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25)화 (125/131)

125화

백작령의 땅이 죽고, 그 탓에 론델 운하가 오염되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소설에서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야 그냥 아리아가 활약하고 실베스터와 감정적 교류를 하는 씬이 필요해서 넣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레이스는 연구 일지를 넘기며 다른 가정을 세웠다.

‘만약 누군가가 은폐한 거라면?’

사실 이쪽이 더 타당했다. 지금의 그레이스에겐 이제 실제 세상이었으니까.

‘애초에 론델 운하가 오염되었다면, 처음부터 발원지를 향해 따라 올라가 보는 게 맞지. 하지만 그런 행동을 그 누구도 취하지 않았어.’

마도구 연합이 당시에 구설수에 올랐음에도 마도구사 중 누구도 이에 대한 안건을 제안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그것을 그저 그들의 생각이 차마 거기까지는 닿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 누구나 자신에게 일이 닥치면 정작 가장 간단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할 때가 있지 않는가.

‘하지만 만약 애초부터 이 일에 연관되어 있던 거라면?’

마정석을 재활용하는 실험 과정, 인공 마정석을 만들 수 있을 거란 연구 결과 발견. 마정석이 만들어질 때는 주변에 있는 생물의 생명력이 바스라진다. 하여, 가장 생명력이 풍부한 장소 중 아르델 백작령을 선택…….

“연구 결과, 마정석의 형질을 이루는 데에는 성공…… 하지만 마정석으로서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광산이 인공 마정석을 실험한 결과였다니.

이 실험에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을 것이다. 이 마도구 연합의 가장 큰 후원자인 벤자민의 돈 일부가 이렇게 빠져나가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분명 돈뿐 아니라, 펠튼 공작가를 통해 입수한 최고급 마정석도 허비되었을 것이다.

‘벤자민은 모르고 있었어.’

그가 혹시 모두를 속이고 이런 일을 지지하고 있던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었으나 그랬다면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그 광산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말렸을 터였다.

어쩌면 그마저도 연기일 수 있었다.

하지만 밑에 적힌 ‘거목의 방문일’과 제출할 서류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장부를 거짓 기입해 얼추 속이고 있던 것으로 보였다.

거목이란, 태양을 받치는 나무인 펠튼 공작가의 상징을 의미했다.

서류를 들고 있던 그레이스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잘게 떨렸다.

벤자민의 돈으로 실험을 실패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으나, 오염 지대로 만들어 버린 것은 다른 이야기였던 탓이다.

계속 넘겨 보니, 그들은 이 실패한 실험으로 인해 구멍 난 예산을 메우기 위한 회의도 진행한 기록이 있었다.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허비한 예산을 메우려 아르델 백작령의 광산에 대해 숨기려던 것이다.

‘지켈 남작령의 대리 영주에게도 미리 말을 했겠군.’

그에게 준 금액도 어마어마했다. 그가 아르델 백작에게 따로 지원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사유였다.

애초에 연구로 인한 부작용임을 알고 있으며, 지켈 남작령의 대리 영주는 그들의 실험을 방해하지 않기로 약조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이건 뭔지 모르겠네.’

마도구 연합에 있는 예산을 제외하고도 다른 두 단체에서 후원을 받은 적이 있는지, 사이에 끼워져 있는 장부에 덧셈 표시가 되어 있었다.

다만, 정확히 누구에게서 받았는지는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하나는 기하학적인 꾸밈새가 덧대어진 ‘F’, 또 다른 하나는 새까만 태양이었다.

‘둘 중 하나는 내 추측이 맞으면 신전이겠지만, 나머지 하나는…….’

두 표기법 중 무엇이 신전인지 알게 된다면 특정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서둘러 다른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이거 어딘가 낯익은 내용인데.’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는 마정석. 마도구 연합은 이것을 아르시아 왕국으로 넘겨, 아르시아산 보석으로 탈바꿈하려고 했다.

그다음, 바이먼 제국의 상단 하나를 내세워 그를 가짜 대표, 이른바 바지 사장으로 앉힌 다음 광물을 수입하는 것처럼 꾸며 낭비한 예산을 메우는 방식이었다.

‘상단의 본 위치는 다른 나라지만, 이걸 아르시아 왕국으로 운반하고, 다시 바이먼 제국으로 돌리는 방식이야.’

절차가 많아 복잡하고 인력이 더 들겠지만, 다른 나라를 두 번 거치는 만큼 자금의 세탁이 용이했다.

‘……바지 상인으로 내세울 상인.’

그리고 그들은 이 계획에 필요한 상인을 고르기 위해, 가렛타의 대리 영주를 통해 일부러 제국 밖을 서슴없이 돌아다니는 약소한 상인에게 소문을 흘렸다.

“뭐, 같은 남쪽이니 그리 멀지는 않죠! 이제 서부로 갈 예정입니다!”

“서부는 저번까지 오염 사태로 술렁이지 않았던가요?”

“성녀님께서 서부로 향하셨다는 건 이미 상인이 아니라도 아는 소식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된 건가?’

린덴 자작령은 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탓에 대형 상단은 거의 없고 중소 상인들이나 들르는 곳이었다.

남쪽의 길목에 있는 영지 중 낙후되고 구석에 있는 편이지만, 통관세나 숙박비가 저렴한 탓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이 그레이스를 찜찜하게 만드는 건 이 서류의 내용뿐만이 아니었다.

‘진짜 왜 이리 낯익지?’

분명 처음 본 계획임에도 그레이스는 마치 이것을 어디서 본 것만 같았다. 혹시 예전에 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 있었나, 한참 고민하던 그녀의 머릿속에서 번뜩하고 놓친 것이 떠올랐다.

“……아!”

그러나 그것은 그레이스의 과거에 묻힌 기억이 아니라 원작 ‘성녀의 소원’의 내용이었다.

‘원작에서 나오던 그 보석!’

원작 소설에서 한 가지 새로운 보석이 선보인 적 있었다. 제국이 아니라 타국에 몸을 담은 상단에서 선보였으며 다른 보석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이채는 모든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 그랬었어. 그 보석은 아리아가 아르시아 왕국과 거래를 틀 때쯤 선보여졌었지. 그래서, 보석 덕분에 아르시아 왕국과 거래한다는 발상을 한 거였고.’

원작에서도 그렇게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는 시레니도 보지 못한 보석을 어떻게 처음 보는 상단이 찾아냈는지 신기해했다.

‘그래서 아리아가 그때 그 보석, 그러니까 ‘그레이스’로 만든 목걸이를 하고 있는 걸 보고 관심을 가졌어. 어지간한 귀족들도 대기를 해야 가질 수 있을 만큼 귀하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왔으면서, ‘세이렌의 노래’에서 놓친 물건을 목에 걸고 왔으니까.’

아리아가 목걸이를 가질 수 있었던 건 당연히도 남자주인공인 실베스터가 선물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레니는 그것을 아리아의 도전장 비슷하게 받아들였다.

‘생각해 보면 시레니가 아리아를 다른 등장인물처럼 떠받들지 않은 이유는 혈통 때문만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어. 아리아는 시레니를 보러 가는 거였으면서, ‘세이렌의 노래’의 물건을 하나도 쓰지 않았는걸.’

그녀라면 티는 내지 않아도 자존심에 단단히 금이 갔을 가능성이 컸다.

‘아리아는 사교나 외교술이 나보다 안 좋으면 안 좋지, 낫지는 않을 테니까…….’

외모 외에는 별 특색 없이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리아는 성녀로서 추앙받았으나 그뿐으로, 어떠한 사교 기술이나 지식을 신전에서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귀족적이지 않은 방식의 당당한 발언과 행동으로 지지받았다고 하나, 정작 사교계에서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을 보면 실제 귀족 사이에서의 입지를 알 수 있었다.

‘이걸 왜 이제야 생각해 냈을까.’

원작 내에서는 보석의 이름도 달랐으며, 상세하게 묘사되지 않았었다. 그저 타국에서 온 아주 아름다운 빛을 품은 돌이라고만 되어 있었을 뿐.

그레이스는 이를 아르델 백작령에서 발견했으니, 연관성을 바로 잇기는 어려웠다.

‘애초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원석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게 전부 인간이 실험한 결과물이라니.’

이 인간들은 뻔뻔하게 한 영지를 죽음으로 몰아가면서도 자신들의 잇속만을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그날 광산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원작대로 흘러갔을 것이고, 아르델 백작령은 아주 부족하기 그지없는 지원금으로 겨우 영지를 꾸리고 절대 과거와 같은 풍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벤자민에게 알려 줘도 되나?’

그의 권한이라면 마도구 연합을 압박하고, 처벌하는 것까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직 채 잡지 못한 나머지 두 집단이 더욱 경계할 터였다.

‘그러자고 다른 두 집단을 잡기 위해 벤자민에게 도와 달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는데…….’

이는 필시 그레이스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기 위한 절차였다. 그러나 그레이스가 정말 바라는 바를 벤자민에게 말할 수 없기에 그에게 떳떳하게 도움을 요청할 명분이 없었다.

부스럭-…….

그레이스가 서류를 붙들고 고민하던 중, 인기척이 느껴졌다. 재빠르게 숨어야 했으나, 그전에 인기척의 주인이 그레이스를 향해 달려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

“부, 부인. 펠튼 공작 부인이 맞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습격에 버둥거리던 그레이스는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에 눈을 부릅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복장이 달라.’

마도구 연합 사람들이 걸치는 로브를 두르고 있었으나, 안의 복장은 뭔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크, 클레타 양을 아십니까? 저는 클레타 양에게 공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찾아뵈었습니다.”

“…….”

“혹시 제 말씀을 들어줄 의향이 있으십니까?”

그레이스는 어딘가 절박한 사내의 목소리를 가만 듣다가 손을 톡톡 두드렸다. 일단 입을 막고 있는 손을 떼어 내란 의미였다.

그제야 그는 어정쩡하게 손을 내렸다.

“들어는 줄 수 있네.”

“가, 감사합니다.”

그는 그레이스의 앞에 무릎 꿇었다.

“저는 연합에 소속되지 않은 마도구사입니다. 동료들이 시간을 벌어 주고 있으나,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한 가지 질문드리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연합에 속하지 않은 마도구사들 몇이 오늘 그레이스를 보기 위해 힘을 합쳐 잠입한 것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완벽히 가늠되지 않아 물었다.

“무엇이지?”

“공작 부인께서는 마도구 연합에서 벌이고 있는 폭정을 알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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