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11화
“이, 이놈!”
하얗게 질린 호태악은 노기를 억누른 낮은 목소리로 왕귀진을 불렀다.
그 소리에 왕귀진은 ‘왜요?’라는 표정으로 호태악을 쳐다봤다.
호태악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가 이내 울그락불그락 변하기를 수차례. 그제야 왕귀진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다.
“하하하하. 사천총타는 분위기가 아주 밝군 그래.”
푸른 비단 옷을 입은 중년 사내가 어쩔 줄 몰라하는 호태악을 향해 즐겁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호태악은 소매로 연신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왕귀진을 노려보며 나직이 소리쳤다.
“어서 몸을 숙이지 못할까!”
“……?”
왕귀진은 그저 이상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두 눈만 뻐끔거렸다.
“본교 부교주님이시다!”
“헉!”
순간 왕귀진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방금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머릿속에서 모조리 떠오르자 두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온몸에서 힘이 쭈욱 빠졌다.
왕귀진은 본래 마교 출신이 아니라 과거 사천성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던 흑도방파 출신이었다.
그 때문에 고위급 인사를 보기는커녕 아직 마교 본산도 가보지 못한 상태였다.
왕귀진은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는 염라서생 허진을 보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 목숨이구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철퍽!
왕귀진은 정신을 잃은 마현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듯 내리고는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쿵!
얼마나 정신없이 엎드렸는지 머리가 땅바닥을 강하게 찍은 것도 못 느낄 정도였다.
“부, 부디 목숨만은……. 아, 아니 부, 부교주님을 뵈, 뵈, 아니 알현하나이다. 부, 부디 목숨……. 아니, 마교 천세 천세 천천세!”
왕귀진은 너무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다.
“아직 본교로 입성 한번 하지 못한 자인가?”
염라서생 허진은 그런 왕귀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본교 출신이 아니라 사천성에 총타를 세울 때 교인이 된 자이옵니다. 사천총타가 안정이 되면 올 겨울쯤 본교로 수련을 보낼까 예정을 잡아둔 자이옵니다.”
“그런가?”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록 총타의 말단이기는 하오나 사천총타를 세우는 데 큰 힘을 보탠 자이오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감히 용서를 청하옵니다.”
호태악은 바닥에 엎드렸다.
“본좌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교인에게, 본좌를 알지 못하는 것까지 탓할 수는 없지. 일어나라, 호 총타주. 그리고 너도 일어나라.”
허진은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황공하옵니다.”
“화, 황공하옵니다.”
허진은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내던져진 마현을 쳐다봤다.
“저 거지 아이가 본좌의 이름을 거론했다고?”
“그, 그러하옵니다. 그래서 총타로 데리고 왔습니다, 부교주님.”
여전히 후들거리는 다리로 인해 엉거주춤 선 왕귀진은 허진을 향해 허리를 푹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허진은 고개를 돌려 쓰러진 마현을 쳐다봤다.
‘흠……, 저 아이는…….’
왠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바로 생각이 나지 않자 허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맞아, 그때 그 아이로군.’
무당제일검 청명진인과 대로에서 부딪혔을 때 본 두 거지 아이 중 한 아이였다. 그땐 두 아이가 함께였는데 지금은 한 명만 있어 바로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자신과 안면이 없는 아이였다. 굳이 인연을 따진다면 그 대로에서 단지 잠시 스친 것뿐이었다.
허진은 쓰러져 있는 마현의 몸을 살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는데 몸 안에 담긴 내기는 범인들보다 많았다.
‘이상한 아이로군.’
그러고 보니 그 대로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깨우라.”
“예?”
왕귀진은 허진의 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본좌를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허진의 위압적인 목소리에 왕귀진은 공포를 느끼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부교주님. 이곳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안에 드심이 어떠하실지요?”
호태악이 여전히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왕귀진을 보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 아이를 안으로 데리고 오라.”
허진은 마현을 한 번 더 내려다보고는 몸을 돌렸다.
아무리 허진이 범인들에게 자상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그들에게 관심까지 쏟을 정도는 아니었다.
평소의 허진이라면 마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침 왕귀진이 자신의 눈앞에 마현을 데리고 오자 약간 흥미가 생긴 것뿐이었다.
* * *
총타주실 태사의에 앉은 염라서생 허진을 향해 사천총타주 독수검혼 호태악이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총타 소속 비영대의 보고에 저 아이에 관한 것이 있어 들고 왔습니다.”
마교에는 크게 두 가지의 정보조직이 있었다.
하나는 마교 직속의 비마대였고, 하나는 각 총타나 분타 소속의 비영대였다.
“비영대의 보고서에?”
비영대의 보고서에 마현이 있다는 이야기에 허진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예, 부교주님. 어제 우연히 부교주님과 부딪힌 무당제일검 청명진인에 관한 보고서에 저 아이에 관한 것이 있었습니다.”
눈치가 빠른 호태악은 이곳으로 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비영대를 시켜 마현에 대해 알아본 것이다.
“정파와 관련된 아이인가?”
허진은 호태악이 내민 문서를 집어 들며 물었다.
“그게 조금 애매합니다.”
“애매하다?”
“직접 읽어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보고서에는 마현에 관한 것만 요약되어 있었다.
이름 : 마현.
나이 : 15세 정도로 추정. 자세한 사항은 좀 더 알아봐야 함. 사천성 동쪽 강가 다리 아래 거지촌 아이임.
거지촌에 함께 기거하는 손정이라는 아이와 단짝 친구임.
어제 오후 본교 부교주님과 무당제일검 사이에 일어난 충돌에 휘말림. 아마 그 여파로 내상을 입은 것으로 추측. 우연히 무당제일검이 내상에 죽어가는 두 아이를 보고 그가 머무는 객잔으로 데리고 가 치료.
무당제일검은 두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정.
하지만 단짝 친구인 손정이라는 아이만 제자로 들어가고, 마현은 무당제일검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했다고 함.
오늘 오후, 친구 손정은 무당제일검, 무당파 도인들과 함께 성도를 떠남.
홀로 객잔에서 나온 마현이 본 총타 소속 흑웅귀 왕귀진의 손에 의해 총타에 끌려옴.
이상 보고 끝.
허진은 마현이 무당제일검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했다는 내용에서 눈이 멈췄다.
아무 힘도 없는 거지 아이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무당파 도인의 제자 자리를 거부했다는 보고서를 보면서 허진은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거지 아이가 무당파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늘구멍에 낙타가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한 마디로 인생 자체가 달라지는 일생일대의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했다는 내용은 허진에게 있어서도 조금은 충격이었다.
그런 거지 아이가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흥미는 어느새 ‘마현’이라는 아이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이제 아이를 안으로 들이겠습니다.”
호태악은 이 보고서를 먼저 보이기 위해 바로 마현을 이 자리에 데리고 오지 않았다.
허진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호태악은 시녀를 시켜 마현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도록 명을 내렸다.
마현은 사천총타 소속 마인의 손에 안겨 들어왔다.
여전히 잠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해혈(解穴)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호태악은 허진의 표정을 살핀 후 수하에게 눈치를 줘 마현의 잠을 깨우게 했다. 수하가 해혈하자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마현의 몸이 꿈틀거렸다.
강제로 잠에 빠졌다가 깬 터라 마현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순식간에 자신을 제압한 흑웅귀 왕귀진을 떠올리며 재빨리 몸을 움직여 벽을 기대고 두 손을 들어올렸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이내 마현은 이곳이 자신이 당했던 골목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됐다, 나가보라.”
“명!”
호태악은 마현이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그를 데리고 들어왔던 수하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 소리에 마현은 호태악을 쳐다봤고, 이내 그 옆에 턱을 괸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허진을 발견했다.
허진과 호태악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중압감에도 마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제대로 짚은 것이었다.
비록 방법은 험했지만 결과적으로 염라서생 허진을 만나게 된 것이다.
“본좌를 찾았다고?”
마현은 깊은 숨을 몰아쉰 뒤 허진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어둠의 향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마현은 허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너무나 그리웠던 어둠의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마치 어미의 품에라도 안긴 것처럼 포근함을 느끼자 마현의 입꼬리는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
호태악은 그런 마현의 어이없는 행동에 발끈하려 했지만, 이내 조용히 손을 올려 말리는 허진의 행동에 노기를 꾹꾹 누르며 뒤로 물러났다. 허진은 여전히 턱을 괸 채 마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눈을 감고 서 있던 마현이 눈을 뜨자 허진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손가락을 마주 꼈다.
“이제 이야기를 할 준비가 끝난 것인가?”
허진의 말에 마현은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마현은 허리를 살짝 숙였다.
“뭐 그건 되었고, 왜 본좌를 찾았지? 내 기억에는 너와는 아무런 안면도 없는데 말이야.”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찾았습니다.”
마현의 말투는 당당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마현을 보는 객관적인 시선일 뿐, 호태악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허진이 누구인가?
십만 마교인의 2인자, 부교주였다.
그 앞에 이렇게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불경일진데 상당히 무례한 모습까지 보인다고 여겨졌다.
호태악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또 나서려 할 때 허진의 손이 다시 막았다.
허진이 그렇게 말리니 호태악은 더 이상 나서지 못하고 노기 어린 눈빛으로 마현을 노려볼 뿐이었다.
“본좌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실로 몇 년 만에 들어보는 말이군. 그래, 뭐가 궁금하지?”
이미 마현에 대해 강한 호기심이 생겨 버린 허진은 평소 그답지 않게 말을 받아주었다.
“혹 마교 분이십니까?”
“너는 내가 마교인인 것을 모르고 찾아온 것이냐?”
마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인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왜 굳이 본좌를 찾아온 것이지?”
“어둠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어둠의 기운?”
“그래서 혹 마교 분이 아닌가 싶어 찾아왔습니다.”
허진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어둠의 기운? 마기를 말하는 것인가? 마기라는 표현을 모르는 것을 보아 무공에 대해서는 무지한 아이 같은데.’
허진의 눈에 마현은 참으로 재미난 표현을 쓰는 아이였다. 하지만 허진은 냉랭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좌는 한 번도 마기를 내뿜은 적이 없다.”
무당제일검 청명진인과 부딪힐 때도 허진은 마기를 뿜지 않았다. 그때 마기를 뿜은 건 유령대뿐이었다.
“굳이 어둠의 기운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여 어둠의 향까지 감출 수는 없습니다.”
실로 알 수 없는 표현으로 대답하는 마현을 향해 허진은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다면 너는 마기의 향을 맡을 수 있다는 소리인가?”
그 질문을 하고도 허진은 자신이 왜 이런 우스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이 마기도 아니고, 마기가 가진 어둠의 속성을 향기로 맡는다는 이야기는 평생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둠의 기운을 마기라고 한다면, 저는 분명 그 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허진은 차가운 표정으로 마현을 내려다보았다.
마현의 눈동자에서 거짓은 보이지 않았다.
허진은 그런 마현을 향해 마기를 뿜었다.
“네놈이 말하는 어둠의 기운이 이것인가?”
“조금 다르지만 비슷합니다.”
마현은 밀려드는 마기에 온몸을 맡겼다.
순간 허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자신의 마기가 조금씩 마현의 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