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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21)화 (121/131)
  • 121화

    그레이스의 입 안에서 텁텁한 맛이 돌았다. 이는 원래의 기억 때문이다.

    그녀가 식욕 억제제를 먹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주변 사람 중 먹고 부작용에 괴로워하던 이들은 많았다.

    그리고 어쩌면, 몇 달 전의 그레이스에게 조금이라도 의지가 없었더라면 이 약에 마음이 기울었을지도 모른다는 게 속 쓰렸다.

    ‘그래, 이 세계는 원래 살던 곳이랑 다르니까 혹시 모른다는 이유로 말이야.’

    그레이스는 그러면서도 고민했다.

    이 세상은 신성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신성력은 어떠한 질병이나 혼탁한 것을 없앨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럼 부작용이 없는 다이어트 약이나 식욕억제제도 만들 수 있는 게 아닐까?’

    하필 마도구 연합의 마도구사가 직접 주는 거라 그런지 이런 식으로 사고가 이어졌다. 처음 이 몸에서 눈을 떴을 때에 비하면 살이 많이 빠졌다고 생각했음에도, 최근 연회에 나갔던 그레이스는 자신이 다른 영애나 귀부인에 비하면 풍채가 많이 큰 편이라고 느꼈다.

    이제까지 제 몸에 불만이 없었음에도 불쑥 솔깃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커다란 손이 불쑥 끼어들어 통을 챙겼다.

    “귀족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다니, 신기하군. 남성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없나?”

    “아, 그것이 연구 중인 도구가 있습니다만…….”

    “이런 약은 아닌가?”

    벤자민은 태연한 낯으로 통을 열어 약을 확인했다. 평범하고 동그랗게 생긴 것은 그 어떠한 특징도 없는 흰색이었다.

    그는 약 한 알을 손으로 지분거리며 밀을 이어 갔다.

    “그리고, 여인들에게 선물할 법한 마도구가 있지 않겠는가. 이런 거 말고 말이야.”

    벤자민의 말에 마도구사는 제가 마도 폭탄을 밟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는 평소처럼 다정한 낯이었지만 영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

    “부인은 어떠십니까? 역시 마도구보다는 이러한 약이 좋습니까?”

    벤자민은 그레이스에게 시선을 옮겨 질문했다. 아까 전 마도구사를 향한 목소리보다 한없이 누그러진 태도였다.

    “아, 저는…….”

    그의 시선과 질문이 닿자 조금 전까지 입 안을 꽉 채우던 텁텁함이 많이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 약은 상회에서 마도구 연합에 준 선물인데, 제가 받으면 안 될 것 같네요.”

    필요 없다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벤자민 덕분에 홀가분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벤자민은 내가 이런 모습이어도 괜찮은 걸까?’

    그러면서도 조금 궁금해졌다.

    그레이스야 자신이 이런 모습이어도 괜찮다고 여겼다. 그녀야 원래 죽기 직전에는 움직이지도 못했으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현재에 불만을 가질 리 없었다.

    점점 체력도 붙었고, 우울에서 벗어날 방법도 깨우쳤으니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끔찍한 소리와도 조만간 멀어질 터였다.

    그러나 벤자민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으며, 저 또한 벤자민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고 있는 현재.

    그레이스는 ‘정말 이런 모습이어도 괜찮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그 이전에 이 몸의 영혼의 행방도 찾아야겠지만.’

    벤자민은 자신보다는 이 몸의 주인을 좋아한다는 게 옳은 걸 테니. 그레이스가 그 사실을 상기하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되었으니, 이건 받지 않는 걸로 하지.”

    벤자민은 약통을 쟁반 위, 그레이스에게서 가장 먼 위치 쪽에 툭 올려 두었다. 정말 그레이스가 그것을 받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마침 약을 가져왔으니까 이야기를 꺼내 볼까?’

    마도구 연합이 굳이 ‘지지 않는 꽃’과 교류를 한 이유가 궁금한 참이었다. 어쩌면 그들에 대한 단서를 그레이스가 알아낼 수도 있었다.

    원작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것에 비해 귀족 사회에 은근 영향력이 지대한 것 같아 찜찜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규모가 크다면 아무리 아리아의 시점으로만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원작에도 나올 법했기 때문이다.

    ‘성녀의 소원이 가끔 발생하는 큰 사건을 제외하고는 제도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지지 않는 꽃 상단도 제도 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거 같아.’

    그렇다면 아리아와도 마주쳤을 확률이 높았다. 원작 내에서 아리아는 아르시아 왕국과의 거래를 시도한 바가 있었고, ‘태양의 가호’를 찾기 위해 암암리에 수소문까지 했었으니까.

    아무리 건물을 두지 않고 이동하는 상단이라 할지라도 아리아가 그 상단의 이름조차 듣지 못한 것은 부자연스러웠다.

    아니, 오히려 한 번도 듣지 못했었기에 이상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지 않는 꽃’에서 무슨 사유로 이러한 답례를 보낸 거지? 내가 지난번에 듣기로는 해당 상단은 회원제라 상품을 함부로 팔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레이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낯으로 마도구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마도구사가 약을 그레이스에게 가져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권한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이 물건이 뭔지 알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얽혀 있다는 걸 테고, 지금 다른 마도구사가 없는 만큼 정보를 캐내기 쉬울 거야.’

    아니면 적어도 이 물건에 대해 알고 있는 마도구사와 연관이 있는 이일 테니, 그레이스가 이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말을 흘려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자세히 캐묻기보다는 애매하게 서문을 흘려 보았다.

    “전에 이 상단의 크림을 선물받아 사용했는데, 효능이 좋았거든. 그래서 소개받아 보고 싶은데 이번에 사교계에서 만난 이들에게 물어보기엔 미안해서.”

    물론 진짜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레이스는 그 크림을 받은 이후로 한 번도 통을 열어 본 적 없었다.

    “아, 당신들에게 소개시켜 달라는 건 아니니까 염려하지 말고. 이 정도나 되는 상품은 문외한인 내가 봐도 꽤 등급이 높은 회원에게나 줄 물건인 것 같아서 신경 쓰여 물어본 것뿐이야.”

    “아, 일 자체는 별거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자체적으로 만들고 싶은 미용 도구에 대한 자문을 구하려고 왔었습니다. 마도구사는 거의 다 여기에 소속되니 말입니다.”

    “거의 다?”

    “예, 여기에 소속되지 않은 마도구사도 있긴 합니다만, 실력이 보증되지 않아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지 못하지만요.”

    마도구사는 꽤 뿌듯한, 혹은 자만이라고 할 수 있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벤자민 또한 이 사실에 대해 모르지는 않는 낯이었으나, 영 불편한 주제인 듯했다.

    ‘하긴 마도구사는 마법사보다 숫자가 많을 테니까.’

    마도구사는 마법사보다 마력의 양이 애매한 사람들이 택하는 직업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마도구사를 향한 편견이 존재했으나, 이 편견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펠튼 공작가가 마도구 연합을 설립한 시점이었다.

    마도구사가 모여 제국을 발전시킨 마도구가 수없이 발명되자, 마도구사라는 직업이 각광받았다.

    ‘하지만 그 모든 마도구사를 이 연합에서 전부 수용할 수는 없을 테니 당연한 거겠구나.’

    “그럼 차라리 같이 연합하여 물건을 만들지 않은 이유가 있나?”

    “애초부터 다 만들어서 가져왔더군요. 자문만을 원했습니다. 그런 일을 요청받는 경우는 적지 않으니, 공작 각하께서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음…….”

    그레이스가 벤자민을 바라보자 그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일이 꽤 있긴 합니다. 마도구 연합의 인증을 받냐 아니냐에 따라 신뢰도에 차이가 생기니 말입니다.”

    “그건 각하께는 보고가 안 들어가나요?”

    “아뇨, 인증이 된 경우에는 보고서가 무조건 올라옵니다. 마도구 연합의 이름이 붙는 것이니까요.”

    “그럼 이번에 몰랐다는 건 인증이 허가되지 않았다는 거네요.”

    마도구사는 둘의 대화를 듣고 태연한 얼굴로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검증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다음번에 새로운 물건을 가져오겠다며, 그들의 상품을 몇 개 주고 갔습니다. 상품성은 나쁘지 않은 것 같더군요. 공작 부인께서도 후에 마음이 변하시면 편히 말씀해 주세요. 많이 있으니까요.”

    “아뇨, 괜찮아요.”

    ‘이 약이 그중 하나라는 건가? 그럼 뇌물 아냐?’

    그레이스는 미묘한 기분으로 식욕억제제를 바라보았다.

    흰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통은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

    그레이스는 통을 가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만 다른 곳을 둘러보아도 괜찮을까요? 괜찮다면요. 시간도 많지 않으니 가능한 한 많이 보고 싶네요.”

    계속 저 약을 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애초에 부인께서 원하셔서 방문한 것이니 그래야지요.”

    벤자민은 선뜻 그레이스의 뜻에 응하며 일어섰다. 둘을 접대하던 마도구사는 두 사람이 일어나는 것에 당황한 듯했다.

    “벌써 둘러보시게요? 그래도 조금 더 쉬다 보시지 그러십니까?”

    “……?”

    “그, 그게 조금 주변이 어지러워서 말입니다. 사실 연구실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괜찮네, 우리가 왔다고 해서 전부 정리하느라 본업을 게을리하면 안 되지.”

    벤자민은 당황한 마도구사에게 부드럽지만 단호히 대응하며 몸을 돌렸다.

    ‘왜 저렇게 당황하나 했는데,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거구나.’

    대주주 부부가 내부를 둘러본다는데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맞이하기란, 끔찍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정돈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시간을 끌려고 했더니 그레이스가 생각보다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그냥 다시 앉자고 할까?’

    그레이스의 고민은 부질없었다. 벤자민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먼저 앞으로 나가 문을 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안 나갑니까, 부인?’ 하듯 그레이스를 보고 있었다.

    ‘이미 엎질러졌네.’

    그레이스는 입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올린 채 그냥 밖으로 나섰다.

    “어디부터 보고 싶으십니까?”

    “각하께서 직접 안내해 주려고요?”

    보통 이런 안내는 다른 사람이 하지 않나 싶었다. 실제로 접대를 담당했던 마도구사가 뒤에서 난처한 얼굴로 따라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너무 당연하게도 안내역을 자처한 게 그리 싫지는 않다고 생각한 와중, 벤자민이 다음 말을 덧붙였다.

    “예, 부인께 안내해 주려고 공부했습니다.”

    “…….”

    전에도 이런 말을 듣지 않았던가. 꽃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레이스는 ‘설마 이것도……?’ 싶어져, 표정이 살짝 굳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얼굴이 굳자 잠시 아리송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 아차, 하며 바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진짜 직전에 공부한 겁니다!”

    “아, 아…… 네.”

    “저야 원래 여기와 긴밀하니,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위치쯤이야 금방 다 외웁니다.”

    “그, 그렇군요.”

    “안심하십시오, 부인.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군요…….’

    그레이스가 기억을 떠올려 벤자민에게 말했던 것이 그에게도 꽤 충격으로 다가오긴 했던 모양이다. 혹여 그레이스가 신경 쓸까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마도구 연합 내 복도 한복판에서 연신 부정했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계속 그레이스만 신경 쓰며 부정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벤자민을 보니, 오히려 그것이 민망해져 그레이스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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