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12화
원래 사람이라는 존재는 마기를 접하면 본능적인 공포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더욱이 마현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일수록 본능에 충실하기 마련이었다.
헌데 마현은 공포에 떨지 않았다. 오히려 내뿜는 마기에 온몸을 내던지는 것도 모자라 아주 소량이지만 흡수까지 했다.
‘선천적으로 마기를 느끼고 흡수하는 체질이 있었던가?’
잠시 생각했지만, 허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아는 한 그런 특수체질은 없었다. 왜냐하면 마기라는 것이 선천적으로 인간이라면 거부하는 어둠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가 바로 허진의 눈앞에 있었다.
“그래서 무당파 제자 자리를 거부한 것이냐?”
“저는 원래 빛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빛과 어울릴 수 없다?”
“저는 어둠의 자식이니까요.”
허진은 마현의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크하하하하하!”
그리고 쩌렁쩌렁한 광소를 터트렸다.
“마교는 아수라신을 섬긴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수라신이 싸움과 전쟁의 신이라면 저를 마교로 데리고 가주십시오. 마교인이 되고 싶습니다.”
마현은 허진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며 고개를 들었다.
허진은 그런 마현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몸을 살폈다.
의외로 좋은 근골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에 든다, 근골이.’
하지만 더 마음에 드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아니 지금 눈으로 본 선천적으로 마기와 어울리는 말도 안 되는 체질이었다.
“내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
허진의 말에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호태악이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호태악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어 들린 마현의 대답이었다.
“싫습니다.”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조금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대답하는 마현을 보며 허진은 난생처음으로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트렸다.
* * *
마현이 총타주실을 나가고 염라서생 허진과 독수검혼 호태악 둘만이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허진의 웃음소리가 총타주실을 울리며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하하! 어떤가, 호 총타주?”
호태악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허진은 마현이 나간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재미있는 아이라 생각 들지 않나?”
“…….”
“천하에 본좌, 이 염라서생 허진의 제자가 되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거부했어.”
허진은 태사의가 아닌 서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마현이 나간 방문을 여전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제대로 한방 맞은 기분이야.”
여기서 호태악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저 허진의 말을 조용히 경청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않아. 기분이…….”
허진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지금의 미소에는 전에는 보이지 않던 마음이 담겨 있었다.
“호 총타주.”
“하명하십시오, 부교주님.”
“내일 본교로 떠날 때 저 아이도 데리고 갈 것이다. 준비시키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호태악 역시 마현을 떠올렸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아이였다.
허진이 부교주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허진이 부교주라는 사실을 알고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싫다고 대답했다.
총타주실을 나서는 호태악의 얼굴엔 수심이 어렸다.
생각도 못한 암초에 부딪힌 것이다.
마현.
그 아이를 어떤 자격으로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허진의 말과 표정으로 볼 때 분명 제자로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그럼 결국 얼마 후 부교주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은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서열이 급상승한다.
그런데 문제는 마현이 허진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지금 현재, 마현은 마교 최하 말단 마인도 아닌 그저 본교로 마인이 되고자 찾아가는 그저 그런 아이일 뿐이었다.
부교주 제자로 대우하려니 주위의 눈이 있었고, 그냥 평범한 아이로 대하려니 허진의 눈이 있었다.
호태악은 잠시 고민하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고민하지 말자. 부교주님의 제자가 되던 안 되던 현재 부교주님이 관심을 가지는 아이다.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자. 나라고 별수 있나? 부교주님의 시선이 더 중요하니까.’
결국 호태악은 자신의 직분보다 부교주인 허진의 마음을 선택했다.
갑작스럽게 화려한 별채로 안내된 마현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고 피식 웃었다.
별채로 들어서자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아이 둘이 서 있었다.
마현은 그 둘이 시녀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목욕 준비를 끝내놓았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작은 문 사이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시 살아난 후 한 번도 목욕을 하지 않았군.’
마현은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지고, 너무 닳아 넝마가 된 옷을 벗었다. 이내 알몸이 된 마현은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중앙에는 나무로 된 욕조가 있었고, 그 안에 담긴 물은 하얀 수증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하르센 대륙과 욕실의 차이는 있었지만 사람이 씻는 용도 자체가 다를 리 없었다.
마현은 때가 덕지덕지 낀 알몸을 내려다보고는 욕조 안으로 들어가 몸을 담갔다. 그러자 시녀 둘이 다가와 마현의 몸을 하얀 무명천으로 씻어주기 시작했다.
마현은 익숙한 듯 팔을 들어 시녀들에게 몸을 맡겼다.
과거 흑마법사 시절 이런 시중을 항상 받았던 마현은 별달리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함에 눈을 감았다.
대략 반시진 동안 욕조의 물을 몇 번 갈아내고 나서야 목욕이 끝이 났다.
욕조에서 나온 마현은 시녀들의 손에 몸을 맡겼다. 하얀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마현의 몸에 묻은 물기를 닦은 시녀들은 보랏빛이 감도는 비단옷을 꺼내왔다.
화려하고 좋은 옷인 것은 알겠지만 마현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 판단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마교에 일개 마인이 되러 가는 것이지 부교주의 제자로 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검은 마의는 없느냐?”
마현의 말에 시녀들은 비단옷을 치우고 이내 검은색 마의를 가지고 왔다. 그래도 결이 촘촘한 것이 상질의 마로 만든 옷인 듯 보였다.
마현이 검은 마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들은 나지막하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에게 옷을 입혔다.
“저녁은 조금 후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하신 게 있으면 저기 보이는 줄을 당기시면 됩니다.”
대략적인 일들을 이야기한 시녀 둘은 허리를 반쯤 숙인 채 총총 뒷걸음으로 물러갔다.
‘마지막 호사라 생각할까?’
이왕 여기로 안내 받은 이상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화려한 비단 이불이 깔린 침상으로 다가간 마현은 드러누웠다. 비단이 주는 부드러움과 포근함을 만끽했다.
개운한 몸에 포근함까지 더해지자 마현은 염라서생 허진을 떠올렸다.
‘설마 마교 부교주일 줄은 몰랐군. 그나저나 제자라…….’
마현은 피식 웃음을 날렸다.
아직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는 마법사가 없다.
자신은 마법사다.
아마도 허진은 검사일 것이다.
마법사가 검사의 제자로 들어가서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히 허진의 제안은 생각해 볼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떠올리며 피식 웃던 마현의 눈에서 불쑥 살심이 피어올랐다.
‘젠장!’
마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자신을 죽음의 늪으로 몰아넣은 여섯 명의 늙은이가 생각난 것이었다. 단지 이권을 챙기겠다고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백마법사들.
그들은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자들이었다.
비록 사제지간의 연은 맺지 않았지만 고아로 떠도는 자신을 거둔 후,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가르쳐 준 것이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깊은 배신을 맛본 마현이었다.
이미 그런 경험을 한 마현이었기에 아무리 좋은 자리라 해도 누군가의 제자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또다시 그런 지독한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순간에 좋던 기분이 날아가 버렸다.
이미 편안한 마음을 가지기는 틀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아직은 불완전한 1서클이나 완성시켜야겠군.’
마현은 침상에서 일어나 화려한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보통 마법사들은 편안히 누워서 마법 수련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마현은 의자에 편안히 앉아 수련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마법 수련이라는 게 원래 몸이 가장 편한 상태에서 하는 거라 자세는 그저 취향일 따름이었다.
마현은 눈을 감고 팔을 편안히 다리 위에 올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몸 주위로 스쳐지나가는 마나가 느껴졌다.
마현은 무리하지 않고 마나를 몸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피부를 통해 마나가 스며들었다. 조심스럽게 마나를 심장으로 모은 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서클로 밀어 넣었다.
후우웅.
마나 진동이 미약하게 느껴지며 심장을 둘러싼 하나의 마나 서클이 조금씩 빠르게 회전하며 심장의 마나를 잡아당겼다.
대기 중 마나의 양이 하르센 대륙보다 적었지만 농도와 집약성이 더욱 강해 전보다 빨리 뼈대만 만들어진 서클에 마나라는 살을 붙일 수 있었다.
‘이 정도만 하자.’
1서클을 완성시킨 마현은 마법 수련을 멈추고 눈을 떴다.
전과 달리 마현의 심장을 둘러싼 서클에서 마나가 흩어지지 않았다. 하나의 완전한 고리가 완성된 서클에서 마나를 잡아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마교로 가 아수라신과 계약하는 것만 남았나?’
마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잠시 상상해 보았다.
아수라신.
딱히 싸움이나 전쟁에 관여된 신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 세상의 신들 중에는 전쟁과 싸움을 주관하는 신이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단지 아수라신은 십계라 불리는 천계에서 아수라계를 관장하는 신이었다.
그 아수라계는 항상 싸움과 전쟁이 그치지 않는 곳이었고, 아수라신은 그 아수라계를 관장하는 신이었다.
마현이 듣기에는 결국 아수라신이 전쟁의 신이며 싸움의 신인 군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이 세상 사람들이 그리 부르지 않을 뿐이라 짐작했다.
‘아수라신은 군신 아이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새로운 마신을 통해 흑마법을 익힌다고 생각하자 마현은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이 세계에서는 어떻게 마신의 권능을 이어받을까? 마법사가 없으니 마법진도 없을 터. 아수라신과 계약은 어떻게 할까?’
수많은 궁금증이 마현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졌다가 사라졌다.
물론 내일 마교로 가면 알게 되겠지만 마현은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지금 현재를 즐기고 있었다.
* * *
의외로 마교 본산인 천산으로 떠나는 부교주 염라서생 허진의 행차는 단출했다. 힘 좋고 쉽게 지치지 않는 말들로 구성된 팔두마차 한 대가 전부였다.
허진이 이곳 사천에 올 때도 그렇게 왔으니 갈 때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대신 달라진 것은 마차를 끄는 마부가 바뀌었다는 것 정도였다.
마부석에는 흑웅귀 왕귀진이 타고 있었다.
호태악이 어제 일도 있고 해서 계획을 조금 앞당겨 왕귀진을 본산으로 보내기로 한 까닭이다.
왕귀진은 깔끔한 모습으로 나오는 마현을 보자 어제 그 거지 아이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깜짝 놀랐다. 놀란 것은 비단 왕귀진뿐이 아니었다.
아직 어린 나이여서 앳된 모습이었지만 꽉 다물어진 입술하며 설풍(雪風)도 얼려 버릴 것만 같은 차가운 눈매는 무척 사내다웠다.
딱히 미공자라고 부를 수는 없었지만 조금 나이가 들어 청년이 된다면 필시 남성다움을 물씬 풍기는 외모를 가질 것 같았다.
마현의 외모에 허진 역시 내심 놀랐다.
땟국물에 가려 그저 눈매만 살아 있는 아이라 여겼는데 알고 보니 냉철함과 사내다움을 겸비한 호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현의 얼굴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 갈 길이 멀어 이내 허진과 마현은 팔두마차에 올라탔다. 원래 마현은 왕귀진과 함께 마부석에 오르려 했지만 허진의 명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마차 안에 타게 되었다.
마차 안은 의외로 넓고 화려했다.
마현은 허진이 앉은 반대편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교로 가는 내내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허진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책 한 권을 꺼내 펼치고는 독서삼매경에 빠져드는 모습이었다.
마현은 달리 할 일이 없어 고개를 돌려 마차에 난 창문을 통해 밖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