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1화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가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렸다.
“크크크, 결국 돌아오는 것은 배신뿐이란 말이냐?”
검은 로브의 사내는 입가로 흐르는 피를 닦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여섯 명의 하얀 로브를 입은 자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시퍼런 눈동자.
무형의 기운이 쏟아진 것도 아니고 살기를 담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 여섯 명의 하얀 로브를 입은 자들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움찔거렸다.
“크하하하하하!”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는 고개를 젖혀 웃음을 터트렸다.
사내의 웃음소리는 마치 맹수 중의 왕, 사자의 포효와도 같았으며, 그를 둘러싼 자들을 쳐다보는 눈빛은 그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 절대자의 눈빛이었다.
군림하는 자만의 오연한 기도와 웃음소리.
단순히 그가 내뿜는 기세에 하얀 로브를 입은 자들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난 것이었다.
“나는 카칸이다! 7서클의 대(大)흑마법사 카칸, 그가 바로 나다!”
카칸이 상처를 입어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자, 하얀 로브를 입은 사내들이 다시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카칸을 둘러싼 그들은 6서클 백마법사들이었다.
마법의 역사상 인간이 익힐 수 있는 마법의 한계는 6서클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7서클은 실현불가능의 경지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 인간이 그것을 깨트렸다.
그가 바로 카칸이었다.
“왜 나를 배신한 거지?”
카칸은 싸늘한 눈빛을 번뜩이며 물었다.
“마신의 추종자는 죽어야 하는 법.”
“마신? 크하하하하.”
카칸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부터 어둠의 신들이 마신이 되었지?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주신 아래 어둠의 신들이 마신이라……. 크크크, 재밌군, 재밌어.”
주신 아래 빛의 신 아레스와 어둠의 신 키야, 두 부신(副神)이 있다. 빛과 어둠을 관장하는 두 부신 아래 여러 종신(從神)들이 존재한다. 이중 백마법사는 빛의 종신들의 힘을, 흑마법사는 어둠의 종신들의 힘을 빌려 본연의 힘으로 재발현시킨다.
카칸은 눈빛에 살기를 띠며 다시 백마법사들을 쳐다봤다.
“다시 묻겠다. 왜 나를 배신했지?”
“어차피 이 자리에 우리 외에 아무도 없으니 말해 주지. 그냥 놔두기에 네놈의 힘이 너무 크다. 아니, 흑마법사라는 존재가 너무 위험하고 강하다. 우리 백마법사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백마법사의 말에 카칸은 피식 비웃음을 입술 틈으로 내뱉었다.
“그래서?”
“이제 어둠의 신들은 마신이 될 것이며, 너희 흑마법사들은 마신을 추종하는 자들이 되어 이 세계에서 추방될 것이다. 바로 우리들의 손에 의해서.”
어둠의 신들을 섬기는 흑마법사는 태생적으로 전투 마법사로 특화가 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하르센 대륙의 100년 전쟁.
그 기나긴 전쟁기간 동안 흑마법사들이 참가한 전투의 비중은 차츰 높아졌다.
방어나 치료 등에 특화된 백마법사들보다 하나라도 적을 더 죽이고 공포로 몰아갈 수 있는 공격 마법에 능한 흑마법사들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주요 변수로 떠올랐다. 당연히 흑마법사들이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 전에는 종신들의 성격을 닮아 흑마법사들은 은거에 치중하는 반면 백마법사들은 세상에 나오기를 좋아했다.
자연스럽게 각 왕국들은 눈에 잘 띄는 백마법사들을 마법사들로 모셔가 좋은 대우와 그에 걸맞은 지위를 주었다. 하지만 100년 전쟁을 치루면서 흑마법사들이 알음알음 그 자리를 차지하며 들어갔다. 흑마법사들은 원치 않았지만 각 왕국에서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제 그만 죽어줘야겠다. 네놈이 살아 있는 한 이 대륙에서 흑마법사 놈들을 깡그리 지워 버리기 힘드니까.”
늙은 마법사의 말이 끝나자 백마법사들은 일제히 살기를 내뿜으며 마나를 일으켰다. 항상 현자를 자처하는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오직 살의만이 보였다. 과연 그들이 백마법사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살기가 짙었다.
“고작 네놈들 여섯이서? 네놈들이 키워 흑마법사의 길로 집어넣은 나를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늙어서 잊은 모양이군. 다시 한 번 알려주지.”
카칸의 몸에서 묵빛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전쟁의 미학, 군신(軍神) 아이벤의 힘을 받은 게 바로 나 카칸이다!”
묵빛 마나에는 살기뿐만 아니라 적의 의욕마저 상실시켜 버리는 투기가 담겨 있었다.
“저 기운에 현혹되지 마라. 이미 저놈의 몸은 독에 중독되어 서 있기도 힘들다!”
늙은 백마법사의 말에 나머지 백마법사들은 일제히 카칸을 향해 공격 마법을 퍼부었다. 그와 동시에 카칸도 여섯 백마법사들을 향해 공격 마법을 날렸다.
독과 암습으로 인해 중상을 입은 카칸은 이미 힘의 태반을 잃었다. 지금은 그들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카칸의 공격 마법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백마법사들의 공격에 묻혀 버렸다.
비록 백마법사들의 공격 마법의 위력이 흑마법사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해도, 카칸을 공격하는 여섯 명의 백마법사들은 하나같이 6서클이었다.
콰과과과광―!
지독한 화염이 카칸이 서 있던 장소를 덮쳤다.
죽음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백마법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화염 속에서 카칸의 차가운 눈빛은 터질 듯 폭사되는 살기로 번뜩였다.
“불사의 금단 마법으로 다시 네놈들 앞에 설 것이다. 그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말이다!”
카칸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카칸의 힘의 원천이 군신 아이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죽음을 관장하는 사신(死神), 키디악의 힘을 이어받은 것을 그들은 결코 알지 못했다.
카칸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언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고통에 그의 몸은 파르르 떨리고 온몸의 힘줄이란 힘줄은 터질 듯 불룩 솟아올랐다. 지독한 고통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의 주문은 끝나지 않았다.
고통에 비명이라도, 아니 신음이라도 흘릴 법하건만 카칸은 독기 어린 눈동자로 살기를 삼키며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그의 주문이 멎었다.
그와 동시에 묵빛 마나가 카칸의 몸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기다려라. 나는 죽음마저 거슬러 다시 태어나 너희들의 목숨을 거두겠다!”
번쩍!
순간, 검은 빛이 번쩍이더니 카칸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주인을 잃은 검은 로브 조각이 땅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콰과과과광!
카칸이 서 있던 장소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 * *
“크으으으……!”
온몸이 끊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카칸은 정신을 차렸다.
‘금단 마법의 대가가 고통인가?’
카칸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마법이었지만 이 마법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카칸은 이 고통이 금단의 마법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짚어보았다.
‘아닐 것이다.’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연의 순리인 죽음마저 거스른 불사회생(不死回生)의 마법이다.
‘그런 마법의 대가가 고작 고통일 리가 없다.’
카칸은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몸을 추스르기 위해 심장을 둘러싼 일곱 개의 마나 서클에 집중했다.
‘헉!’
고통에, 혼미한 정신에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던 카칸은 터질 듯 눈을 부릅뜨며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크윽!”
몸을 갑자기 일으켜서인지 온몸이 갈가리 찢어질 듯한 고통에 파르르 떨었다.
고작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 없다!’
자신의 모든 것.
삶의 모든 것인 일곱 개의 마나 서클이 없었다.
몸의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크게 다가왔다.
“으아아아아!”
카칸이 온전한 정신이었다면 이를 악물고, 그것도 안 되면 혀를 꽉 깨물고서라도 버텼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몸도 많이 쇠약해져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혼미한 상황이었다.
“괘, 괜찮아?”
그때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충격에 다시 아득해지는 정신으로 인해 그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변성기가 채 가시지 않은 앳된 목소리였다.
‘어린아이?’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카칸은 다시 혼절했다.
얼마 동안 정신을 잃었을까.
카칸은 고통 속에서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좀 들어?”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지만 카칸은 흐린 시야로 지붕만 멍하니 쳐다봤다.
다시 마나를 일으켜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일곱 개의 서클도, 심지어 몸 안에 흩어져 있는 마나조차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내 입술 끝이 말리며 실소가 흘러나왔다.
“후후후. 죽음을 벗어난 대가가 마나라……, 어찌 보면 싸게 먹혔군.”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카칸은 곧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났다.
여유롭게 나직한 웃음을 토해낸 카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입술을 한일(一)자로 굳게 다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동시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뜻.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기다려라, 빌어먹을 여섯 늙은이들!’
일단 몸을 추슬러야 한다는 생각에 상체를 일으켰다.
뼈마디가 부서질 것만 같은 고통이 뒷골을 타고 올라와 머리를 쿡쿡 찔렀다.
고통에 신음 한 번 흘릴 법한데, 카칸은 눈살만 찌푸릴 뿐이었다.
“안 돼, 무리하지 마.”
그때 낯선 손길이 느껴졌다.
그제야 카칸은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웬 낯선 아이가 자신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서툰 손길로 자신이 벽에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조금 몸이 편해지자 카칸은 그 아이를 좀 더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넝마보다 못한 찢어지고 헤어진 지저분한 옷.
그 사이사이에 들어난 맨살 역시 오랜 시간 씻지 않아 검은 때가 꼬질꼬질 붙어 있었다.
거지 아이였다.
힘없는 아이가 거지로 산다는 것은 세상 풍파를 홀로 겪는다는 뜻이다. 그런 거센 풍파를 겪었을 텐데도 아이의 눈동자는 맑았다. 심성이 곧고 맑다는 뜻이다.
“이거라도 한 술 떠.”
아이는 나무바가지에 담긴 거무죽죽한 죽을 카칸 앞에 내밀었다.
카칸은 재료를 알 수 없는 죽을 받아들었다.
시큼한 냄새가 났다.
아마 구걸로 얻은 각종 음식들을 한데 모아 끓인 모양이었다.
죽을 받아든 카칸은 죽 속에 담긴 숟가락을 들려다가 몸이 굳었다.
죽을 내려다보는 카칸의 눈동자는 파르르 떨렸다.
처음 듣는 언어.
하르센 대륙의 언어는 대륙 공통어 하나뿐이다.
물론 각 왕국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뿌리는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거지 아이가 하는 말은 대륙 공통어가 아니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이상하다.
처음 듣는 언어인데 알아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카칸에게 있어서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는 성도(成都)이지.”
“성도?”
“그래, 성도! 사천성 성도(省都)인 성도(成都)!”
거지 아이의 말에 카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사천성은 어디 있는 곳이지?”
카칸의 말에 거지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중원에 사천성이 있지.”
“중원은 어디에 있는 것이지?”
“중원이 어디에 있긴, 이 세상의 중심이자 황제 폐하께서 다스리는 곳이잖아.”
거지 아이의 말이 거듭될수록 카칸의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럼 여기는 하르센 대륙이 아니라는 말인가?”
카칸의 말에 이번에는 거지 아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휴우…….”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독초를 먹은 것이 잘못되었나 보다. 하지만 괜찮을 거야. 그리 독한 독초가 아니라고 했으니까, 이내 제정신을 차릴 수 있을 거야.”
거지 아이의 말에 카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동시에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