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31)화 (131/131)

131화

벤자민에게 있어 그레이스는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었다.

펠튼 공작가를 따르는 가문은 많았지만, 펠튼 공작가의 핏줄은 벤자민 펠튼 혼자였다.

친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있었으나, 그렇게 많지 않았다.

설령 그레이스가 자신과 보내온 1년간의 세월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벤자민은 상관없었다.

그녀가 예전과 사뭇 다른 취향을 보이더라도, 좋아하던 것을 떠올리지 못하고 가끔은 낯선 존재처럼 보이더라도 벤자민은 그녀가 행복하다면 상관없었다.

그는 그레이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오랜 시절부터 그녀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레이스가 벤자민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레이스가 이 세상 속에서 전처럼 웃으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정말 무엇이든지 말이다.

그러나, 그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선택했던 것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자 그는 제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벤자민이 펠튼 공작의 자리를 물려받을 때, 그는 완벽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미숙한 청년에게 주어진 것은 부모님의 부고와 함께 급하게 물려받은 공작위와…….

“…….”

제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뿐이었다.

⋆★⋆

‘주, 죽을 거 같다.’

그레이스는 살기 위해 벤자민에게 일부분의 진실을 말하는 걸 택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긴 침묵을 불러왔으며 그레이스는 숨 막혀 죽을 거 같았다.

저택까지 도달하는 마차에서는 정말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돈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이번이 역대급으로 견디기 힘들었다고 그녀는 자신할 수 있었다.

‘오늘은 걷기 운동하지 말고 저택에 박혀 있어야지.’

그래, 이렇게 된 거 다른 것 좀 알아볼까…… 하고 고민하던 중, 마차가 공작저에 도달하자 벤자민이 내리며 말했다.

“제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부인?”

“……?”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낯이 된 그레이스를 벤자민은 능숙하게 에스코트하여 마차에서 내리게 도와주었다.

“저에게 이러한 걸 이제까지 숨긴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당신께서 제가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게 있을 테니까요.”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말에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다.

벤자민이 그 후 어찌 행동할지 가늠이 가지 않아 비밀로 한 게 맞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

협조는 기쁜 일이었으나, 그가 현재 어떤 심정인지는 전부 배제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울음을 삼키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신경 쓰였다.

“각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여기서는 괜찮다고 하는 게 나은 답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괜찮지 않다는 의미였다.

“각하.”

그레이스가 채근하듯이 벤자민을 다시 부르자 그는 피곤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리 괜찮지는 않습니다. 제가 부인을 위해서 했다고 생각한 일이 그리 좋은 결과를 보이지 않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

“그래도, 부인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으니 이제 그런 무의미한 짓은 하지 않겠군요. 앞으로 사제들은 부르지 않겠습니다.”

“그, 그거에 관한 말인데요.”

그레이스는 다급하게 벤자민의 옷소매를 잡았다.

“제도의 신전에 알아봐야 할 게 있어서, 이번에 방문할 때 각하께서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

벤자민은 미묘한 얼굴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평소 타인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감정을 잘 읽는 그레이스였건만, 이번에는 도무지 알 겨를이 없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 아니, 무엇을 도와드리면 됩니까?”

“저는 신전 내부 깊은 곳을 알아보고 싶은데 사람이 많으면 한계가 있어서요. 각하께서 주변 사제들의 눈길을 돌려주실 수 있을까요?”

벤자민쯤 되는 인물이라면 일개 사제가 아니라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 대접할 터였다. 그들이라도 몇 명 붙잡아 주면 그레이스는 감사할 노릇이었다.

“사실 부인께서 그런 곳에 간다는 것 자체가 저는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만…….”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심정이 백번은 이해되었기에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곳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보내 주는가, 심지어 그레이스는 신전 내부 지리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다.

‘소설 속에서 이상하리만치 세세하게 신전 내부에 대해 묘사하긴 했지만 내가 그걸 다 외운 것도 아니고.’

이럴 줄 알았으면 구조에 대한 설명이 나왔을 때 열심히 읽을걸. 그레이스는 늦은 후회를 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냥 터트려 버리면 될 테니 알겠습니다.”

“……?”

“그리고 그들의 눈을 돌리는 건 제법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만간 앙글레즈 자작가에 연통을 넣어야겠군요.”

‘거기에는 왜요?’

하지만 물어본다고 해서 벤자민이 자세히 말해 줄 거 같지는 않았다. 사실 알게 되면 너무 신경 쓰여 다른 일은 하지 못할 것 같았기에, 그레이스는 묻지 않았다.

‘아직 처벌을 제대로 하지 않았나 보지 뭐…….’

그레이스는 이 정도쯤으로 결론짓고 끄덕였다.

“그리고 또…….”

‘또 있어?’

“혹시 모르니 그날을 위한 마도구 몇 개는 구비해 두어야겠습니다. 뒤탈이 없어야 하니, 무소속 마도구사들에게 문의해 보도록 하죠.”

‘혹시 마도구사랑 신전이 연합하고 있을 수 있다는 거,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무소속 마도구사는 이번에 만났고, 마도구 연합은 설립 당시부터 펠튼 공작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둘 중 무소속 마도구사를 선택했다는 건 벤자민은 마도구 연합에서 정보가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마도구 연합은 공식 시설이니, 사람의 이목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긴 하겠어.’

“부인께서 저에게 더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부인께 그렇듯이.”

벤자민이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그레이스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는 울음을 삼키느라 약간 붉어진 눈을 휘며 웃었다.

“그래도, 저에게는 부인뿐이라는 것만큼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

“앞으로는 정말 당신에게 필요한 것인지 여쭈어볼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후에 믿음이 간다면, 그때 전부 말씀해 주십시오.”

그전까지는 이유를 묻지 않고 그레이스의 부탁을 전부 들어주겠다는 의미였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는 시늉만 하고 물러섰다.

평소에는 벤자민이 그레이스가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으나, 오늘은 반대였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본관에 들어가 모습을 완전히 감출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9번…….’

벤자민이 본관으로 들어가며 뒤돌아본 횟수였다. 그는 본관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뒤돌아 그레이스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며 염려를 담은 미소를 보내왔다.

그러며 입 모양으로 ‘그만 들어가십시오.’라고 말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대체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다…….’

진작에 말하는 게 좋았을까? 그레이스는 그리 생각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까지 해 온 것이 있었기에, 이런 결과가 있던 것이다. 그녀는 나쁜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하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기분 나쁜 안개가 중간중간 느껴지는 별관이었다.

‘떠나기 전, 가급적 많은 안개를 없애자.’

기억이 돌아오면 그만큼 힘이 강력해진다. 그것은 이제 확실했다. 신전에 들어가기 전, 그녀가 가진 힘을 키워 두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힘으로 치울 수 있는 게…….’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레이스의 신성력으로 지금 당장 치울 수 있는 안개는 존재하지 않았다. 안개를 해치우는 것 외에 제가 가진 신성력을 키우는 방법을 모르는 그레이스는 심히 난처했다.

“……아!”

그러다 불현듯 그녀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그 약!’

그 약에 신성력을 보조하는 기능이 있었다.

그걸 섭취하면 비약적인 성장은 없다고 해도, 어느 정도 그녀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그레이스는 그 사실을 깨닫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갔다.

버리기 전에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먹지 않고 모아 둔 탓에, 제법 양이 많았다.

‘분명 그 알약의 모양이 이거였어.’

어차피 사제들도 섭취하는 약이라면 그리 유해한 성분이 아닐 것이다.

그레이스는 그 약을 몇 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효능을 보려면 조금 시간이 걸려, 방 협탁에 둔 장부 사본을 펼쳤다.

‘다음은, 별관 티 룸으로 가 볼까.’

다음 계획을 세우던 중, 그레이스는 협탁 서랍 속에 넣어 둔 빛을 잃은 펜듈럼을 발견했다.

마도구 연합 건물에 다녀온 후 빛을 잃고 다시 밝아지지 않았다. 빛을 잃고 나니 안개를 물리치지도 못했다.

그레이스는 장부 사본을 안에 다시 넣고, 그 펜듈럼을 손에 쥐었다.

“다시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꽤 편리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레이스가 다시 쓰고 싶은 아쉬운 마음에 고민하다가 불현듯, 내가 여기에 힘을 불어넣으면 빛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변덕과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꽤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는 손에 들린 펜듈럼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점점 펜듈럼에 변화가 일어났다.

“……어?”

펜듈럼에는 청록색의 빛이 감돌며, 이제까지 보았던 펜듈럼 중 가장 찬란한 형태를 보였다.

“이런 모습은 본 적 없는데?”

처음 받은 건 황금색, 그다음은 하늘색 그리고 이번에는 청록색.

이것은 그레이스의 눈동자 색을 닮아 있었다.

이 힘은 정말 제 눈 색을 닮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리아가 준 것이 금색인 이유는 아리아의 힘이 실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그녀에게 그러한 설명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아리아가 깜빡했나?’

보리스의 펜듈럼이 품고 있던 빛을 떠올리며 그레이스는 펜듈럼을 꽉 쥐었다.

‘푸른색.’

보리스의 눈 또한 푸른색이었으나, 그녀는 어쩐지 그것이 같은 색 같지는 않았다.

【계속 SR】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