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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27)화 (127/131)
  • 127화

    ⋆★⋆

    ‘아, 이렇게 크게 터질 줄은 몰랐는데.’

    그레이스가 콜록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소리가 컸고, 주변이 초토화되었으나 당연하게도 그녀는 다치지 않았다.

    의심을 방지하기 위해 드레스나 머리카락 끝을 상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레이스는 여기까지 숨어 들어온 마도구사에게 도서관의 비밀 공간을 기점으로 공간 일부를 손상시킬 수 있냐고 물었다.

    ‘실력이 좋은 거 같긴 했는데, 생각보다도 더 좋았어.’

    그 마도구사는 도서관에 있는 마도구를 순식간에 찾아내, 전부 최대 출력으로 발동시켰다. 마정석의 힘이 일정 거리 내에서 과하게 발동될 경우 각자의 힘이 충돌하며 미약한 폭발이 일어나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것은 건물이 붕괴될 만큼은 아니었지만, 이곳은 도서관이었다. 약간의 스파크가 일어 종이와 목재에 불이 붙자, 그는 소량의 마력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그의 도움 덕분에 그레이스는 원하던 자료를 몰래 챙기고, 후에 파악하기 어렵도록 나머지 자료에 손실을 입힐 수 있었다.

    복구야 할 수 있겠지만, 상당한 시간이 걸릴 테니 그레이스는 용의 선상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이걸 벤자민에게 보여 준다면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까…….’

    그녀가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중, 시선이 느껴졌다.

    “각하?”

    “…….”

    벤자민이었다.

    그의 표정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그레이스에게 큰일이 일어날 뻔했으니 놀랄 법했으나 그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그 이상의 것이다.

    이제는 벤자민에게 익숙해진 그레이스였으나, 그가 이런 얼굴을 지어 보일 때면 낯설어지곤 했다.

    지금 앞에 서 있는 그레이스가 아닌 다른, 그 너머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두려움을 넘어선 공포와 불안, 그리고 안도감과 뒤엉킨 비현실감.

    벤자민은 멀거니 서서 더 이상 그레이스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몇 마도구사들이 다급하게 도서관 내부로 들어가고, 기사들이 그레이스의 안위를 살피며 시끄럽고 분주한 와중에도 그만이 손가락 끝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각하, 왜 그러세요? 괜찮아요?”

    괜찮은지에 대한 안부는 그레이스가 들어야 함에도, 벤자민의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애초에 실제 피해는 하나도 입지 않았던 그레이스는 벤자민에게 몇 발짝 더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벤자민이 들고 있던 상자가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아.”

    벤자민도 스스로의 행동에 놀란 듯 얼굴이 더욱 경직되었다. 그가 들고 있던 상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부인, 부인을 피한 게 아닙니다.”

    그에 그는 점점 말을 횡설수설 이어 갔다.

    ‘……폭파 사건.’

    그는 그레이스를 통해 게이트가 폭파되던 날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그것밖에 추측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비록 당시 벤자민이 그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폭발음에 그 사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입을 달싹이다가 그에게 물었다.

    “……제가 각하께 다가가도 될까요?”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에스코트하거나 신체가 닿을 때마다 꼭 이런 질문을 하곤 했다. 부부 사이에 그걸 매번 묻는 것이 그녀로서는 신기했으나, 이번에는 그의 행동을 흉내 내듯 말했다.

    “부인께서 제게 하면 안 되는 행동은 없습니다.”

    평소라면 막힘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을 텐데, 오늘은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어쩌면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미했으나 그레이스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떨어진 상자를 주워들었다. 놀란 듯한 벤자민의 표정을 보아, 자신이 이것을 떨어트렸다는 사실을 몰랐던 듯했다.

    “제가 놀래 드린 것 같아 죄송해요.”

    “부인 탓도 아닌데 어찌 탓을 하겠습니까.”

    ‘내 탓이 맞으니까…….’

    그레이스는 양심이 콕콕 찔렸다. 사실 이렇게 큰 폭발음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벤자민이 이만큼 충격받을 줄 알았으면, 그녀는 다른 방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주변이 조금씩 진정되는 걸 보다가, 벤자민의 손끝을 잡았다. 평소보다 유달리 차게 느껴졌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요.”

    벤자민은 그녀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 끄덕였다.

    ⋆★⋆

    돌아가기 전, 그레이스는 마도구사들에게 몸 상태를 검사받고 당시 일에 대해 증언했다. 그녀는 처음 보는 괴한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도서관이 터졌다고 진술한 뒤, 실제로 그가 도망친 방향과 반대 방향을 말해 주었다.

    ‘아마 절대 잡히지 않겠지.’

    그는 꽤 자신이 있어 보였으니 말이다. 그러다 잡히면 조금 복잡해지지만, 그레이스가 현재 신경 써야 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공작저로 돌아오니 벤자민은 다시 평소와 같은 멀끔한 낯으로 그녀와 티 룸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것은 그녀를 안심시키기보다 더욱 불안하게 했다.

    ‘저렇게 금방 갈무리한다는 건, 진짜 진정한 게 아니라 감추는 거잖아.’

    게다가 익숙하다는 의미였다. 그레이스가 별관에서 칩거 생활을 하던 동안에, 벤자민 또한 그만의 고독하고 우울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까, 그럴 수밖에 없네.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정말로 사랑하니까.’

    ‘나’가 아닌, 그레이스. 그녀는 그리 생각했다. 그야 그 이전의 그녀는 기억이 있다 해도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내가 저 사람의 그레이스를 빼앗고 이 자리에 있는 게 옳은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쯤 귀에서 서서히 이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윽.’

    그레이스는 이것이 신호임을 알아챘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다시금 그 짜증 나는 소리들에 틀어박힐 것이다.

    ‘안 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레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각하, 각하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조금 전 마도구 연합에서 있었던 일과 관련된 것이에요.”

    벤자민이 이제까지 쌓아 온 고통을 현재의 그레이스가 다 안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번 사태에 관한 것은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악화가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그 일에 관한 것이라면, 그저 마도구 안 마정석의 폭주로 인한 사건 아닙니까.”

    벤자민은 그에 관해 말하는 것도 영 불쾌한 듯했다. 예전의 그레이스라면 그의 눈치를 살폈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심장이 둔탁한 바늘에 찔리는 듯한 불편한 감각을 느끼면서도 말을 이어 갔다.

    “아뇨, 그 일은 사실 제가 저지른 거예요.”

    “……네?”

    벤자민은 이해 불가한 얼굴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각하께서 그렇게 힘들어하실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예요. 그때는 이 방법밖에 없었고…… 그렇게 크게 일이 터질 줄은 몰랐거든요.”

    그레이스는 그리 말하며 마도구 연합에서 훔쳐 온 장부와 서류를 꺼냈다.

    “서부 오염이 만약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각하께서는 어찌하실 건가요?”

    “……!”

    그는 그레이스에게서 넘겨받은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이건……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하지만 그레이스가 벤자민에게 말해야 할 건 이것뿐이 아니었다.

    “각하, 저는 이것을 확인하던 중에 한 사람을 만났어요. 그는 자신을 마도구 연합에 포함되지 않은 마도구사라고 소개했고요.”

    그레이스의 이어지는 말에 벤자민은 서류에 고정되어 있던 고개를 획 돌려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마도구사에 관련된 그 많은 법률이 악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줬어요. 각하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저를 찾아왔고, 그자가 저를 돕기 위해 소동을 일으킨 거예요. 그러니까 전 정말 괜찮아요.”

    “그게, 그렇게 된 거였군요.”

    벤자민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더 이상은 차마 뱉지 못하는 듯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는데, 누가 올까 봐 빨리 행동해야 했거든요.”

    “아뇨, 아뇨. 아닙니다. 제가 유별났습니다.”

    벤자민이 거세게 고개를 내저었다.

    “부인 덕분에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잖습니까. 부인께서 계시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넘어갈 뻔했습니다.”

    “이건 어쩌실 예정인가요?”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어찌 행동할지 몰랐기에 약간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으나…… 마탑에 도움을 요청해야겠군요. 부인께서 봤다는 마도구사들을 먼저 만나 보아야겠습니다. 서로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요.”

    벤자민은 그러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아뇨, 아닙니다. 부인께서는 쉬십시오. 아무리 부인께서 계획하신 일이더라도 직접 겪는 것은 다르잖습니까.”

    벤자민은 서류를 지그시 내려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챙겨 온 상자를 그레이스에게 넘겨주었다.

    “이건 부인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떨어트려 죄송합니다.”

    “아, 아뇨. 제 탓인데요. 뭐.”

    평소라면 한참은 더 그레이스의 곁에 있으려고 하거나, 떠날 때 몇 마디의 말을 붙였을 벤자민은 오늘만큼은 아무 말 없이 장소를 떠났다.

    ‘내가 정말 벤자민에게 못된 짓을 했구나.’

    그레이스는 빠르게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남겨진 선물 상자를 바라보았다. 겉을 매만지다가 조심스레 열어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안에는 몇 개의 장식이 붙은 구두와 카드가 담겨 있었다. 그레이스가 카드를 집어 찬찬히 읽어 내렸다.

    ‘부인께서 최근 들어 기동성이 좋은 복장을 찾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구두는 그러질 못하니, 마도구사에게 부탁해 하나 준비했습니다.’

    “…….”

    ‘어딜 가시든 부디 편하시길 바랍니다.’

    그의 섬세한 말에 설레면서도 납덩이가 심장에 얹은 것 같았다.

    죄책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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