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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19)화 (119/131)

119화

보통 체격이 크면 받는 큰 오해 중 하나가 ‘건강하기라도 하니 다행이다.’였으나, 그레이스는 건강한 편이 아니었다.

별관에 오래 박혀 있던 탓에 체력은 급격히 저하되었고 한동안 산책과 가벼운 운동으로 그나마 나아졌으나, 그 상태에서 과한 신성력의 사용으로 또 몸이 안 좋아진 것이다.

‘아, 나 이 느낌 알아.’

그레이스는 이 어지러운 기분을 느끼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이거 게이트 관리국에서 겪은 거랑 비슷한 기분이야…….’

당시에는 그저 사람이 많은 곳에 가 심한 부작용을 겪은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레이스는 그 후에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었고, 심지어 사람들 앞에 나선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속이 불편하고 불안했으나, 열이 오르고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부작용이었구나…….’

물론 당시의 그레이스는 신성력을 쓰지 않았지만, 그때와 똑같은 후유증이 찾아왔기에 같은 부작용임을 깨달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먹기 쉬운 음식과 물을 가져온 벤자민이 쟁반을 협탁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전에,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나 해서요.”

“……음.”

벤자민은 잠시 침음을 흘렸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했다.

“최근에는 게이트 관리국에서 그러셨지요.”

‘최근.’

평소라면 하지 않을 적나라한 말실수를 벤자민이 저질렀다. 그도 알아채지 못한 눈치였다.

‘기억하고 있구나.’

그리고 벤자민이 보기에도 같은 증상이라는 의미였다. 겪는 당사자뿐 아니라 돌보는 당사자 또한 똑같다고 느낀다면, 이는 거의 확실했다.

‘그럼 게이트국에서도 신성력을 쓴 건가?’

보통 신성력은 행복한 감각을 기반으로 한다는데, 그때의 그레이스는 어떻게 능력을 쓴 걸까? 그녀는 달뜬 숨을 뱉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 그보다 게이트 관리국에서 나는 힘을 어떻게 쓴 거지?’

조경물로 쓰인 조약돌도 마찬가지였다. 그레이스는 게이트 관리국 때도, 조약돌 사건 때도 빛이 터지는 것은커녕 신성력을 쓸 때의 고양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생각은 그만하십시오, 부인. 머리도 아프실 텐데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아.”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립니다.”

그러나 곧 차갑고 축축한 감촉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며 의문이 뚝 끊겼다.

물기를 쭉 짜낸 물수건이 그레이스의 이마에 올려져 있었다.

그레이스는 퍽 익숙한 듯한 벤자민의 간호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익숙하신가 봐요.”

“그런 편이죠.”

“왜요?”

“음…….”

벤자민은 또다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는 무언가를 말할 때면 고민에 빠져 뜸을 들이는 습관이 있었다.

소설에서도 묘사된 적 없는, 그를 직접 본 그레이스가 알아낸 습관이었다.

‘물론 고민에 빠지는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그는 대답하기 전 그레이스의 얼굴을 만져도 되겠냐고 물어보았고, 그레이스가 끄덕이고 나서야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예전에 꽤 형편없이 간호한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누구를요?”

“누구겠습니까? 이 제국, 아니 이 세상에서 제게 병간호를 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딱 한 사람뿐이잖습니까.”

“…….”

“그래서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한 적이 있습니다.”

벤자민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나 끝에 약간의 그리움과 슬픔이 묻어나왔다.

“물론 보통 이런 다음은 없는 게 좋지만…… 역시 대비해 두길 잘했군요.”

“그냥 사용인에게 맡겨도 괜찮을 텐데요.”

공작가니 주치의도 있었고, 진찰이 끝나고 나면 사용인에게 맡겨도 무방했다. 그렇게 한다고 서러워할 나이도 아니었다.

그녀는 벤자민이 바쁜 것도 알고 있었으며 고작 그런 걸로 벤자민이 저에게 무관심하다고 여길 성향도 아니었다.

‘게다가 원래 이런 걸 할 위치도 아니잖아.’

이유는 그레이스도 대충 알고 있었다. 벤자민에게 있어 그레이스가 더없이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레이스는 계속 그걸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뭔지, 열기에 기댄 채 그에게 캐물었다.

벤자민은 이불 위를 다독거리며 침묵하다 말했다.

“부인께서 아프실 때 더는 혼자 두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

‘더는.’ 그가 입에 담은 단어는 꽤 낯선 말이었다. 벤자민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프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자리에 없었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내가 기억을 떠올리는 걸 싫어하는 거랑 연관이 있는 걸까…….’

벤자민은 아프니 생각하지 말라고 했으나, 아프니 더욱 생각이 얽히고 얽혔다.

결국 청록색 눈동자가 미미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눈치챈 벤자민은 옅은 숨을 뱉으며 미소 짓더니, 큰 손으로 그녀의 시야를 덮었다.

“앗…….”

“방금 깨어나셨지만, 안 되겠습니다. 다시 주무십시오.”

“안 졸린데요.”

“눈 뜨고 계셔서 그런 겁니다. 얼굴에 피곤하다고 쓰여 있습니다.”

“…….”

벤자민이 우기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눈을 감으니 피곤한 건 맞았는지 순식간에 피로가 밀려들었다.

깨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레이스는 그와 별다른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는데 이렇게 잠들어도 되는가 싶어지면서도 작게 달그락거리며 움직이는 소리를 배경 삼아 잠들었다.

이번에는 벤자민이 엉망으로 병간호를 하느라 난장판이 되고, 주변 모두가 난처하게 그를 바라보는 꿈을 꾸었다.

벤자민도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영 곤란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레이스만큼은 꿈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런 것마저도 너무나도 행복했기 때문이다.

⋆★⋆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제도에 위치한 마도구 연합 건물로 향하기로 한 날, 벤자민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열도 다 내렸고, 공작가의 주치의마저도 ‘건강!’이라는 판정을 내렸음에도 그는 걱정이 태산인 듯했다.

“원래 나은 직후가 몸이 가장 좋지 않은 법이라고 합니다, 부인.”

“정말 괜찮다니까요. 제가 무리하는 거 봤나요?”

“예.”

“…….”

“솔직히 많이 봤습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넘어가 드릴 수 없군요.”

평소에는 그레이스의 말에 유하게 넘어가는 벤자민이었으나, 오늘은 퍽 단호한 어투로 답했다. 그레이스도 이 말에는 반박하지 못했다.

“이젠 그래도 꽤 자중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저도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번에도 쓰러지기 직전까지 아무런 티도 내지 않으셨잖습니까.”

‘그야 그건 진짜 그 직전까지 아프지도 않았으니까요…….’

이걸 말하지도 못하고, 그레이스는 답답해 죽을 거 같았다. 그렇다고 벤자민에게 사실 저도 성녀고, 이 세상에 성녀가 한 명이 아니라 둘인 거 같아요! 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나라도 안 믿을 거 같다 그건.’

그레이스의 이미지가 성녀와 맞지 않은 건 제쳐 두고, 성녀는 원래 한 시대에 딱 한 명만 태어나는 게 맞으니 그레이스가 존재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힘이 빙의가 되어서 생긴 게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다면 왜 그런 건지가 궁금한데.’

이걸 알려 줄 만한 사람이 없으니 영 답답했다. 자문을 구하거나 이에 대한 정보의 수집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그레이스만이 특별한 사례였기 때문이다.

‘끄응.’

“부인, 타시지요.”

그레이스의 고민을 알 턱이 없는 벤자민은 그레이스를 마차까지 에스코트했다.

“아, 고마워요.”

마차에 탑승하려던 그레이스는 문득, 마차 근처에 검을 들고 경호하고 있던 기사를 보고 의문이 들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서부에서 자르테 공작을 도왔던 기사는 돌아왔나요?”

기사가 워낙 많아 마주칠 일이 없을 수도 있지만, 보통 장기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면 소식이 들릴 법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그에 대해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나한테 보고할 의무가 없긴 하지만.’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벤자민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기사는 집에 우환이 일어나 잠시 검을 내려놓고, 저택을 떠났습니다.”

“심각한 일인가요?”

“전염병 같은 일은 아니니 부인께서 그리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따로 펠튼 공작가에서 지원 물품도 보내었으니 말입니다.”

그레이스의 얼굴에 실린 걱정을 읽은 벤자민이 설핏 웃었다.

“그건 다행이네요.”

“예.”

벤자민이 그녀의 말에 대답하다가 창밖을 보더니 손을 뻗어 커튼을 내렸다. 매우 부드러운 행동이었으나 그레이스는 위화감을 느꼈다.

“……?”

“정말 다행인 일이죠.”

옅게 흔들리는 커튼 틈 사이로 뜨문뜨문 풍경이 보였다.

‘저건…….’

무언가 위화감을 느껴 그레이스가 뚫어져라 보는 중, 벤자민의 손이 그녀의 시야를 어질렀다.

“부인, 부인. 왜 저를 안 보시고 딴 곳을 보십니까? 혹시 저에게 숨기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는 지는.’

본인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으면서. 하지만 그레이스 또한 숨기고 있는 게 있으니 조금 속이 뜨끔하고 찔렸다.

“오늘 날이 좋은데 갑자기 커튼을 치셔서요. 왜 그런가 궁금해서 그랬어요.”

“아아, 밖에 처음 보는 미남이 있어서 말입니다.”

벤자민은 뻔뻔하게 웃었다.

“설마 부인께서 절 두고 한눈팔지는 않으시겠지만, 제가 질투 나고 싫어서 가렸습니다.”

“…….”

“……큼.”

그레이스가 말없이 지그시 벤자민을 바라보자 그가 목을 가다듬었다. 결국 뻔뻔한 얼굴은 사라지고,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농담입니다.”

“재미없었어요.”

“다음번에는 농담을 더욱 공부해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요.”

하지만 이로 인해 그레이스가 벤자민에게 진짜 밖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볼 타이밍을 놓쳐 버렸고, 마차는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 몇 마디와 침묵으로 일관하다 이윽고 마도구 연합 본부 근처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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