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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20)화 (120/131)
  • 120화

    “마도구 연합 건물 바로 앞에는 세우지 못하여 여기서 조금 걸어가야 합니다. 괜찮습니까?”

    “당연하죠. 이렇게 밖을 나와 걷는 거, 나쁘지 않으니까요.”

    그레이스가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자, 신문팔이 소년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기사들이 그녀의 앞을 에워쌌으나 그레이스가 그들을 물렀다.

    “마님, 마님. 신문이나 잡지에 관심 없으세요? 최신호가 있어요.”

    아이의 손에는 채터스 잡지를 비롯해 온갖 가십지와 제도 신문이 들려 있었다.

    그레이스가 고민하다가 아이의 신문을 몇 개 사 줄까, 하고 손을 뻗은 찰나 벤자민이 저지했다.

    “부인, 지금 갈 곳이 있는데 벌써 짐이 생기면 무겁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따로 사서 들려 보내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음, 그래도…….”

    아이의 돈벌이가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지만, 사실 최근 가십지에는 어떤 말이 실리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지난번, 린덴 자작령에서 읽었던 신문에서는 자신에 관한 내용은 없었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어차피 벤자민이 사 둔다면 나중에 읽을 수 있겠거니, 싶어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읽어 봤자 제대로 보지도 못할 테고 본 목적은 신문을 사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여유롭게 보면 되겠지.’

    그리고 몸을 돌려 마도구 연합 건물 쪽으로 향하며, 그레이스는 무의식중에 마차가 지나간 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거대한 건물들 사이로 이상한 탑이 하나 보였다.

    “……?”

    “얼른 가시지요.”

    하지만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그에 대해 물어보기도 전에 그녀를 이끌었다.

    그리 높지도 않고 가는 탑은 제도의 건물들과 달리 거주를 고려하여 만들어진 양식이 아니라 기이한 외형을 가지고 있어 이질감이 들었으나, 모두가 그것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별게 다 있네…….’

    자신에게만 보이는 건지, 모두에게 익숙해서 반응을 안 하는 건지 처음에는 헷갈렸으나 분명 그것을 잠시 눈짓하는 사람도 있었기에 후자였다.

    ‘저런 게 왜 제도 한복판에 있는 거지?’

    그레이스는 이 몸이 갖고 있는 지식을 많이 물려받았다. 즉,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건 저 탑은 그레이스의 기억이 유실된 1년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였다.

    ‘생각해 보면 날아간 게 1년 치 기억이라는 것도 애매해. 식물에 대한 지식은 고작 1년 치가 아니니까.’

    그럼 정확히 무엇이 지워진 거지? 지금 확실히 사라진 것은 결혼 초기, 1년의 기억뿐이다.

    그레이스가 빙의자였으니 자신이 무엇을 떠올리지 못하는지의 기준이 더 애매했다.

    “부인?”

    “…….”

    “부인, 제 목소리가 안 들리십니까?”

    벤자민의 얼굴이 그레이스의 앞에 불쑥 다가왔다. 그레이스가 그제야 화들짝 놀라 상체를 뒤로 젖혔다.

    “가, 각하?! 무슨 일이세요?”

    “건물 앞에 도착했다고 말씀드렸는데도 반응이 없으셔서 말입니다.”

    “아, 버, 벌써요?”

    얼빠진 얼굴로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이 진짜였는지 ‘마도구 연합’이라는 간판이 붙은 거대한 건물 앞에 몇몇 사람이 어색하게 꾸며진 싹싹한 얼굴로 서 있었다.

    ‘힘들어 보인다.’

    아무래도 최고 후원자, 그로 인해 수많은 결정권을 보유한 가문의 부부가 나란히, 연락을 넣은 지 고작 며칠 만에 찾아온 격이니 힘들 법도 했다. 평소의 그레이스라면 그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몰랐겠으나, 오늘은 그들에게서 털어가야 할 정보가 많았으니 크게 미안하진 않았다.

    ‘마감재에 관해서는 어떻게 말문을 연담.’

    분명 처음에는 지지 않는 꽃에 관해 마도구 연합에서 말이 오간 적 있다고 들어, 그것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본론은 마감재로 바뀌었다.

    어떻게 화제를 마감재로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을까 고민하려던 때, 벤자민이 당당하게 말했다.

    “이번에 그대들이 납품한 가구에 미흡한 점이 있어 부인의 방에 들이지 못했네.”

    “……!”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이런 말을 할 때면 미리 속으로 마음을 계속 다잡아야 하는 그레이스와 달리 벤자민은 평온하게 말을 줄줄 이어 갔다.

    “아무래도 그대들은 마도구만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이들이니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네. 몇 가지 가구는 그래서 타 공방에서 구매해 온 것에 마감재 가공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랬구나.’

    하긴 마감재만 바르면 되는 공정이라면 굳이 마도구 공방에서 하나하나 만들 필요가 없긴 했다. 그레이스도 새삼 이 사실을 깨닫고 옆에서 작게 주억거렸다.

    “하여, 나는 이제 슬슬 이 마감재의 시험을 끝내고 가구를 그만 받는 게 어떠겠냐고 부인께 여쭈어보았으나 나의 상냥한 부인께서는 그대들에게 이것에 관해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더군.”

    ‘그런 적 없는데요.’

    마감재에 관한 질문은 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나눈 적 없다. 뻔뻔하리만치 온화한 얼굴로 말하는 벤자민을 보며 그레이스는 데자뷔를 느꼈다.

    그래, 이것은 황실 연회에서 그레이스가 아리아와 실베스터를 데리고 했던 사기극과 흡사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이런 면이 닮아 버린 듯했다.

    “혹시 여유가 있는 마도구사가 있다면 마도구사 연합을 둘러보며, 잠시 후 부인께 마감재와 가구에 대해 설명해 줬으면 싶네만.”

    벤자민의 목소리는 온화하기 그지없고 권유하는 형태였지만, 정말로 단순한 권유일 리가 없었다.

    마도구 연합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자는 벤자민 펠튼이었다. 그레이스는 다시금 거대한 권력과 갑질을 느꼈다.

    ‘이런 거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오, 오늘을 위해 시간을 비워 둔 마도구사는 많습니다. 걱정 마시지요.”

    “암요!”

    다들 그제야 헐레벌떡 길을 트며 둘을 마도구 연합 건물 내로 들였다. 벤자민은 내내 그레이스에게 ‘저 잘했나요?’ 아우라를 풍겼다.

    ‘아무래도 내가 그때 다들 너무 준비할까 봐 신경 쓰여서 못 말하겠다는 뉘앙스로 말한 게 마음 쓰였나…….’

    그레이스가 말하지 못할까 봐 아예 초입부터 선수 쳐 못 박은 것이다.

    마도구 연합에게도 오늘 방문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보여 줌과 동시에 그레이스에게 벤자민이 무엇을 가장 신경 쓰고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거 같아.’

    민망하기는 했어도 남들 앞에서 벤자민이 자신을 우선해서 챙겨 주려는 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서 기분이 간질거린다는 게 옳았다.

    마도구 연합 건물 내는 외부보다도 화려해 그레이스의 입이 벌어질 뻔했다.

    어느 부분은 어쩌면 그레이스가 머무는 별관보다 번쩍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오히려 너무 반짝거려서 촌스러워 보이는 거 같은데…… 아닌가?’

    과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느낌이었다. 무례한 표현을 빌리자면 몸을 한껏 부풀린 졸부 같았다.

    “실내를 조금 바꾸었군.”

    “하하, 창조력은 늘 새로운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도구 연합을 자주 드나드는 벤자민은 익숙한 듯 내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그레이스는 마도구 연합이 가구를 자주 바꾼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그대들에게 눈치를 주는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

    “각하께서 지원해 주시는 돈을 함부로 쓴다는 인상을 줄까 두렵습니다.”

    벤자민이 또 방문했다는 사실에 몇몇 마도구사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연구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의 품에는 몇 가지 서류가 안겨 있는 것이, 자신의 발명품을 그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발표하고 싶은 기색이었다.

    “……이런 일이 익숙하신가 봐요?”

    “음, 그렇죠.”

    그들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어색한 그레이스와 달리 아무것도 모른 척 시침 뚝 떼고 있는 벤자민에게 감탄했다.

    “한 번 예외를 만들면 좋지 않은 사례가 생겨날 수 있으니 가급적 저는 최종 통과한 것만 확인하고 있습니다.”

    접객실에 도착한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가장 상석에 앉혔다. 그들을 안내하던 마도구사는 잠시 당황한 눈치였으나, 금방 갈무리하고 차를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사례를 만들면 그것으로 인한 피해는 결국 힘없는 약자가 받지 않겠습니까?”

    그레이스는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고 끄덕였다.

    ‘그런 거치고는 지위를 잘 사용하는 거 같지만.’

    “물론 제가 그런 거치고는 제 위치를 꽤 사용하는 편이긴 하죠.”

    벤자민이 그레이스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그녀는 괜히 속이 뜨끔했다.

    “이게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이요?”

    “그런 게 있습니다.”

    전부 다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 벤자민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웃어넘겼다.

    “약간의 비밀을 남겨 두어야 부인께서 저에게 더 관심을 가지실 것 아닙니까?”

    ‘약간이 아니면서.’

    “그러다가 제가 계속 각하를 의심하느라 매일 바라보면 어쩌려고요?”

    “그럼 저야 좋지요.”

    그가 숨기는 게 많은 것을 알면서도 시침 뚝 뗀 채 말을 받아치자, 오히려 능청스러운 말이 나왔다.

    “아, 물론 의심이 아니라 관심 쪽이면 더욱 좋겠지만 말입니다.”

    “…….”

    마차에서는 벤자민의 얼굴이 붉어졌다면 이번에는 그레이스였다.

    그레이스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녀의 반응을 알아챈 것인지 벤자민은 하하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도착했군요.”

    벤자민이 말하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는 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귀 대신에 뭐 감지 센서라도 달렸나.’

    둘을 대접하게 된 마도구사가 가져온 쟁반 위에는 차뿐 아니라 동그란 통이 올려져 있었다.

    “저희가 보이는 작은 성의입니다.”

    “그게 뭐지? 마도구는 아닌 것 같은데.”

    “아, 예. 공작 각하, 전에 마도구 연합에서 ‘지지 않는 꽃’ 상회와 교류가 오간 것을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 후에 상회에서 받은 것인데 이게 귀족 여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고 하여서요.”

    그레이스는 이것도 일전에 샤를 소후작 부인과의 모임에서 받았던 크림 같은 건가 했으나 마도구사가 통을 들자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식욕을 억제하는 약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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