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4화
‘아직 몸과 완벽한 일체가 되지 않아서인가?’
마현은 잠시 미간에 주름을 잡았지만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다시 집중했다.
다시 반시진이 흘렀을 때쯤.
마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끈적끈적하면서도 매끈한,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기운이 미약하지만 감지된 것이다.
‘느꼈다!’
마현은 더욱 마나를 느끼기 위해 집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잡힐 듯 말 듯 희미하게 감지되던 마나가 서서히 선명하고 뚜렷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르센 대륙보다 마나의 양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군. 그래서 이토록 잘 느껴지지 않았던 것인가?’
마현의 입술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만약 지금의 몸과 완벽하게 일체감을 이루지 못했다면 마법 수련을 더 늦췄어야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마나를 잘 느끼지 못한 것은 단순히 새로이 눈을 뜬 이 땅에 분포한 마나의 양이 하르센 대륙보다 적었기 때문이었다.
마현은 더욱 정신을 집중해 마나를 심장으로 모았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문제는 없다!’
어둠의 신과 교감을 나누기 위해 필요한 마나는 아주 적은 양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으로 마법진을 가동시킬 수만 있으면 된다. 그 후에 신이 마법진과 접촉한다면 더 이상의 마나는 필요 없게 된다.
마현은 마나를 심장에 차곡차곡 쌓아갔다.
심장은 마나로 인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마현은 심장으로 마나를 모으는 것과 동시에 심장에 모인 마나를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 중앙으로 흘려보냈다.
우우우웅!
마법진이 작게나마 진동하며 하얀 재에서 검은 빛이 일렁거렸다. 흑마법사가 되는 가장 첫 번째 의식, 어둠의 신들 중 수장인 부신(副神) 키야의 허락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신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미천한 한 인간, 카칸. 이제 주신 아래 어둠을 관장하시는 부신 키야께 간청을 드리나이다. 부신 키야의 이름을 얻어 어둠의 종신들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 주소서.”
마현의 입에서는 하르센 대륙 공통어가 아닌 마법사들의 전유물인 룬어로 만들어진 언어가 흘러나왔다.
룬어는 그 자체가 마나의 힘을 담고 있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마현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빛은 강해졌고, 진동은 더욱 강렬해졌다.
쿠우우우―
마현은 의식적으로 심장에 모인 모든 마나를 마법진으로 밀어 넣었다.
더욱 강해진 검은 빛.
더욱 강렬해진 진동.
마법진은 순식간에 주위의 사기와 마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제 신의 부름만이 남았다!’
마현은 더욱 마음을 가라앉히며 어둠의 신, 키야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쩌저적!
그때, 갑자기 생성된 마법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법진에서 휘몰아치던 마나가 마현의 몸으로 튕겨졌다.
“컥!”
마현의 두 눈이 부릅떠지며 고통이 가득 찬 신음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소멸 직전 마지막 몸부림을 치듯 마법진은 더욱 강렬한 검은 빛과 진동을 한순간 내뿜었다.
그리고는 횃불이 꺼지듯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퍼석!
그에 반해 마법진에 모인 모든 마나가 마현에게로 거센 밀물처럼 일제히 되돌아가자, 그의 몸은 한 자가량 허공으로 튕겨져 올라갔다.
콰광―!
“크악!”
허공으로 튕겨져 오른 마현은 피분수를 내뿜으며 힘없이 주인 없는 묘지들 사이로 떨어졌다.
쿵!
그 충격으로 입과 코, 귀에서 피를 흘리며 한동안 온몸을 파르르 떨던 마현은, 힘겹게 손바닥을 의지해 겨우 몸을 일으켰다.
‘어, 어둠의 신이…… 부신 키야가 없……, 큭!’
풀썩!
마현은 그 생각을 끝으로 의식을 잃고 땅에 처박히듯 쓰러졌다.
* * *
짹짹짹.
참새 한 쌍이 다리 밑에 쳐진 움막 한구석으로 날아와 아침을 알리는 날갯짓을 하다가 날아갔다.
보통 사람에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이겠지만 거지들에게는 새벽과 다름없는 한밤중이었다. 그런 아침에 움막 밖으로 손정이 나왔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습이었지만 얼굴 가득 걱정이 묻어 있었다.
“어딜 간 거지?”
간밤에 마현이 움막 밖으로 나가는 것을 잠결에 어렴풋이 느꼈었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한밤중이었다. 손정은 단지 마현이 소변을 누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 여겼는데 아침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불안한 마음이 들어 이렇게 움막 밖으로 나온 것이다.
초조한 눈으로 움막 밖을 둘러보는 손정의 얼굴은 서서히 걱정으로 물들어갔다.
“나는 곧 여기서 떠날 거야. 그러니 너랑 친구를 할 수 없어!”
친구가 되던 날 밤, 마현이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설마, 아닐 거야. 떠난다고 해도 친구인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갈 현이가 아니야.’
손정은 고개를 세차게 저어 불안한 마음을 털어 버리려 애썼다.
터벅터벅.
그때 저만치에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피투성이가 된 마현이 비틀거리며 힘없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혀, 현아!”
손정은 깜짝 놀라 마현을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어떻게 된 거야? 몸은 괜찮은 거야?”
손정은 마현을 부축하며 걱정이 담긴 물음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마현의 얼굴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고, 입 주변과 상의 곳곳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그나마 크게 다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손정은 나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손정은 한시라도 빨리 마현을 움막 안으로 데리고 가 눕히고 싶어 했다.
“그냥 쉬고 싶다.”
마현은 손정의 품에서 벗어나 움막 밖 강가에 힘없이 누웠다.
“그, 그래?”
마현이 눕자 손정은 재빨리 주위에서 나뭇가지들을 주워왔다. 아직 아침이라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손정은 마현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누워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서둘러 불을 지폈다.
어느 정도 불이 붙자 손정은 마현 곁으로 다가왔다.
“미안하지만 혼자 있고 싶다.”
마현은 손정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미, 미안. 알았어.”
손정은 나뭇가지를 올려 불을 더욱 따뜻하게 지피고는 조용히 마현 옆에 앉았다.
마현은 손정이 자신 옆에 앉는 것을 느끼자 고개를 돌렸다.
“말 안 시킬게.”
“…….”
마현은 그런 손정을 그냥 묵묵히 쳐다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안 물어볼게. 하지만 그냥 친구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힘이 나지 않을까? 나라면 그럴 것 같은데…….”
손정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머금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마현 옆에 나란히 누웠다.
마현은 그런 손정을 보며 미소를 짓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쳐다봤다. 어느새 미소는 사라지고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신이 없다, 신이…….’
마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니야, 세상이 존재하면 그 세상의 신은 존재하는 법.’
순간 마현의 눈동자가 파르르 요동쳤다.
요동치는 눈동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마현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다른 세상에 다른 신. 설마 여기는 주신과 어둠의 신 키야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세상이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나는 사신 키디악과의 거래를 통해 죽지 않고 다시 새 생명을 얻었다. 당연히 다른 세상이라고 해도 주신 아래 관장되는 새로운 세상일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런데 아니었단 말인가?’
마현은 천애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크크크, 크크크크.”
마현은 미친 듯 울음 섞인 웃음을 토해냈다.
“불사의 대가가 너무나도 가혹하구나…….”
어둠을 지배하는 신들의 권능을 받을 수 없다면 흑마법사의 길을 걸을 수 없다. 결국 흑마법사의 길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처량하게 웃던 마현은 말아 쥔 주먹을 가슴 위로 올렸다가 모래 바닥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퍽 퍽.
“나 카칸을 우습게보지 마라!”
마현의 눈동자에서는 강렬한 의지가 내뿜어졌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주신의 세상이라면 필시 그 아래 어둠을 관장하는 어둠의 신이 있을 터. 나는 반드시 흑마법사의 길을 걷고 말 테다. 그리고 돌아간다.”
마현의 눈동자에서는 밤사이 모은 마나 중 미처 흩어지지 않았던 마나가 투기를 가득 싣고 뿜어져 나왔다.
정오가 다가오자 움막에서 자던 거지들이 하나둘 일어나 어기적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아침에 피운 장작은 꺼져 있었고, 마현 옆에 누웠던 손정은 가늘게 코를 골며 잠이 들어 있었다. 이내 움막 밖은 잠에서 깬 거지들로 인해 부산스러워졌고, 그 소란에 손정은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깼다.
손정은 잠에서 깨자마자 마현부터 찾았다.
“몸은 괜찮아?”
“그래.”
마현의 얼굴은 아침보다 많이 평온해져 있었다.
이 세상의 마나는 생각보다 적은 양이 존재했지만 의외로 밀도와 응집력이 하르센 대륙보다 강해 마현의 몸을 빠져나가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로 인해 마현은 임시방편이지만 마나를 다스려 몸을 가다듬었다.
비록 서클이 완성되지 않아 완벽히 몸을 다스릴 수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확실히 몸이 좋아졌다.
‘당분간 몸을 추스르는 것과 이곳 마나에 대한 친화력을 높이는 쪽으로 수련해야겠다.’
마현은 당장 심장 주위에 서클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클은 언제라도 만들 수 있다. 또한 지금은 신체의 나이가 어리고, 이미 한 번 흑마법사의 길을 걸었기에 빠른 성장을 자신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제의 일로 인해 무너진 신체의 균형을 바로잡는 것과 이 세상을 다스리는 어둠의 신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일단 이 세상의 신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마현은 구걸을 위해 함께 길을 나선 손정에게 신들에 대해서 물었다.
“신?”
“그래,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은 누구지? 또 그들을 모시는 사제들은 있어? 신성력(神聖力)이나 마성력(魔聖力)은 사용해? 신전은?”
손정은 마현의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처럼 마현이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었다. 그만큼 마현은 냉철해지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조바심을 억제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자, 잠깐.”
손정은 손을 들어 마현의 입을 막았다.
“하나씩만 질문해.”
손정의 말에 마현은 잠시 얼굴을 붉혔다.
마현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원 주인의 심성이 미약하게나마 마현 본인의 성격과 융화되어 과거보다 좀 더 부드러워졌다. 그렇기에 마현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살짝 얼굴을 붉힌 것이었다.
“뭐부터 물었지? 아!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
손정의 말에 마현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흠…….”
언뜻 생각이 잘 나지 않는지 손정은 한동안 낯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혹시?”
“부처님이나 천존님을 말하는 거야?”
“부처님, 천존님? 그들이 이 세상의 신들인가?”
마현은 손정을 다그쳤지만 답이 금방 나오지는 않았다.
“몰라. 뭐 그분들이 이 세상을 구원……. 헤헤.”
손정은 띄엄띄엄 말을 하다 금세 혀를 삐죽 내밀었다.
“스님들이나 도사님들의 말을 먼발치에서 몇 번 주워들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마현은 내심 실망했지만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하르센 대륙 역시 여러 신들과 신전이 존재했지만 고위층 지식인들을 제외하고는 그저 신들의 이름만 알뿐 자세한 것은 모른다. 먹고 살기 바쁜 하층민들이 시간을 내서 신들에 대해 공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신들을 섬기고 열심히 기도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사제들의 간단한 포교 활동에 그저 밤낮으로 소원을 비는 기도를 할 뿐이었다.
그보다도 더 어려운 농노 같은 최하층민들은 그저 그런 신들이 있다는 것만 알뿐 그들을 섬기는 것조차 사치라 여길 정도였다.
그건 하르센 대륙이나 여기나 마찬가지다.
“그럼 네가 말한 스님이나 도사들이 그 뭐야, 부처님과 천존을 모시는 사제들이야?”
“사제? 사제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