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원래의 그레이스도 알고 있었어.’
비록 아주 초반에 끊겨 버렸고, 이 정도의 증거만 남겨 뒀을 뿐이었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당신’이라는 건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스노우드롭은 신전 방문 일자 근처에 그려져 있었다.
즉, 그레이스는 신전에 의해 죽음을 선물받고 있었다.
그녀는 서서히 자신이 죽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그레이스는 섬찟함을 느끼며 제 목을 문질렀다.
‘혹시 원작과 다르게 그레이스가 먼저 죽어 버렸고, 그 몸을 내가 차지한 거라면……?’
그 영혼을 되돌려받을 방법이 없어, 원작대로 진행하기 위해 세상이 또 다른 영혼을 가져온 거라면?
그레이스는 그리 가정하면서도 소름이 돋았다. 너무나도 끔찍했다.
“그건 싫어……!”
이미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나중에 벤자민에게 자신이 원래의 그레이스가 아니라는 걸 밝히더라도, 그녀는 여기서마저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밝혀야만 해. 어떻게 죽이려고, 왜 죽이려고 했는지. 이미 죽였다면, 그 증거까지.’
두려움이 그녀의 발목을 잡아챘지만 원래의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서서히 죽어 갔다는 사실을 깨닫자 두려움보다 슬픔이 앞섰다.
이는 전생의 기억 탓이었다.
그녀가 삶을 이어 나가는 것을 반기는 이는 거의 없었고, 죽기 직전에는 병원에서 홀로 쓸쓸히 보내야 했다.
어쩌면 그녀가 죽기를 바라는 가족이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레이스, 펠튼 공작 부인마저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면 동질감이 들었다. 이는 동정이 아니었다.
제가 죽기를 바라는 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만큼 비참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그레이스는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주변에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원작에서의 벤자민은 혹시 이 기록을 보고 이상한 점을 눈치챘던 걸까?’
그레이스 때문에 꽃의 이름과 특징을 전부 외웠던 벤자민이라면, 그녀처럼 그림 속의 차이점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 있어.’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야 알게 된 죽음의 진실. 그리고 분노의 방향. 그러나 그레이스는 지금 벤자민에게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시기상조야. 신전 혼자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벤자민이 주축인 마도구 연합과 손을 잡은 거라면 그 이유를 모르겠어.’
마도구 연합이 신전과 손을 잡은 이유, 그레이스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레이스가 마도구 연합에 관해 갖고 있는 지식은 거의 원작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마도구 연합과 손을 잡은 게 아니라 그냥 우연인 건가?’
마도구 연합에서 보내온 가구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건 그저 우연이고, 신전만이 이 사실을 알고 사용하는 거라면?
그레이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보다 벤자민은 왜 마도구 연합에서 가구를 받아 오는 거지?’
문득, 그레이스는 여기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마도구 연합에서 가구를 왜 만들어?”
‘가구 공방도 아니고.’
마도구 연합에서 만든 가구라고 마법적 특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평범했다.
‘뭔가 다른 점이라도 있나?’
굳이 마도구 연합에서 가구를 만든 이유, 그것도 펠튼 공작가였으니 벤자민이 그것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귀한 것이라거나, 그런 이유 말이다.
“이건 직접 물어봐야겠어.”
⋆★⋆
마침 당일 저녁에 약속이 있었다.
벤자민도 기대가 되었는지 저녁 식사 시간에 늦지 않았다.
담백하고 가벼운 메뉴로 구성된 식사는 그레이스를 신경 쓴 것이 느껴졌다.
‘맛있다.’
“입에 맞으십니까?”
“네, 엄청요.”
“다행입니다. 부인과의 식사라 더 신경 쓰라 일러두었으니 말입니다.”
그레이스는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제 입에 딱 맞는 식사를 야금야금 먹으며,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재었다.
무턱대고 꺼내면 ‘갑자기 왜……?’ 하고 여겨질 수 있었던 탓이다.
‘과거의 기억에 대한 반응도 영 찜찜해서 대뜸 말하기도 그렇단 말이지.’
그레이스를 좋아하는 건 틀림없으면서 숨기는 건 많은 듯한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녀는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직설적으로 질문하면 거짓말은 안 하는데 말을 돌릴 거 같다고 해야 하나.’
그레이스는 벤자민에 대해 속으로 그리 평가하며 포크로 로스트 비프를 콕콕 찌르고 있었다. 의도한 행동이라기보다는 생각에 잠겨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녀가 약간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것을 눈치챈 벤자민이 먼저 물었다.
“부인, 신경 쓰이는 것이라도 있나요?”
“네? 예, 음…….”
습관적으로 아니라고 하려던 그레이스는 바로 입을 다물고 끄덕였다.
“저번에 샤를 소후작 부인의 베이비 샤워를 다녀왔던 거 기억하세요?”
“예, 부인께서 꽤 좋은 시간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일전에 드레스를 고를 때도 언급하셨던 걸 보면요.”
‘그랬었지, 참.’
그레이스는 그날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날 베이비 샤워가 진행된 장소가 너무 아름다워서, 후에 후작 부인께 여쭈었더니 전부 소후작 부인께서 총괄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몸이 무거우실 텐데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소후작 부인이 호스트이니 당연한 거였어요.”
“다른 이에게 일임하는 경우도 있긴 하니, 놀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벤자민은 부러 그레이스의 편을 들었다. 그레이스가 현재 모든 안살림을 다른 사람에게 일임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모든 안살림의 권한을 돌려받을 생각은 없었다. 지금 전부 다시 받는다고 해서 잘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이혼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돌려받는 건 모든 기억이 되돌아오고 안정된 다음, 집안일에 익숙해진 다음이어야 했다. 미숙한 관리로 잘 돌아가고 있는 집안을 헤집어 놓을 순 없었다.
그레이스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안살림의 권한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네, 제가 다른 이의 도움을 받고 있죠.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누구나 도움을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네, 그래서 말인데요, 각하.”
그레이스는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제까지 모든 별관의 가구를 전부 각하께서 일임하여 관리하셨다고 들었어요. 부끄럽게도 가구가 마도구 연합에서 온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는데, 혹시 이번 연합 방문 때 이것에 관해서도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가구에 관해서요?”
“네, 그래도 제가 이 가문의 안주인인데 저택을 채우고 있는 가구의 출처도 모른다는 게 부끄럽더라고요. 그런데 마도구 연합에서 가구를 만든다는 건 들어 본 적 없어서, 사실 호기심이 들기도 하고요.”
벤자민은 이런 요청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잠시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가 끄덕였다.
“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혹시 이제까지 제가 마련해 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뇨! 각하께서 마음 써 주시는 것은 늘 감사하죠.”
순식간에 풀이 죽은 강아지가 되려는 듯한 벤자민의 태도에 그레이스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마도구 연합은 보통 마도구를 만드는 곳이잖아요. 각하께서 이상한 물건을 저택에 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건 제가 누구보다 믿고 있어요.”
‘물론 엄청 이상하고, 위험한 물건이긴 하지. 펠튼 공작가의 누구도 모르는 거 같다는 게 문제지만.’
그레이스는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문제를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래, 벤자민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믿긴 하지만, 그런 일이 생겨 버렸다.
“다른 가구 공방이 아니라 굳이 마도구 연합에서 가구를 받아 오는 것이 신기해서요. 익숙한 걸 보면, 이제까지 마도구 공방에서 가구를 납품해 온 것 같은데…… 전 이제까지 안살림을 하지 않았으니까 몰랐잖아요?”
“…….”
“그러니까, 일단 이것부터 차근차근 알아보려고 해요.”
현재 이혼 숙려 기간이었던 만큼, 그레이스의 이런 발언은 벤자민에게 매우 기꺼울 일이었다.
그레이스가 펠튼 공작가 내부 실정에 관여를 하는 만큼 그녀가 이혼에 대한 입장을 철회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마도구 연합에서는 공식적으로 가구를 만들어 팔지는 않습니다. 아직 시제품 단계라고 하는 게 옳겠군요. 다른 새 마도구를 먼저 공작가에서 써 보기도 하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만…….”
그레이스는 이전에 사용했던 야광 염료를 떠올리며 끄덕였다.
“위험성은 0임이 확인되었기에 별관에 들이고 있습니다. 현재 상용화되지 않는 것은 연합에서 만들 수 있는 양이 극소량이라서 그런 것뿐이라서요.”
“만들 수 있는 양이 극소량이라는 건 일반 가구는 아니라는 거네요.”
“예, 어차피 일반 가구였으면 굳이 마도구 공방에서의 납품을 허가할 필요는 없지요. 다른 더 좋은 가구 공방이 있지 않습니까?”
벤자민이 하하 웃었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마정석의 재활용 때문입니다. 쓰임이 다한 마정석을 어찌 쓸까 궁리하던 마도구사들이 이를 모아 마감재를 만들었더군요. 이 마감재를 가구에 발라 마무리하면 더 단단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그거 진짜 신기하네요.”
역시나 원작에서는 들어 본 적 없으나, 재밌는 정보였기에 그레이스의 흥미를 끌었다. 이건 순수하게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걸 왜 굳이 가구에 바르죠? 마도구에 사용하면 더 오래 사용할 수 있지 않나요?”
“마도구에 바르면 어떤 원리에서인지 마도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곤 하더군요. 오히려 금방 고장 나서, 일반 물건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레이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별관 서재의 가구도 마도구 공방의 것인가요?”
“……아뇨, 그곳의 가구들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 불길한 안개들은 전부 마감재의 영향이려나.’
마정석의 재활용, 다 쓴 마정석이 뭐라고 그레이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외에는 별 차이점이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도구 연합이 벤자민에게 숨긴 게 있다는 거고.’
“제도에 있는 연합에서 이에 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으면 즐겁겠네요.”
“예, 만약 원하신다면 제가 따로 언질해 두지요.”
“아뇨, 미리 말하면 과하게 준비할 것 같아서요. 저 때문에 많은 준비를 시키고 싶지 않아요. 일도 많을 텐데.”
그레이스는 옅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표정을 자아냈다.
물론 진짜 그들을 신경 써서 그리 말한 건 아니었다.
마감재가 정말 원흉이었으면 어떤 말을 맞춰 둘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차피 그레이스가 방문하는 건 예정된 일이었고, 그들도 나름대로 준비를 해 둘 터였다.
이것까지 준비하게끔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