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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18)화 (118/131)

118화

⋆★⋆

벤자민과의 대화 이후 그레이스는 자연스럽게 장부를 받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레이스와의 대화가 신경 쓰였던 벤자민이 이미 정리된 장부를 그녀에게 보낸 것 같았다.

‘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네.’

사실 초기에 따로 본 적은 있었으나,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장부는 더욱 포괄적인 것으로 저택 내 가구나 식자재 등의 운용을 어찌하고 있는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덕분에 그레이스는 빠르게 각 가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차피 안개를 보면서 쫓으면 되긴 하지만 이게 빠르지.”

특별한 마감재가 발라진 가구는 별관에만 배치되어 있었고, 특히 그레이스가 머무는 공간 위주로 분포되어 있었다.

그레이스의 방과 그 근처에 특히 많았으며 서재에 하나도 없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내가 어딜 다니는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던 걸까?’

그레이스는 이쯤 되면 소름 돋을 지경이었다. 그들의 끈기에 찬사를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

“……옅은 하늘색.”

그레이스는 주머니에서 옅은 하늘빛을 뿜어내는 펜듈럼을 꺼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빛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거 덕분에 평소에 더 지내기 편한 것도 있어.’

신성한 돌로 이루어진 펜듈럼이라고 했다. 그레이스는 손안에 꼭 쥔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성한 돌은 그럼 전부 이런 빛이 나는 걸까?’

반대로 쓰임이 다 된 마정석은 불길한 안개가 느껴지는 것인가? 그 둘은 상관이 있는가? 생각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렇다면 빛의 색이 다른 이유는 뭐지?’

그레이스는 이전에 들었던 아리아의 말을 떠올렸다.

“모든 신성력에 빛이 있는 건 아니에요.”

…….

“그리고, 이 빛은 보통 영혼의 색을 띠고 있다고 해요.”

“영혼의 색…….”

역대 성녀의 영혼의 색인 걸까? 이 펜듈럼은 어쩌면 성녀가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레이스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아니 근데 그러면 아리아가 자신이 그 펜듈럼을 만들었다고 말했을 텐데.’

아리아는 그레이스에게 펜듈럼을 줄 때 자신의 성력을 불어넣었다거나, 그런 것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이다.

“……음.”

한번 마정석과 마감재에 대해 알게 되니 펜듈럼이 뿜어내는 빛에 대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죽는지, 나를 왜 죽이는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해결하려면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아.’

어쩌면 제자신이 오지랖이 넓은 게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레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서재 내부를 둘러보았다.

신기하리만치 고요하고 불온한 기운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곳. 그레이스는 책을 읽는 취미도 있었다.

‘가구를 담당하는 이들이 이걸 몰랐을 거 같진 않은데.’

그레이스가 자주 머무르는 곳을 유추해 내 특수한 가구를 배치한 이들이었다. 비록 펠튼 공작 부인의 기억이 점점 유실되고 우울이 심해지며 서재를 잘 들르지 않았더라도 이 방을 가만둘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왜일까?’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다가 제 방으로 향했다. 서재가 마도구 연합이 납품한 가구로 채워지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필시 벤자민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별관의 식재료와 가구 등, 모든 것은 벤자민의 관할이었다.

일전에 벤자민이 서재의 가구는 건들지 말라고 명했음을, 샐리를 통해 들은 적 있었다. 이 별관의 식재료와 가구 등 모든 것은 벤자민의 관할이었고, 그레이스도 이를 알고 있었다.

‘벤자민이 이 서재만큼은 건들지 않은 것에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이유가 있겠지.’

벤자민은 어째서인지 그레이스가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모든 기억을 떠올리고 나면 그레이스는 예전처럼 벤자민을 바라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은근슬쩍 다른 게 더 떠오르지는 않냐고 물어봤으니까 떠올리지 않기를 바라는 결정적인 일이 있는 거 같고.’

다만 대체 그게 뭔지를 그레이스는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정말 큰일이었으면 주변에서 낌새를 보일 법한데, 주변에서 그 누구도 이상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지난 연회에서도 그리 큰 반응은 없었다. ‘그’ 공작 부인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쯤이었다.

‘나와 관련된, 모두가 알 만한 큰일이었으면 그게 소설에 나왔을 거야. 근데 소설에도 없었어.’

이건 확실히 기억한다. 그레이스가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는 벤자민이었다. 벤자민에 관련된 설정은 모두 알고 있었다.

젊은 공작,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고 알려져 있었고 부인은 그냥 무능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부인인 그레이스는 자잘한 사고라면 모를까 그리 큰 사고를 친 적은 없었다.

‘둘 사이에 있던 사건 같은데…….’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어찌 되었건 그레이스는 기억나지 않는 과거를 전부 떠올려야만 한다.

그레이스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 힘이 자연스럽고, 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나만 더 해 보자.’

그레이스는 티 룸에 있던 벽난로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보기만 해도 위험한 기분이 들어 현재로서는 다가가기도 기분 나빴다. 그 대신 욕실로 향했다.

“생각해 보면 욕실부터 하긴 해야 했지…….”

자주 사용하는 공간인 만큼, 모든 공간이 검은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레이스는 여기를 전부 정화하고 나면 자신이 어떤 상태가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위협적이게 느껴지진 않아.’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줬던 장부를 떠올렸다.

‘욕실의 물건은 교체한 지 오래된 것 중 하나였지.’

배수관과 연결해야 하는 것이 많았던 만큼, 자주 바꿀 수 없었다.

‘오래된 순대로 이 이상하고 기분 나쁜 힘이 약해지는 거일지도 모르겠어.’

그레이스는 기분 나쁜 안개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며, 심호흡했다.

청록색의 빛이 일렁거렸다.

⋆★⋆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시야가 흐리고, 열 탓인지 물기가 아른거리고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달뜬 숨을 뱉는 중, 늘 그녀에게 닿던 다정한 목소리가 약간 타박하는 듯 말을 걸어왔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

“부인께서는 늘 본인보다 다른 이를 챙깁니다. 그런 당신을 보는 제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 안 해 보셨습니까?”

벤자민은 침대맡에 앉아 약하게 투덜거리면서도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열 탓에 당근색 머리카락보다도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다가 배시시 웃어 버렸다.

“……미안해요.”

“사과를 받으려고…… 아닙니다, 이번에는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후후.”

“웃지 마십시오. 이번엔 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벤자민이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다가 멈추었다.

“부인을 잠시 만져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그제야 벤자민은 옅은 숨을 뱉고, 땀으로 헝클어진 그레이스의 머리칼을 맨손으로 정리한 뒤 물수건으로 정리했다.

보통 다른 이에게 맡길 법도 했건만 시중은 마치 제 몫이라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옷은 다른 하녀가 갈아입혔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

“왜 그리 보십니까?”

그레이스는 색색 숨을 쉬다가 물었다.

“전염병은, 이제 괜찮나요?”

“…….”

그나마 온건한 얼굴을 유지하던 벤자민의 얼굴이 구겨졌다.

“부인.”

벤자민은 최대한 다정하게 그레이스를 부르려고 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억눌러져 있었다.

“당신이 며칠을 누워 있었는지 아십니까?”

“제가 오래 누워 있었나요?”

“예, 당신께서 스스로를 격리하고 나서 며칠을 쓰러져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전염병이 아니냐고 하였고, 저는 그게 두려웠습니다.”

그레이스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깜빡이며, 그에 대해 사과하려고 했으나 벤자민의 말이 더 빨랐다.

“전염병이라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부인께서 병에 걸렸을까 두려웠던 겁니다.”

“…….”

벤자민은 그 뒤로 입을 딱 다물었다. 그레이스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꺼내어 그의 손가락 끝을 잡았다.

열이 올라 그의 손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당신이 저를 걱정하는 것처럼 똑같이 두려워했을 테니까…….”

“…….”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어요. 제가 성녀님 같은 건 아니라, 뭘 할 수는 없었어도.”

이기적인 말이지만 걱정받는다는 거 정말 좋은 거네요. 그레이스는 색색 숨을 뱉으며 웃었다. 벤자민은 그런 제 부인을 보며 마주 웃어 버렸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당신을 걱정합니다.”

“두 분께도 죄송한 일이 되었네요.”

“그리고, 소공작 부인으로서 대견하다며 앞으로를 기대한다고도 하시더군요.”

“……그것도 죄송한 일이네요.”

“왜요?”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레이스의 말에 벤자민은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았다.

“부인께서는 대단하신 분입니다.”

“당신만 그렇게 생각할걸요?”

“저 말고, 제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 생각하고 있고…… 이 저택의 사용인들도, 그 마을 사람들도 그리 생각합니다. 몇 년 내로 온 제국이 당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제가 이런 건 꽤 잘 맞춥니다.”

“……그 정도 팔불출이면, 중죄라고 생각해요.”

팔불출도 부릴 곳에 부려야죠. 그레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꿍얼거리자 벤자민은 그것도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찡그려진 미간을 검지로 눌러 폈다.

“그보다, 얼른 일어나십시오. 당신을 기다리는 아이가 있으니까요.”

“기다리는 아이요?”

“예, 그 마을에서 보낸 아이입니다. 당신께 드리는 소소한 보답이라고 하더군요. 꽤 마음에 드실 겁니다.”

“……당신께서 그렇게 말하니까 빨리 나아야겠네요.”

“그럼요. 그러라고 말한 겁니다. 이래 보여도 제가 꽤 계획적이니까요.”

⋆★⋆

온몸이 무겁고, 숨쉬기 어려웠다.

충만한 기억이 부서지며 눈을 뜨자, 화려한 천장이 보였고 그다음 부드러운 밀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

“부인, 일어나셨습니까?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쓰러져 계셔서 진찰하기 쉽게끔 본관으로 옮겼습니다.”

침대맡에는 벤자민이 앉아 있었다. 그는 그레이스가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은 다른 하녀가 갈아입혔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기억 속에서나 지금이나.

그레이스가 아플 때는 늘 벤자민이 옆에 있었다.

“왜 하필 그런 이름으로 지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잉걸불의 숯은 까맣거든요. 그리고 그때가 가장 뜨겁다고 들었어요. 호박이 아니라 잉걸불이라는 의미의 앰버예요.”

“그거 참, 이 아이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그리고 모든 순간에 늘 벤자민이 있었다. 그레이스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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