할 조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눈을 감고 가시밭길을 걷는 거나 매한가지였다.
적어도 어떤 조직인지, 어떤 명령체계로 흘러가는지 자세한 것은 몰라도 대략적인 것은 알아야 한다.
아수라신과 만난다는 들뜬 마음에 마현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마현은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허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마현의 입장에서 마교에 관해 물어보기에는 허진보다 왕귀진이 더 편했지만 이상하게 왕귀진은 자신을 피했다. 그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허진의 눈치를 살펴 그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결국 지금 마교로 가기 전 유일하게 마교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이는 허진뿐이었다.
“부교주님.”
마현은 어쩔 수 없이 허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허진은 처음으로 책에서 시선을 떼고 마현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입은 열지 않았다.
그냥 마현만 쳐다볼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마현의 말에 허진은 책을 덮었다.
“너는 본좌에게 물어볼 것 말고는 말하고 싶은 게 없는 모양이군. 그래, 뭐가 궁금하지?”
차가운 목소리였다.
사천총타에 있을 때 부드러웠던 목소리는 이제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제가 마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아니꼬운 생각도 들었지만 몸을 숙일 수밖에 없었다.
허진은 현재 힘을 가진 강자였고, 자신은 힘이 없는 약자였다. 더욱이 좋든 싫든 본산에 도착하면 부교주라는 직책은 자신은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히 높은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상관이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알아야 할 것들만이라도 설명해 주십시오.”
그 질문에 허진은 다리를 꼬고 허리를 등받이에 파묻으며 마현을 쳐다봤다.
“너는 본좌를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군.”
마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허진의 몸에서 살기나 투기, 혹은 마기가 뿜어져 나온 것이 아니다.
말 한 마디로, 표정 하나로, 몸짓 하나로 마차 안의 공기를 차갑게 만든 것이다.
마현은 차갑게 빛나는 허진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런가? 그랬군.’
마현은 그때서야 어렴풋 알 수 있었다. 허진이 자신에게는 친절할 것이고, 어느 정도의 편의는 봐줄 것이라 착각했다는 것을.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다.
허진의 호의를 차 버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무림이라는 세계에서 천하를 양분하고 있는 마교의 2인자, 부교주가 자신에게 연연할 이유는 없었다. 찾고자 노력만한다면 자신보다 뛰어난 자를 찾아 제자로 맞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였다.
“죄송합니다.”
마현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입을 닫았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 지금이라도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이.”
허진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 얼굴에 여유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마교에 대해 알려주지. 더불어 일반 마인들은 접하지도 못하는 상승 무공도 배울 수 있어.”
마현은 허진의 말이 그냥 건성으로 내뱉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사천 총타주실에서의 제안보다 더 진지한 제안임을 느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건네는 제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허진을 바라보는 눈빛 또한 흔들렸다.
저 제안을 받아들이면 자신의 인생은 달라진다.
정말 편하게 과거의 힘을 찾을 수 있는 뒷배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도 더 빠르게.
그렇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거짓말처럼 딱 멈췄다.
‘젠장! 이 빌어먹을 여섯 늙은이들.’
하필 이럴 때 그 늙은 백마법사들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후우…….”
마현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번에는 거절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꺼낸 마현은 허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흠…….”
허진은 손으로 턱을 괴며 묘한 음성을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마차 안을 가득 채웠던 차가운 공기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입술은 다시 굳게 다물어졌지만 눈동자만은 마현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런가?”
허진은 조금은 허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턱을 짚은 손을 풀며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결국 그렇게 대화는 끝나고, 뒤이어 찾아온 적막감은 마교 본산에 도착하는 날까지 이어졌다.
* * *
황무지에 가까운 넓은 초원을 지나 거대한 태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산(天山).
십만 마교인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고향인 마교 본산이 위치한 곳이다.
마현이 비록 천하의 산들 중 으뜸이라 칭하는 오악(五嶽)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천산의 위용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떨어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차는 천산에 들어서자 잘 닦여진 길을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갔다.
과연 마차로 천산 중앙까지 이어질까 싶었지만, 그건 단순한 우려였다. 천산 중앙으로 이어지는 길은 어지간한 관도보다 훨씬 넓고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현이 놀란 것은 그 길이 아니었다.
길 옆으로 자그만 언덕이 올라오는 것 같더니 이내 깎아지른 듯한 가파른 절벽이 하늘을 향해 우뚝 치솟아 있었다.
만약 마교로 들어서는 길이 이 길 하나뿐이라면 천하의 요새였다.
제아무리 길이 넓다 해도 수천수만의 병력이 한꺼번에 쳐들어갈 수는 없다.
결국 방어에만 온 힘을 쏟는다면 십만의 대군이 쳐들어와도 끄떡없는 철옹성이었다.
그것 하나만으로 마현은 마교의 위용이 얼마나 큰 것인가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은 놀람의 시작이었다.
마차가 달려가는 길 끝에는 앞에 서기만 해도 주눅이 들 정도로 엄청난 위압감을 자랑하는 철문이 있었다. 기어서 올라가기도 힘든 가파른 절벽을 성벽 삼아 만들어진 철문은 높이만 해도 5장(五丈; 15미터)은 되어 보였다.
둥 둥 둥 둥 둥―
철문 위에서 북소리가 들리더니 육중한 철문이 기음을 터트리며 활짝 열렸다.
열리는 철문을 보니 두께만 해도 언뜻 봐도 3척(三尺; 90센티미터)은 넘어 보였다.
어지간한 공성무기로도 쉽게 무너트릴 수 없는 철옹성다운 철문이었다.
제때 활짝 열리는 철문 사이로 멈추지 않고 통과할 것만 같았던 마차는, 철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내려라.”
마현은 영문도 모른 채 허진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려서 보니 철문의 위용에 눌려 보지 못한 거대한 비석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살피니 힘찬 필체로 글이 새겨져 있는 부분만 비석처럼 매끈했다. 누군가 거대한 바위의 한 면을 다듬은 후 그 위에 글을 새긴 모양이었다.
천하제일인즉천마(天下第一人卽天魔).
‘천하제일인은 나 천마뿐이다?’
아주 광오한 글귀였다.
마현은 이 글귀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라 그렇게 생각했지만 천마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 글귀를 쓴 천마는 마교를 세운 천마가 아니었다.
무림 역사에는, 그리고 마교 역사에는 천마가 두 명이었다.
하나는 마교를 세운 초대 교주 천마였고, 또 하나는 황실의 탄압에 몰락해 가는 마교를 무림문파로 천하에 우뚝 세운 천마였다.
즉 마교에는 일대 천마와 이대 천마가 존재했지만 보통 천마라 하면 이대 천마를 일컫는 호칭이었다.
그 글귀는 천마가 홀연히 모습을 감추기 전 검으로 남긴 마지막 전언(傳言)이었다.
혹자는 은거에 들어갔다고 했고, 다른 이는 마선으로 우화했다는 등 여러 말이 있었지만 지금 이 글귀는 마교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그를 존경하는 뜻으로 그 비석을 천마등선비(天魔登仙碑)라 불렀고 마교로 입성하기 전 반드시 그 앞으로 가 예를 표하는 곳이 되었다.
흔히 소림사의 하마비(下馬碑), 무당파의 해검지(解劍地)와 더불어 무림 삼대 예지(禮地)로 통하고 있었다.
그런 천마등선비 앞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건 마교 교주밖에 없었다.
허진은 마현을 데리고 천마등선비 앞으로 다가가 크게 절을 올렸다. 그 모습에 마현 역시 얼떨결에 허진을 따라 절을 올렸다.
교인이라면 반드시 오체투지로 예를 갖추는 것이 율법이었고, 마교를 방문하는 이들은 오체투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허리를 숙여 자신을 낮춰야 했다.
몸을 숙이고 일어선 허진은 마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시종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허진을 따라 마차로 향하던 마현은 더는 마차에 오를 수 없었다.
“여기까지다.”
허진이 막은 것이다.
“감사했습니다.”
마현은 허진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허진은 그런 마현의 인사를 받지 않은 채 마차에 올라탔다.
“령유(靈幽).”
마차에 오른 허진이 누군가를 부르자 어느새 마차 앞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허진의 수신호위인 사령신위(四靈信委) 중 막내이자 유일한 여인이었다.
마현은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난 여인의 뒷모습에 깜짝 놀랐다.
나름 마나에 대한 기감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오는 내내 단 한 번도 그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수하인 그녀가 그 정도인데 허진은 어떨까 싶어 새삼스럽게 그를 쳐다봤다.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이 세상 검사들의 능력은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다.
“저 아이를 입마관(入魔關)까지 데려다 주도록.”
“명!”
짧고 절도 있게 대답한 령유는 몸을 돌려 마현을 내려다보았다.
유령대와 마찬가지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두 눈뿐이었다. 다만 목소리와 드러난 몸의 굴곡으로 여인임을 마현은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와.”
령유는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마현은 다시 한 번 허진에게 고개를 숙인 후 령유를 따라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허진을 태운 팔두마차는 마현과 령유를 지나쳐 달려 나갔다.
령유를 따라 작은 고개를 넘었을 때 마현의 눈은 화등잔처럼 크게 떠졌다.
그저 깊고 깊은 천산 속이라 여겼다.
그런데 마현의 눈앞에는 거대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사천성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엄청난 규모의 도시였다. 그 도시는 마치 분화구처럼 깍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 거대한 도시 중앙에 우뚝 선 성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