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2화
‘금단 마법의 대가가 마나를 전부 잃어버린 것만이 아니었던가?’
“자, 식기 전에 먹어. 빨리 먹어야 낫지.”
거지 아이는 가까이 다가와 카칸의 손에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카칸은 잠시 거무튀튀한 죽을 내려다보다 숟가락을 움직였다. 일단 먹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목숨과 바꾼 대가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으니까.
죽은 냄새뿐만 아니라 맛도 시큼했다.
아마 이것저것 동냥한 음식 중에 상한 음식이 조금 섞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카칸은 아무렇지 않은 듯 기계적으로 죽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농노의 자식으로 태어나 전쟁 중에 고아가 된 그였다. 이보다 못한 음식도 허다하게 먹었었다.
마지막 한 술까지 박박 긁어 그릇을 말끔히 비운 카칸을 보며 거지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크,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왕초가 오기 전에 일어나야겠다.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 보면 큰일 나거든.”
거지 아이는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이름은 손정이야. 손! 정! 네 이름은 뭐야?”
거지 아이, 손정은 손가락으로 카칸을 가리켰다.
“내 이름은…….”
순간 카칸의 머릿속으로 정리되지 않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마치 기억복제(Memory Copy) 마법을 시전한 것처럼 수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와 흔들었다.
“미, 미안. 아직 아픈 걸 모르고……. 나중에 다 나으면 그때 가르쳐줘.”
손정은 말을 끝내고는 서둘러 움막을 빠져나갔다.
가난한 산골, 서당 훈장의 자식으로 태어나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살아온 기억, 하지만 행복한 기억이었다. 그 행복은 역병이 돌아 아이를 제외한 부모와 형제가 죽는 것으로 끝이 났다.
홀로 살아남은 아이는 배고픔에 지쳐 산을 헤매다가 정체 모를 나물을 뜯어먹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말 그대로 카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어린아이의 단편적인 기억이었다.
카칸은 불길한 예감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움막 밖으로 나갔다.
얼굴을 다리 밑에 흐르는 강물로 가져가 거울삼아 비췄다.
십오륙 세나 되었을까?
강물에는 왜소한 아이가 보였다.
카칸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강가에 주저앉았다.
“크크크, 크하하하하!”
소리 죽여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상처 입은 한 마리 맹수처럼 다리가 떠나가라 포효했다.
“그래야 사신 키디악답지. 고작 내가 가지고 있는 마나로 성이 찰 사신이 아닌 것을 잊고 있었어.”
카칸은 짐짓 호탕하게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막막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칸은 뒤로 벌러덩 누워 멍하니 하늘을 흘러가는 하얀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웃었다.
깨어나 처음으로 웃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이 카칸이 살아남았다.’
카칸의 얼굴에서 웃음이 서서히 걷히며 눈빛도 싸늘하게 변해갔다.
‘하르센 대륙이 아니면 어떻고, 전혀 알 수 없는 녀석의 몸으로 살아남으면 또 어떤가? 하르센 대륙은 찾아가면 그만이고, 이 녀석의 몸으로 다시 흑마법을 익히면 그만인 것을. 아니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으라 했으니 더 잘 된 일인가?’
카칸은 하늘을 향해 손을 올리고는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바로 카칸이라는 것이다!’
카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늘을 향해 양손을 뻗어 올렸다. 그리고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내가 바로 카칸이다!”
* * *
날이 저물어가자 다리 밑 움막 안으로 거지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낡은 움막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카칸을 다들 한 번씩 힐끔거리더니 삼삼오오 모여 시답잖은 농에서부터 오늘 있었던 온갖 일들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카칸의 귀에는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카칸의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떠다녔다.
‘아는 것이 없어.’
이 육체의 원 주인이 가진 기억은 너무나도 단순했다.
어릴 적 산골 생활이 다였다. 그러니 이 낯선 세상에 대해 알 수 있는 내용들이 너무나도 적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야겠군.’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았다. 거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눈을 통해 의외로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알고 난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문제는 이름인데…….’
카칸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발음도 발음이지만 중원이라는 이 낯선 곳은 언어 체계가 완전히 달랐다.
결국 새 이름을 지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카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이가 어느 정도 글은 깨우쳤다는 것이다. 원 주인의 이름 역시 기억 속에 남아 있었지만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카칸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수많은 글자들을 조합해나갔다.
‘마(魔)?’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밀려 올라갔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그 외에 여러 글자가 떠올랐다.
먹 묵(墨), 검을 흑(黑) 등등…….
‘현(玄), 검을 현. 이게 좋겠군. 이제부터 내 이름은 마현인가?’
카칸은 ‘마현’이라는 이름을 연신 중얼거렸다.
의외로 입에 착 달라붙었다. 그리고 이름이 가진 의미도 자신과 너무 잘 어울렸다.
‘일단 몸을 추스른 후 본격적으로 마법 수련에 들어가야겠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수련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수련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해 건강상태가 아주 나쁜데다가 독초까지 먹어 몸이 엉망이었다. 당장 수련에 들어갔다가는 마나를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할 때쯤 손정이 안으로 들어왔다.
“몸도 안 좋은데 왜 일어나 있어?”
손정은 카칸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카칸은 그런 손정을 보며 입을 뗐다.
“내 이름은 마현이다.”
“마현?”
이름에 ‘마’자가 들어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지만, 손정은 이내 활짝 웃어 보였다.
“기억이 돌아왔어? 잘 됐다. 그리고 이름 참 멋있다.”
손정은 엄지손가락을 슬쩍 올려 보였다.
“한 놈도 빠지지 않고 다 돌아왔지?”
그때 20대 초반의 사내가 움막 안으로 들어왔다.
흡사 곰이 연상되는 우람한 체구를 가진 사내가 아마 손정이 말했던 왕초인 모양이었다.
왕초가 안으로 들어서자 삼삼오오 짝을 짓고 있던 아이들은 우르르 일어나 한쪽으로 모였다. 그러자 약삭빠르게 생긴 아이 하나가 얼른 큰 대야와 자그마한 나무바가지를 중앙에 놓았다.
아이들은 익숙한 듯 먹을 것은 큰 대야에, 동전들은 나무바가지에 집어넣었다.
큰 대야에는 음식들이 제법 수북이 쌓였지만 나무바가지에는 동전 몇 닢이 전부였다.
약삭빠르게 생긴 아이는 잽싸게 맛좋아 보이는 음식들을 따로 챙긴 후, 동전들과 함께 왕초 앞에 내밀었다. 왕초는 동전을 품에 넣고는 자신 앞에 놓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큰 대야에 놓인 음식을 마구 비비더니 자신들의 바가지에 덜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손정은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바가지에 음식을 담아왔다.
“자 먹어.”
“고맙다.”
마현은 손정이 내미는 바가지를 건네받고는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웠다.
식사가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왕초는 마현을 쳐다보며 명령조로 말했다.
“내일부터 너도 나가.”
그러자 손정이 왕초 앞으로 허리를 굽실거리며 다가갔다.
“저…… 왕초.”
“왜?”
손정이 주춤거리며 다가오자 왕초는 오만상을 찌푸리는 것도 모자라 눈을 부라렸다.
손정은 움찔거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며칠 더 쉬게 하면 안 되나요?”
손정의 말에 왕초는 더욱 험악하게 인상을 쓰더니 발로 손정의 배를 걷어찼다.
“윽!”
발길질에 배를 맞은 손정은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마현은 그 모습에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
마현은 왕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 새끼가 기분 나쁘게……, 죽고 싶어?”
왕초는 마현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주먹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와, 왕초!”
그때 배를 걷어차이고 나뒹굴었던 손정이 헐레벌떡 뛰어와 왕초의 팔에 매달렸다.
“얘가 몸이 아직 안 나아서 제정신이 아니에요. 왕초도 아시잖아요, 독초 먹고 죽을 고비를 넘긴 거.”
손정은 왕초의 손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너도 죽여주랴?”
왕초는 손정을 거칠게 내던졌다.
“와, 왕초.”
다시 일어나 왕초 앞으로 다가가는 손정의 다리가 무서움에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왕초 앞으로 다가가는 발걸음만은 멈추지 않았다.
“됐어, 나갈게. 나가겠습니다.”
마현은 손정을 말리며 왕초 앞에 똑바로 선 후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왕초는 마현의 눈동자에서 이유 모를 섬뜩함에 오한을 느끼며 살짝 몸을 떨었다.
“퉤!”
왕초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침을 뱉고는 몸을 돌렸다.
“손정, 내일부터 네놈이 데리고 다니며 교육시켜라.”
왕초는 가장 푹신한 자리로 돌아가 벌러덩 누웠다.
“예, 왕초.”
손정은 안도감이 맴도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성격이 지랄 같은 왕초가 웬일로 이렇게 쉽게 일을 끝냈는지는 모르겠지만 큰 사단 없이 끝난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손정은 우두커니 서서 왕초를 여전히 쳐다보는 마현에게 다가가 소맷자락을 끌고 움막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여기저기서 나뭇조각들을 구해와 불을 피웠다.
“춥지?”
손정은 불씨가 붙은 나무 더미를 향해 입으로 연신 바람을 불었다.
“괜찮아.”
마현은 서서히 불이 살아나는 나무 더미를 보며 앉았다.
독초의 기운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움직이고 감정이 급격하게 요동쳐서인지 오한이 느껴졌다.
‘휴우…….’
마현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너무 약한 몸이었다.
‘어찌 보면 무모했나?’
지금 자신은 과거 대흑마법사 카칸이 아니었다. 그저 힘없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힘을 갖추기 전까지는 좀 더 몸을 숙여야겠어.’
손정은 어느새 불을 활활 피우고는 마현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다행이다. 정말 오늘 왕초한테 맞아 죽을 줄 알았거든. 오늘 왕초에게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왜 그렇게 조용히 돌아섰지?”
손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뭇가지로 불덩이를 쑤셨다.
“그나저나 현아. 나 현이라 불러도 되지?”
“마음대로…….”
“몸도 성하지 않은데 내일부터 어떻게 구걸 나가지? 아! 그렇게 하면 되겠다. 불편하겠지만 볕 잘 드는 곳에서 쉬어. 구걸은 내가 할게. 아무래도 혼자 구걸해서 양은 적겠지만 현이, 네가 몸이 아픈 걸 왕초도 아니까 이해해 줄 거야.”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 주지?”
마현은 밖으로 나와서 처음으로 손정의 얼굴을 쳐다봤다.
“치, 친구니까…….”
손정은 고개를 푹 떨어트리며 자신 없는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친구?”
마현의 물음에 손정은 머리를 푹 떨어트리며 반문했다.
“시, 싫어?”
손정은 마현을 흘깃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머리를 다시 숙였다. 마현은 그런 천진한 손정의 모습을 보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친구라…….’
마현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나도 감상적인 단어였다. 그것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왜 나랑 친구가 되고 싶지?”
마현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야 나랑 나이도 비슷하고…….”
손정은 손가락 끝을 꼬물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처지도 비슷하고, 비록 너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나도 너에 대해 아는 것은 없지만, 그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결국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소리다.
하다못해 그럴싸한 포장으로 감싸진 이유라도 댈 법한데 ‘그냥’이란다.
마현은 쓴웃음을 내비치며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그러자 손정이 가까이 다가와 마현의 팔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