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벤자민의 말에 내부가 술렁거렸다.
‘뭐야? 왜?’
그레이스는 그들의 반응에 의아해졌다.
마탑, 그곳은 마법사라면 필수적으로 소속된다. 애초에 마도구사라는 직업과 달리 마법사라고 불리는 이들이 다루는 마법은 모두가 쓸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마법사는 더욱 보기 힘들어졌다.
이는 마법사가 귀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법은 전투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평화로워졌으며 마법사들의 순수 마법보다는 마도구사들이 만든 마도구가 각광받았다.
그렇기에 소설에서도, 그레이스의 기억 속에서도 그들의 비중은 한없이 낮았다.
“마탑에서 마도구사를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마법사들이 마도구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건 우리 모두가 압니다.”
앤드류가 침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맞아. 그랬지.’
마도구사는 마법사가 되고 싶지만 마력이 적은 이들이 되는 직업이란 인식이 있었다. 애초에 마도구는 고대의 아티팩트를 흉내 내었다는 말도 마법사 사이에선 존재하였기에 마법사들 중 마도구사를 좋아하는 이가 적다 못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탑이 마도구사를 받아 준다면 꽤 편안할 텐데.’
마탑은 예전만큼의 위신은 아니더라도, 역사가 마도구 연합보다 깊은 만큼 힘이 있었다.
그런 마탑의 비호 아래 들어간다면 마도구 연합의 견제와 핍박에서 안전할 것이다.
‘게다가 마탑은 특성상 연구비로 사기 치지 않을 테니까.’
그들의 연구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은 정평 나 있었다.
“마탑은 해를 거듭할수록 후원자의 수가 줄고 있네. 왜인지 아나?”
모두 답을 알고 있으나 함부로 대답하긴 껄끄러웠다. 그레이스가 대신 말했다.
“그건 제국이 평화로워지고 있어 순수 마법에 대한 필요성을 덜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요?”
“예, 맞습니다. 그리고 마법사를 기용하는 것보다 마도구를 기용하는 게 더 저렴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벤자민은 방긋 웃으며 마도구의 단가를 맞추기 위해 국가적으로 노력했다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하여 나는 지난번 황실에서 열린 의회에 마탑을 후원하는 건에 대하여 건의했네. 황실뿐 아니라 여타 귀족들의 후원이 필요하다고. 원래 안전할수록 더욱 대비해야 하는 법이니.”
북부의 마수들과 매번 대치하는 펠튼 공작의 발언이었기에 안건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그것이 통과되었다고요?”
앤드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통과가 안 된다면 통과되게 만들어야지. 걱정 말게, 아주 합법적인 방법일 테니까.”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법을 어기면 선례로 남아, 무고한 피해자가 생긴다고 한 발언이 떠올랐다.
‘그래서 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조지는 건가.’
매우 무례한 추측이었지만, 어쩐지 그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제안할 것이네. 펠튼 공작령으로 매해 일정 수의 마법사를 발령해 달라고 말이야.”
마법사들이 아무리 마법을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학자적 특성이 뚜렷하더라도 돈은 필요했다.
그러니 그들에게 고정적으로 취업을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준다면 호감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마탑이 펠튼 공작님의 도움을 받을까요?”
다만, 그것이 벤자민 펠튼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는 마도구 연합의 최대 주주이자 사실상 최고 권위자였으니 마법사들이 미묘하게 꺼릴 게 분명했다.
‘하긴, 그게 문제긴 하지.’
그레이스가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벤자민은 아주 태연하게 답했다.
“마정석을 얻지 못하게 하면 그들도 나의 제안을 받지 않겠는가?”
“……네?”
그레이스는 그의 답에 귀를 의심했다.
“가, 각하? 그건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건가요?”
“음, 정당한 이유 없이 판매를 거부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다른 곳에 물건을 파느라 재고가 없어 못 파는 건 문제없지 않습니까?”
“…….”
‘미쳤나…….’
산뜻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벤자민을 보니 그레이스는 그전까지 있던 아련한 감정이 저 멀리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부인께서는 좋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저요? 갑자기요?”
“네, 갑자기 물어보는 것이니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아무런 의견이 없으셔도 말입니다.”
“……음.”
갑자기 이렇게 물어봐도 말이지. 그레이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다가, 앞을 보았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이젠 자신에게 쏠린 게 느껴졌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그레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슬슬 벤자민의 뒤쪽으로 숨어들었다.
“어떠십니까?”
“저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말하려던 찰나, 벤자민의 망토에 그려진 가문의 문양이 보였다.
“지, 진짜 쓸데없는 생각인데요. 마탑에 아예 소속되기보다는, 마탑의 문양을 빌려 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조금 더 상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레이스가 슬쩍 고개를 내밀고, 쭈뼛쭈뼛 벤자민의 옆에 섰다.
“마도구 연합의 물건이 잘 팔리는 이유가, 검증이 된 물건이라서잖아요. 그렇다면 마탑의 검증이 완료되었다는 의미로 마탑의 문양을 붙이는 거예요. 문양을 빌리는 대가로 매출의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요.”
“그것을 오용할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하십니까?”
“마탑의 마법사들은 상인이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까우니, 자신들의 문양을 달고 판매될 마도구의 검증을 꼼꼼하게 할 거예요.”
원래 꼬장꼬장한 학자들은 잇속에 밝지 못하다. 그래서 마도구사들도 마법사들이 과연 벤자민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우려하는 것이다.
“그럼 그로 인해 마도구 연합의 물건이 팔리지 않을 가능성은요?”
“마탑은 역사만큼 신뢰도가 쌓였지만, 마도구 연합 역시 마도구사로서의 신뢰가 있어요. 그러니 그들과 정면 승부하기보다는 그들이 만들지 않는 상품으로 승부를 보는 편이 낫지요.”
그리고 겹친들 어떤가, 차라리 그러는 것이 서로의 발전에 이로울 것이다. 자고로 경쟁이란 발전의 발판이다.
“그러면 후에 마탑이 마도구 연합처럼 변질될 가능성은 없다고 보십니까?”
벤자민은 준비되지 않은 그레이스에게 이상하게 질문이 많았다.
그레이스는 의아해하면서도 착실하게 답했다.
“마탑의 마도구가 잘 팔리기 시작하면 제가 보기엔 다른 곳에서도 마도구를 만들기 시작할 거라고 봐요. 다른 문양이 찍힌 걸로요. 유일한 것이 아니게 되었으니까요.”
“흠…….”
벤자민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하다가 웃었다.
“제삼의 문양이라면 일단은 샤를 후작가가 좋겠군요. 거기가 마정석을 운용할 자금이 있으니 말입니다.”
“각하, 마치 이미 준비되었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설마요. 아닙니다. 다만 복부 토벌대에 마법사를 많이 기용하면 이상하게 다음 해 마수가 더 강해져 영 선호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애초에 진짜 기용할 생각이 없었던 거 아니야?’
그레이스에게 자연스럽게 의견을 묻고 곧장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니, 어째 그런 것 같았다.
‘에이, 설마…….’
그녀가 어떤 의견을 내놓을 줄 알고 저런 미친 도박을 하는가. 그레이스는 아주 미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마도구 연합은 아마 향후 2년간은 실적이 영 시원찮을 겁니다. 황실에서 감사가 들어갈 것이며, 저도 앞으로 2년간은 게이트를 제외한 곳에는 투자를 끊을 예정이기 때문이죠.”
“그, 그래도 되나요?”
“어쩌면 몇 년 더 늘어날지도 모릅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게이트에 관련된 마도구사를 따로 뽑아 관리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게이트로 얻는 수익은 거의 다 펠튼 공작가로 들어감에도 그것을 제외한 수익도 무시하지 못할 금액이었다.
‘그래도 마도구 연합의 규모를 생각해 보면 그 정도 금액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네.’
그레이스는 너무 번쩍거려 촌스러울 정도였던 연합 내부를 떠올렸다.
“게이트의 투자금을 회수하면 그건 제국 안팎으로 문제일 테니까요.”
“네, 그렇겠죠.”
그레이스가 수긍하자 앤드류가 물었다.
“그렇지만 공작 각하, 공작 부인께서 떠올려 주신 제안도 좋지만 마탑이 과연 그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그들은 마도구사를 싫어하잖습니까.”
“음, 처음에는 거절하겠지만 나중에는 승낙할 겁니다. 그들이 꺼리는 건 마도구사인 거니까요.”
“……? 아!”
마법사가 마도구사를 꺼리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보다 못났음에도 이젠 각광받는 직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종의 피해 의식도 존재했다.
그러자고 자신들이 마도구를 만들자니 마법사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마도구를 만들기 위한 인원을 모집하기에도 격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도구는 당연히 연합에서만 만든다는 꽉 막힌 사고도 한몫했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전적으로 연합의 탓이니, 펠튼 공작가가 대신하여 가급적 유리한 계약서를 받아 오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마도구사들은 그제야 희망이 보이는 듯 눈을 빛냈다.
앤드류는 쭈뼛쭈뼛 그레이스에게 다가갔다.
“부인, 저의 일방적인 요청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일전에 말씀드린 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린 것?”
벤자민이 의아한 눈으로 그레이스와 앤드류를 번갈아 보았다.
그레이스는 벤자민에게 이걸 어떻게 숨겨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했다.
‘아냐, 그냥 같이 듣자.’
어차피 계속 숨길 수도 없고, 오히려 숨기는 것이 걱정을 살 일이었다. 애초에 숨길 이유도 없으니까.
‘약이나 가구에 대한 것만 숨기면 되니까.’
응, 그러면 될 거야. 그레이스는 끄덕이며 벤자민에게 말했다.
“사실 앤드류가 그 고아원 원장이 날 저격한 이유를 안다고 했거든요.”
“아, 그래서 그걸로 거래하려고 온 겁니까?”
벤자민은 산뜻하게 웃었지만 누가 봐도 기분이 상해 보였다.
“괘! 괜찮아요! 각하, 저는 괜찮아요!”
“……저는, 하……, 아닙니다. 네.”
“그러니까 각하도 같이 들으러 가면 좋겠어요. 오늘까지 안 말한 건 죄송해요.”
“아뇨, 그때는 제가 들을 상태도 아니지 않았습니까.”
그레이스가 사과하자 바로 누그러든 벤자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저도 같이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