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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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오늘은 별관에 가는 대신 본관에 있는 제 방에 머무르기로 했다. 오늘 같은 기분으로는 별관의 갑갑함을 견딜 수 없을뿐더러, 벤자민을 홀로 두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물론 같은 건물 내에 있다고 해서 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평소라면 그레이스와 어떻게든 붙어 있으려고 했던 벤자민은 그 이후로 감감무소식이었다.
“돼, 됐어. 나라고 일이 없는 줄 아나.”
그레이스는 괜히 강한 소리를 뱉었다. 벤자민의 겁에 질린 얼굴이 잊히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다고 계속 떠올리고 있어도 그를 찾아갈 수 없었기에 그녀는 다른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갔다가 거부당하면 어떡해.’
그러면 진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버릴 터였다. 겨우 쌓아 올린 행복이란 감정은 한순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무너질 수 있는 유약한 것이다.
“일단 신문부터 보자.”
마도구 연합에 들어가기 전 구매해 마차에 넣어 둔 것이다. 소년이 팔던 신문을 하나씩 다 사 온 듯 양이 꽤 많았다.
그레이스는 혹시 여기에 자신에 관한 내용이 없나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그러나 ‘펠튼 공작 부인’에 대한 추문은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나마 그레이스라는 이름이 보이긴 하지만, 내가 아니라 보석에 관한 거고.’
원래 그레이스가 이렇게까지 존재감이 없었던가? 물론 소설에서는 실제로 등장한 적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잡지만 펴면 펠튼 공작 부인에 대한 비난이 적혀 있었다고 했는걸.’
생각해 보면 기이할 노릇이었다. 원래의 그레이스는 우울감을 이기지 못해 외출을 하지 않았다.
보통 추문이라는 것은 무언가 행동을 해야 쌓일 텐데, 그레이스 본인은 물론 주변도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 그냥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이 공작 부인 자리를 꿰차서 마음에 안 들었던 건가?’
합리적 의심을 마친 그레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기우였나…….”
뜨문뜨문 그녀에게 원장에 대한 운을 띄우는 이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슬슬 잡지에 펠튼 공작 부인에 관한 추문이 실렸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제야 펼쳐 본 신문에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도 없지?’
그냥 그녀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진짜 단 한 문장도 없었다. 펠튼 공작에 관한 글은 짧게나마 쓰여 있었는데 말이다.
“…….”
분명히 그녀에 대한 악담이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태풍의 눈 속에 던져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 차려.”
그레이스는 중얼거렸다. 이런 불안감에 잡혀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챙겨야 할 게 많았다.
벤자민의 겁에 질린, 상처 입은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이 무거웠다.
결국 그 또한 자신처럼 홀로 견뎌 온 시간이 많았음을 여실히 깨닫고 있었다.
더 이상 그 누구의 상처와 고독을 늘리지 않으려면, 아프더라도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스는 집사를 불러 말했다.
“각하께서 오늘 많이 피곤하셨을 테니 밀크티를 한 잔 보내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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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후로 그레이스는 벤자민을 볼 수 없었다.
집사에게 물어보아도 외출을 했거나 황궁에 갔다는 답만 들릴 뿐,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놓고 피하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빈 시간 동안 별관의 정화 작업을 할까 했지만 그만뒀다.
‘그랬다가 또 쓰러지면 분위기만 험악해질라.’
만약 저번처럼 쓰러진다면 벤자민의 성격상 그레이스의 외출을 잠시 금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레이스가 건강하고 자유롭게 다니길 바라기도 하였으나, 그만큼 그레이스의 건강과 안전에 유의했다.
그렇게 벤자민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마도사들의 은신처를 찾아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앞에서 태연하게 웃어 보이는 벤자민을 미묘하게 바라보았다.
‘이것마저도 서신으로 약속 잡은 거였지.’
정말로 그를 직접 마주칠 일이 없었다.
“한동안 바빠 못 뵈었는데, 건강해 보이셔서 기쁩니다.”
“며칠 안 되었는걸요.”
“사람은 어느 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겁니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조금은 살벌한 말을 뱉으며 그레이스를 마차로 에스코트했다.
그녀가 계단을 밟을 때 무언가 발견한 그는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왜 그러세요?”
“아, 별거 아닙니다. 그저 부인께서 제가 드린 구두를 신고 계신 것이 기뻐서요.”
별것 아니라고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면, 별거인 듯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실까 걱정했거든요.”
“정말 편해요. 이제까지 신은 것 중에서 제일요.”
디자인도 적당히 깔끔하고 장식이 달려 있어 그레이스가 가지고 있는 드레스들과 매치하기 쉬웠다. 벤자민은 이것까지 고려한 것 같았다.
“다행이군요.”
벤자민이 앉자 마차가 출발했다.
“혹시 모르니 마차를 타고 제도를 돌아다닐 예정입니다. 공작가를 주시하고 있는 감시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버킨 같은 사례도 있었으니 납득했다. 무엇이 목표이든 간에 둘의 뒤를 쫓는 이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보다 그날 일은 전부 없었던 척하려는 건가?’
그레이스도 꺼내기 껄끄러운 주제였기에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가 걱정되었다.
벤자민의 속은 어떨지 신경 쓰였다.
‘하지만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
어떻게 말하든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테니, 일단 다른 문제부터 차근차근 되짚기로 했다.
벤자민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내심 어색하긴 했는지 마차가 멈춰 서 우리가 내릴 때까지 침묵만이 돌았다.
마차에서 내린 뒤 벤자민이 말 한 필을 이끌고 왔다.
“두 마리는 너무 눈에 띌 거 같아 한 마리를 같이 탈까 합니다만, 불편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괜찮아요.”
솔직히 그레이스는 둘이서 같이 타는 것도 눈에 띄지 않나 싶었으나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고 싶진 않았다.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말에 태우고 뒤에 따라 타자, 그녀는 전에 마도구사에게서 받은 위치 추적 마도구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신기하군요.”
마도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동하며 벤자민이 말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만든 거래요. 대단하죠?”
“예, 이런 것이 세상 밖에 나오지 못한 것이 통탄스럽습니다.”
“각하께서는 몰랐잖아요.”
그는 그 말에 길게 침묵하다가 말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
“확신이라기보단, 그러지 않을까쯤이 옳겠군요.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격은 없었습니다.”
“왜요?”
“펠튼 공작가는 황제 다음가는 권위를 지녔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곤 합니다.”
그레이스는 그의 말에 내심 뜨끔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법에 묶여 있습니다. 정말 권력을 믿고 마음대로 행동하면 저는 그나마 지킬 수 있던 것도 지킬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허점이 많은 법이더라도, 그 법으로 보호를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무사히 지나가더라도, 저라는 선례가 생기면 이제 그 선례를 악용하는 자들로 인해 피해 입는 이들이 생기겠죠.”
펠튼 공작가야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강한 힘을 가진 이들 또한 법을 어겨도 잘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래도 된다.’는 인식이 생긴다.
선례는 허점을 만들고 피해자를 만들었다.
“그럼 이번에는 움직일 수 있는 이유가 생겼나요?”
“예, 진짜 피해자가 제 앞에 나타났으며 마도구 연합이 부정한 짓을 저질러 왔다는 증거가 있잖습니까. 그 정도 일을 벌였다면 다른 죄도 저질렀겠지요.”
그레이스는 숨겨진 공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그걸 어떻게 찾았는지는 물어보지 않겠습니다. 말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말하지 않는 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신성력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차마 벤자민에게 ‘내가 성녀급의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데, 신전이 날 죽이려고 하고 마도구 연합이 연관되어 있어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뚜렷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벤자민이 먼저 내린 뒤, 그레이스를 내려 주었다.
“하지만, 언젠가 말씀하시고 싶으면 말해 주세요. 저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래 보여도 기다리는 건 누구보다 잘하니 말입니다.”
벤자민이 설핏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무언가를 숨기는 서글픈 자의 것이다.
“각하께선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나요?”
“저요?”
그는 또 습관처럼 없다고 말하려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왜요?”
“용기가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다가가는 건 못하고 기다리는 것만 잘하나 봅니다.”
그가 힘없이 웃었다.
“그런 제 옆에 당신께서 있어 주시니 전 천운이 따르는 사내인가 봅니다.”
그러며 벤자민이 손을 내밀었다.
“자, 들어가실까요?”
벤자민과 함께 건물 내부로 들어가니 외부보다 낡고 후미진 상태를 볼 수 있었다.
“역시 이쪽은 상태가 좋지 않군요.”
제도의 어둠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레이스가 아무 말 안 하고 눈을 찡그리고 있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붕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지 않나요?”
“……!”
“그건 그러네만.”
전에 만났던 마도구사였다. 그레이스는 깜짝 놀랐지만, 벤자민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펠튼 공작께서는 역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아무래도 느껴졌으니 말이네.”
벤자민이 쓰게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하는 손을 내밀었다.
“벤자민 펠튼이네.”
마도구사는 그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잡지 않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앤드류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가 둘을 이끌고 간 곳은 건물의 지하였다. 사다리까지 타고 내려가, 구불구불 이어진 길로 들어가자 방이 나왔는데, 그 안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들이 전부인가?”
“여기 있는 사람은요.”
‘더 있다는 거구나.’
그레이스는 앤드류의 말뜻을 이해했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참을 말한 것도 아니었다.
자리에 있는 마도구사들은 어쩐지 모두 지쳐 보였고, 펠튼 공작 부부를 향해 모호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펠튼 공작님께서 공작 부인을 따라오셨다는 것은 저희를 도와줄 의향이 있다는 것이겠죠?”
“그래, 그대들은 이걸 거래하려고 한 것 같지만 말이야.”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에스코트하던 손을 떨어트리고 저벅저벅 앞으로 나아가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마탑에 당신들을 받아 달라 부탁할 예정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