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8화
“무량수불.”
안 그래도 마음속으로 계속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이렇게 두 아이를 본 것이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여기며 청명진인은 쓰러져 있는 마현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흠…….”
마현의 안색을 보자 청명진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입 주위를 보니 이미 토혈을 한 상태였고, 기가 원활히 소통되지 않은 듯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위급한 상황이었다.
낮에 자신과 염라서생 허진 사이에서 터질 듯 휘몰아친 기세로 인해 내부가 진탕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그때로부터 시간도 한참 흘렀다.
“도인님, 제 친구, 현이 살 수 있는 거죠? 네?”
손정은 청명진인의 팔에 매달리며 울었다.
청명진인은 마현의 손목을 잡고 맥을 살폈다.
이미 기혈들이 심각하게 꼬이고 뒤틀려 있었다.
상당히 위중한 상태였다.
‘위험한 상황이지만 다행히 늦지는 않았구나.’
청명진인은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마현을 품에 안고 일어났다.
“한시가 급하구나, 서두르자구나.”
청명진인은 마현을 안고 걸음을 내딛다가 손정이 자신의 발걸음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을 보자 손정마저 품에 안아 들고 객잔을 향해 경신술을 펼쳤다.
청명진인은 별채에 마련된 자신의 침실로 들어와 마현을 침상 위에 눕히고는 그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얘야.”
“예, 도인님.”
“어떤 일이 있어도 네 친구와 나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청명진인은 혹 모를 일을 대비해 단단히 일러둔 후 마현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차기용역을 이용한 요상치료에 있어 명문혈(命門穴)이 가장 좋지만 마현이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상태라 차수(次數)인 기해혈(氣海穴) 위로 장심을 올렸다.
청명진인은 내력을 가장 부드럽게 펼칠 수 있는 태극심법(太極心法)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마현의 기해혈로 기운을 밀어 넣었다.
청명진인의 내력은 자연스럽게 마현의 단전에 안착하더니 부드러우면서도 장중하게 심장을 향해 밀려 올라갔다.
‘으음?’
청명진인의 감긴 두 눈 사이로 살짝 주름이 졌다.
‘분명 아무런 기운도 가지지 않은 아이거늘……, 어찌 나의 내력을 거부하는 것이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운이 커 가끔 상대의 내력을 거부하는 일은 있다. 하지만 이처럼 속이 텅 빈 것처럼 일말의 기운도 가지지 않은 아이의 신체가 내력을 거부하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청명진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내력을 거두었다.
간단히 거부하는 힘을 누르고 뒤틀린 기혈을 치료할 수는 있다. 하지만 청명진인은 지금 자신 앞에 누워 있는 마현의 몸에 조금이라도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거지 아이였지만, 어쨌든 오늘 이 아이가 자신과 사손들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인 까닭이다.
‘내력이 안 되면 약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청명진인은 품에서 약함을 꺼내들었다.
“치료는…… 끝난 건가요? 현이는 살 수 있나요?”
손정은 불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청명진인을 향해 다가왔다.
“약을 먹고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청명진인은 약함에서 내상약을 꺼내들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그리 생각한 청명진인은 약함 구석에 기름을 먹인 고급 한지에 싸여 있는 단환 하나를 꺼내들었다.
고급 한지를 풀자 청아한 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금세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 단환은 무당파에서 자랑하는 최고의 영약인 태극신단(太極神丹)이었다. 비록 소림사의 대환단(大還丹)에 비해 조금 떨어진다는 평을 듣지만 무림인들이라면 평생 한 번 먹어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최고의 영약이었다.
만약 마현을 고치기 위해 태극신단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면 아니, 그중 반이라도 사용해야 한다면 청명진인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강제로 내력을 이용해 치료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현을 치료하는 데에는 아주 적은 양이면 충분했다.
청명진인은 태극신단을 손톱으로 눈곱만큼 떼어 미리 꺼내놓은 내상약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태극신단을 정성스럽게 포장하고는 품에 넣었다.
‘내상약이 저 아이의 내상을 치료하고 난 후 이 정도 태극신단이면 모자란 보혈을 충분히 보충해 주고도 남을 것이다.’
극양의 영약이라든지, 또는 극음의 영약이 아닌 이상에야 태극신단 같은 영약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쌓은 내력과 달리 사람의 각양각색의 고유한 기운과 잘 어울린다.
청명진인은 마현의 입에 태극신단이 섞인 내상약을 밀어 넣고는 근처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이제 남은 것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청명진인의 입장에서 지켜볼 필요까지는 없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태극신단의 힘으로 전보다 더 몸이 좋아지면 좋아졌지 치유되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손정을 향해 청명진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친구는 이제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그 말에 손정은 환한 얼굴로 마현이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달려갔다.
“아직 손은 대지 말거라.”
마현을 향해 손을 뻗던 손정은 청명진인의 말에 얼른 손을 거두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손정은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청명진인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따뜻한 미소가 그려졌다.
‘참으로 마음이 따뜻한 아이로구나.’
그런 마음으로 손정을 쳐다보던 청명진인은 한층 깊어진 눈으로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폈다.
‘이게 인연인가?’
“도인님 정말 감사……, 히익! 딸꾹! 무, 무당…… 딸꾹. 파 도, 도사님, 딸꾹!”
청명진인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계속 허리를 숙여 감사의 말을 전하던 손정은 청명진인의 소맷자락에 선명하게 새겨진 태극무늬를 보고는 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떴다. 손정은 크게 놀랐는지 딸꾹질이 멎지 않았다.
“허허허허.”
그 모습이 어찌나 천진난만하게 보였는지 청명진인은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탁자 한편에 있는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라 손정에게 내밀었다.
“마시거라, 딸꾹질을 멈추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가, 감사합…… 딸꾹, 딸꾹 ……니다.”
손정은 청명진인이 내미는 찻잔을 받아들면서 지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몽롱한 상태였다. 그는 차를 입으로 마시는지 코로 마시는지, 또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단숨에 찻잔을 비워 버렸다.
청명진인은 좀 더 자세히 손정을 살필 수 있었다.
‘참으로 맑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구나.’
청명진인은 힐끔힐끔 자신을 쳐다보는 손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어찌된 일이냐?”
“그, 그게 어찌된 일이냐면요.”
손정은 대로에서 무당파와 염라서생 허진 사이에 끼어 어지러움과 고통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눈을 떴는데 대로가 아닌 골목길 따사한 볕이 드는 곳에 자신은 누워 있고 친구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친구가 자신을 골목길로 데리고 온 후 기절한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급한 마음에 의원집이란 의원집을 모조리 달려가 봤지만 결국 문전박대만 당하자 친구 걱정에 서럽고 막막해서 길거리에서 울고 있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청명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다른 눈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 마현을 쳐다봤다.
그저 마음이 심약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도 다쳐 힘든 상황에 친구를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의외로 강단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인연이라…….’
청명진인은 손정에게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고 손짓했다.
손정은 긴장한 눈빛으로 청명진인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 편히 앉거라.”
그 말에 손정은 의자를 당겨 청명진인 앞에 앉았다.
청명진인은 손정의 완맥을 잡았다.
“조금 따끔하겠지만 몸에 나쁜 것은 아니니 그리 걱정하지 말거라.”
그 말에 손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명진인은 완맥을 통해 내기를 밀어 넣었다.
손정의 몸 안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음…….’
몸을 살피던 청명진인은 고개를 들어 손정의 얼굴을 쳐다봤다.
‘몸 안에 기운이 가득 차 있다. 그 기운이 심장을 보호하고 있구나.’
의외로 무공을 익히기에 훌륭한 재목이었다.
근골이 조금 약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내실이 아주 충실한 아이였다.
“얘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소, 손정인데요.”
손정은 말을 살짝 더듬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래, 정아. 나를 따라 무당파로 가지 않겠느냐?”
인연은 깊고 무거운 것이라 생각해 온 청명진인은 손정을 제자로 삼기로 마음을 먹었다.
“네?”
그 말에 손정은 깜짝 놀라 그만 큰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하하하하.”
그런 순진무구한 모습에 청명진인은 손정의 팔을 놓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의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
손정의 평생소원이 무림인이 되는 것이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더 큰 소원을 말하라면 당연히 무당파를 비롯한 오파일방이나 천하 육대세가의 제자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청명진인의 말에 손정의 몸이 떨려왔다. 너무 기뻐 당장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자그만 손을 꼭 움켜쥐었다가 고개를 돌려 침상 위에 누워 있는 마현을 쳐다봤다.
“왜 싫으냐?”
청명진인은 조금 실망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아, 아니요.”
“그런데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냐?”
“되고 싶어요, 저도 무당파 제자가 되고 싶어요.”
이내 청명진인은 손정의 눈이 자꾸 침상 위에 누워 있는 마현에게로 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치, 친구도 함께 갈 수 없나요?”
손정의 말에 청명진인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으하하하하!”
남을 배려하는 이런 손정의 성정에 마음이 흡족해진 것이다.
청명진인이 그 때문에 손정에게 자꾸 끌린 것이다.
청명진인은 고개를 돌려 침상에 누워 있는 마현을 쳐다봤다.
좋은 근골에 비해 심지가 약한 아이. 마음은 여리지만 친구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고운 심성.
‘제자가 둘이라…….’
그런 생각이 든 청명진인은 ‘풋’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그간 없던 제자 복이 왕창 오는 것인가?’
청명진인은 손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냐, 내일 저 아이가 깨어나거든 한 번 물어보자구나. 그리고 셋이 함께 무당파로 가는 거다.”
청명진인의 말에 손정의 얼굴은 어린아이 특유의 밝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네!”
그리고 목소리도 우렁찼다.
* * *
마현의 입으로 넘어간 내상약은 순식간에 녹아 그의 몸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내상약은 기혈을 따라 전신을 휘돌다가 뒤틀린 기혈과 만나면 그곳에 스며들어 바로잡아 주었다.
내상약이 마현의 심장 주위에 뒤틀린 기혈을 모두 잡아주었다. 그렇게 뒤틀린 기혈이 바로잡혔지만 내상약은 이미 한 번 난 상처로 많이 약해져 있는 부분까지 완전히 치유하지는 못한다. 그 때문에 청명진인이 태극신단을 조금 잘라내 내상약과 함께 복용시킨 것이었다.
비록 손톱만큼 적은 양의 태극신단이었지만 그 약효는 상당했다.
태극신단은 뒤틀렸던 기혈의 상처로 스며들었고 치유하는 것을 넘어 그 자리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마현의 내부를 전보다 더 튼튼하게 만들어 주고도 태극신단의 기운은 여전히 남아 그의 몸을 휘젓고 다녔다.
마현의 몸을 완전히 휘젓고 다녔지만 더 이상의 상처를 발견하지 못한 태극신단의 기운이 가야 할 곳을 잃고 마현의 전신 세맥으로 파고들 무렵이었다.
우우웅.
마현의 심장이 요동치며 태극신단의 기운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깊은 밤, 잠든 손정은 보지 못했지만 마현의 심장에서 마나 특유의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태극신단의 기운이 심장 주위를 돌다가 서서히 하나의 고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이이잉―
점점 더 밝게 빛나기 시작하던 푸른빛의 마나는 어느 순간, 횃불이 꺼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피식.
다시 제 모습을 찾은 마현의 심장 주위로 완전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 하나의 서클이 만들어지다 말았다. 완전한 1서클이 아닌 가장 기본적인 토대만 만들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