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3화
“그냥 친구하자. 나는 친구가 없어. 그리고 너도 없잖아. 그러니까 친구하자, 응?”
손정의 맑은 눈동자에 외로움이 묻어나왔다.
비록 나이가 어려 표현에 서툴렀지만, 마현은 그 눈빛에서 손정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천애의 고아.
이 거친 세상을 홀로 살아야 하는 처지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또 누군가 의지해 오면 받아주고 싶다.
그렇게 남들에게 다 있지만 자신에게는 없는 소중한 그 무엇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손정은 그런 것 중에 ‘친구’를 택한 것이다.
마현은 누운 채 고개만 돌려 그런 손정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순박하고도 투명한 눈동자에서 순수함을 느꼈다.
“안 돼! 싫어!”
마현은 모질게 내뱉고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아이였다.
“싫어! 할 거야, 할 거야! 나는 너랑 친구 할 거야.”
더는 모질게 대해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 좀 더 차분히 말했다.
“나는 곧 여기서 떠날 거야. 그러니 너랑 친구를 할 수 없어.”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마현에게는 웃긴 일이었다.
왜 그럴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봤지만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아마 내가 가지지 못한 순수함을 봤기 때문인지도…….’
마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몸이 나약해지니 마음도 약해지는가 보다.
“어차피 만나면 헤어지는 법도 있어. 하지만 곁에 없어도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든든해지잖아.”
손정은 어디서 주워들은 말까지 동원하며 끈질기게 마현에게 매달렸다.
조금씩 마음이 풀어진 마현은 끝내 손정을 뿌리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 방금 고개를 끄덕였지! 맞지? 맞지?”
손정은 금세라도 하늘을 날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나에게도 친구가 생겼어, 나에게도. 하하하하.”
마현은 그런 손정을 굳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친구의 의미는 목숨처럼 무거운 거야. 나를 배신하지 않을 자신 있어?”
마현의 표정이 뜻밖이었는지, 손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곧 결심한 듯 고개를 힘차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알았어, 약속할까? 아니야.”
손정은 고개를 젓더니 이내 손바닥을 딱 쳤다.
“맹세할게. 나 손정은 하늘을 향해 맹세합니다. 나의 목숨을 걸고 친구 마현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순박한 줄만 알았던 손정의 눈에서 의외로 굳건함이 보였다.
‘하긴, 저런 심성이 있으니 이런 환경에서도 항상 마음이 곧을 수밖에…….’
마현은 그런 손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중원의 언어가 아닌 하르센 대륙의 공통어였다.
“어둠의 마나를 빌어 한 가지 약속을 하나니, 나 카칸은 손정을 친구로 받아들여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배신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마현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오자 손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런 손정을 향해 마현은 그저 웃었다.
이제껏 남에게 보이지 않았던 부드러운 미소였다.
* * *
거지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각은 아침이 아니라 정오다.
어느 누구라도 아침부터 거지를 본다면 재수 없어 하기에 일부러 늦게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다.
점심때가 다 되어 일어난 마현은 손정과 함께 익숙하게 성도 저잣거리로 나섰다. 함께 구걸에 나선 것도 여러 날이 지난지라, 식당가를 돌며 어렵지 않게 끼니를 때운 둘은 볕이 잘 드는 벽에 기대앉았다.
‘벌써 열흘이 지났나?’
마현은 벽에 기댄 채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이만하면 오늘밤부터 마법 수련에 들어가도 되겠군.’
마법 수련에 들어가도 될 법한 몸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그러는 동안 손정은 끈임 없이 마현을 향해 뭔가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말에 특별한 주제는 없었다.
처음에는 구걸하는 법이나 거지로 살아가야 하는 방법 등으로 시작했지만, 차츰 과거 손정이 겪은 일이나, 소소한 이야기들 또는 풍문으로 들은 것들로 이어졌다.
대부분 손정이 이야기를 하고 마현은 그저 들어 주는 것이 이 둘의 대화 방식이었다.
상대방의 응수가 없으면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가 없을 법도 하건만, 손정은 항상 밝은 얼굴로 재미있게 말을 이끌었다.
“그런데 현아.”
“왜?”
“너는 커서 뭐가 될 거야?”
손정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마현을 쳐다봤다.
“마법사!”
“……?”
“마법사 중에 오로지 전쟁과 전투에만 미친 마법사들이 있어. 바로 흑마법사! 나는 바로 흑마법사가 될 거다!”
“……?”
마현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눈만 껌뻑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손정을 보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내 손정이 마법사를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시 몸이 굳어졌다.
마법사를 모른다는 것은, 이 세상에 마법사가 없다는 뜻이다!
“뭐 잘은 모르겠지만, 엄청 좋은 거겠지?”
손정은 잠시 낯을 찌푸리는 마현을 보며 활짝 웃었다.
마현은 그런 손정에게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 설명해 주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마법사라는 존재를 모르는 이상 그것을 설명하기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너는?”
“나?”
손정은 마현의 질문에 뭐라도 훔쳐 먹다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부끄러운 듯 몸을 꼬았다.
“나는 무림인.”
“무림인?”
손정이 마현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처럼 마현 역시 손정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손정은 금세 그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직 말 안 해준 모양이네.”
손정은 그때부터 자신이 아는 무림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림인들은 단전이라는 곳에 내공을 쌓는대. 그 내공이라는 게 엄청나서 그 힘으로 한 걸음에 강도 건너고, 일 검에 태산도 쪼갠대. 그리고 말이야, 내가 얼마 전 객잔에 구걸 갔을 때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무림인들은…….”
손정은 마치 자신이 무림인이 된 것처럼 손짓 발짓을 해가면서 이야기했다.
마현은 손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한편으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생각대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군. 마법사가 없는 세상이라…….’
마현은 피식 웃으면서 손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믿지 못할 허황된 말들도 많이 섞여 있었지만 손정은 의외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마현은 손정의 말을 나름대로 정리했다.
이곳은 여러 왕국이 존재하는 하르센 대륙과 달리 하나의 통일된 제국이었다.
마법사의 존재는 없다. 다만 어디까지 손정의 말을 믿어야할지 솔직히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확실히 하르센 대륙보다 검에 대해서만큼은 엄청난 발전을 이룬 곳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신기한 것은 하나의 제국 아래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기사들이나 검사들 같은 이들만의 세상이 따로 있었는데, 그것을 무림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무림과 무림인에 관해서는 반역죄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관에서도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제국 안에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자신들이 군림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세상이군.’
마현에게 있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많았지만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이곳은 자신이 살아왔던 하르센 대륙이 아니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자신이 살아오면서 보고 배운 잣대를 이곳에 들이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많은 것을 보려고 하고 신 지식을 늘 갈망하는 마법사이기에 이처럼 쉽게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가자 마현과 손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마지막 구걸을 하고 다리 밑 움막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현은 늘 그래왔듯 손정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하지만 마치 인형처럼 손정을 졸졸 따라다닐 뿐 마현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밤, 흑마법사의 의식을 치른다!’
마현은 서서히 저물어오는 하늘을 보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자정이 되자 어둠이 더욱 짙게 깔렸다.
움막 구석에 눈을 감고 있던 마현이 슬며시 눈을 뜨고 일어났다. 반쯤 떨어져나간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쳐다봤다. 수련하기 가장 좋은 시간대였다.
마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움막을 빠져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움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공동묘지였다.
며칠 전 수련을 위해 미리 알아봐 둔 곳이었다.
아무래도 마법 수련을 하다가 누군가의 눈에 띈다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마현은 공동묘지 안쪽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 한 평 남짓한 공간에 섰다.
“이제 시작이다, 나의 새 흑마법사의 길이.”
마현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 주머니에는 하얀 재가 담겨 있었다.
‘나는 이미 나의 길을 안다.’
처음부터 마법사가 흑마법사와 백마법사로 나눠지는 것은 아니다. 1서클 견습마법사와 2서클 보조마법사일 때는 흑백의 구분이 없다.
하지만 그 단계를 지나 비로소 마법사라 불릴 수 있는 3서클에 올라서면, 그때 자신의 재능에 따라 어둠의 신이나 빛의 신과 교감을 나눠 흑마법사나 백마법사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백마법사나 흑마법사의 길을 걸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처음 시작부터 신과 교감을 나눠 흑마법사나 백마법사의 길을 걷는 것이 후에 3서클에서 신과 교감을 나누는 것보다 유리하다.
하지만 보통 마법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흑마법사와 백마법사는 빛과 어둠처럼 완전히 상반된 길을 걷는다. 자칫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길을 걷게 된다면 최악의 경우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누구라도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안전하게 3서클의 마법사로 올라선 후 자신의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있는 법.
순수하게 마나로만 3서클을 만든 후 어둠의 신이나 빛의 신의 권능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미 만들어 놓은 마나 서클과 신들의 권능이 서로 부딪히며 반발하게 된다.
결국 신들의 권능이 크기 때문에 이미 만들어진 마나가 흡수되지만 그 과정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 따르는 고통도 상당하다. 하지만 그런 체계적인 절차를 밟는다면 적어도 죽지는 않는다.
반면 처음부터 신의 권능을 받아들여 마법 수련을 하게 되면 그런 과정이 완벽히 사라진다. 그리고 처음부터 완벽한 어둠이나 빛의 마나를 모으기 때문에 기초 역시 탄탄해진다.
그런 장단점이 있지만 마법사들은 안전을 우선시해 3서클에서 신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마법의 초창기에는 이런 방법들을 무시하는 마법사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너무 부작용이 많아지자, 지금은 금기시 되는 마법 수련이 되어 버렸다.
과거 마현 역시 3서클에서 어둠의 신 중 군신 아이벤의 권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현은 이미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어둠의 신과 교감을 나눠 그 권능을 받아 처음부터 어둠의 마나로 마법 수련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마현은 품에서 꺼낸 하얀 재를 이용해 땅바닥에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과 선으로 만들어진 기하학적 무늬로 이루어진 마법진이었다. 가장 중앙에는 별과 같은 오망성이 그려졌는데, 그 오망성의 꼭지점이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하고 있었다.
바로 어둠의 신을 향한 오망성의 제5원소인 신성 자리였다.
“휴우…….”
마현은 이마에서 흐르는 구슬땀을 닦으며 허리를 폈다.
꼬박 한식경 동안 정성스럽게 마법진을 그리고 나서야 겨우 작업이 끝난 것이다.
마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마법진 한가운데로 걸어가 반듯하게 누웠다. 마현의 머리는 역(逆)오망성의 제5원소 신성 자리를 향해 있었다. 조용히 누워 양손을 왼쪽 가슴 위로 올려 포개며 기감을 끌어올렸다.
일단 마법진을 가동할 마나를 심장에 모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거의 반시진이 흘렀지만 마현은 마나를 느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