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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16)화 (116/131)

116화

그레이스는 이 몸에서 눈을 뜬 후, 기억이 없어 꽃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럼 좋아하는 꽃은 없습니까?”

“꽃, 꽃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종류는 잘 몰라서요. 이름을 모르니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

“그렇군요. 그런 문제는 고려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뒤, 정원 덤불 앞에는 꽃의 이름이 적혀 있는 팻말이 꽂혀 있었다.

“……아.”

일전에 샤를 소후작 부인의 유리정원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그는 자연스럽게 수많은 꽃의 종류를 그레이스에게 설명해 주었다. 마치 아주 예전부터,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레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현기증이 일었다.

‘그런 게 아니었어.’

벤자민은 꽃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은 그레이스였다.

아니, 그레이스는 꽃이 아니라 식물에 관심이 있었다.

많은 이들은 그녀가 꽃에만 관심이 있다 생각했으나, 벤자민은 그레이스와 있을 때 꽃보다 식물에 관해 말하고는 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가 나고 자란 가족들보다 그녀를 더 잘 알고 있었다.

‘지킬 필요도 없는 약속을 혼자 지킨 거야?’

그레이스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하나하나 설명했던 벤자민을 떠올리며 그를 향한 어떠한 표현도 꺼낼 수 없었다.

“공부했습니다.”

“언젠가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에 공부했습니다. 들킬 줄은 몰랐지만요.”

그날, 벤자민이 말한 공부는 샤를 소후작 부인의 온실의 꽃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심장이 시리도록 아팠고 먹먹했으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이리만치 기쁜 마음이 들었다.

쿡쿡 찔리는 날카로운 충만함이 온몸 가득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여기 청소를 부탁할게.”

“네! 완벽히 끝내 놓을게요.”

그레이스는 일전에 새로 만든 압화를 전부 챙겨, 본관으로 뛰어갔다. 심장이 거세게 뛰어 숨이 찼지만,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각하!”

늘 산책하던 시간도 아니었기에 벤자민이 정원에 나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벤자민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부인? 무슨 일이십니까? 어쩐 일로 이리 급하게 달려오십니까?”

“이거, 이거 전부 가져요.”

“……네?”

“의미 같은 건 상관없이, 그냥 전부 다 드릴게요. 예전에 각하께서 주신 꽃다발로 만든 거예요. 전부 다 드릴게요.”

“…….”

그레이스는 양손 가득 들린 압화를 벤자민의 손에 들려 주었다. 한껏 눌려 얇아진 꽃은 옅은 바람에도 흩날렸다.

“아.”

그레이스가 흩날리는 꽃을 잡으려고 했지만 잡힐 리가 없었다. 바짝 말라 약해진 것은 바람에 날려 산산조각 났다.

“제, 제가 주워 올게요.”

“괜찮습니다, 부인. 정말로요. 그보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네?”

“전에 말했잖습니까. 사실 그 꽃다발, 전부 압화로 만들기 좋은 꽃으로 만들었다고요. 당신께 하나라도 받기 위한 제 음모였다고 하지 않았나요?”

버석 마른 꽃잎이 흩날리는 틈 사이로 그가 웃었다.

‘……바보 같아.’

예전의 추억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얼마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한다고 기뻐하는 사람이라니.

아니, 애초에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현재의 그레이스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자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레이스와 벤자민에 대한 기억을 하나둘 떠올릴 때마다 점점 더 감정은 생생해져만 가는데, 자신은 그저 그녀의 운명을 빼앗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왜 아무도 못 알아보는 거지?’

오랜만에 만난 그레이스의 가족도, 어쩌면 그녀의 가족보다 그레이스를 잘 알고 있을 벤자민마저도 그녀의 변화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행복 다음에는 불안이 찾아온다.

늘 그랬다. 그 이유는 원래 이것이 제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 기억났어요.”

그럼에도 현재로서 그레이스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그레이스라고 이 몸에 빙의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몰랐고, 이걸 말한다고 해서 누가 믿어 주지도 않을 터였다.

‘사실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

그녀의 감정과 기억을 물려받았으니 그레이스라고 해도 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벤자민이 그레이스를 얼마나 사랑했고, 원작과 달리 주변에서 얼마나 그레이스를 아꼈는지를 알게 되어 망설이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그레이스의 삶을 빼앗아도 되는 건 아니잖아.’

점점 나는 행복해지고 있는데, 그레이스 펠튼의 삶은 그렇게 불행하게 별관에서 끝나는 게 옳았던 걸까? 하고 말이다.

‘모든 기억이 돌아오면, 내가 왜 하필 이 몸에 들어왔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다음에는 진짜 그레이스의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벤자민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수 있을까?’

벤자민의 애정이 거짓이 아니라 진심임이 더욱 와닿았기에 오히려 간절해졌다.

“그때 나팔꽃을 준 건 별 의미 아니었어요. 신경 쓰이게 했다면 미안해요.”

벤자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 옅은 긴장감이 흘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예전에 그 나팔꽃 화분 말이에요.”

그레이스는 그제야 그의 손에서 시선을 옮겨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벤자민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평소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을 보고 있는 사람의 것.

그레이스는 전에도 이런 표정을 지은 그를 본 적 있었다.

‘전에, 그때도 이런 적 있었어.’

반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 그때도 벤자민은 이랬던 것 같았다. 이제야 돌이켜보면 말이다.

분명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차오를 만큼 충만하게 만드는 기억이었는데, 그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지만 그것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벤자민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되돌아왔다.

“제 부끄러운 일을 떠올리셨습니다.”

“부끄러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는걸요.”

“저는 부끄럽습니다, 부인. 그런 부끄럽고 사소한 일을 떠올리실 줄은 몰랐네요. 혹, 다른 일은 또 기억나신 게 없으신가요?”

‘다른 거?’

다른 거라고 해 봤자 식물에 관한 지식뿐이었다. 이에 대한 걸 미주알고주알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기에 그레이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군요, 뭔가 또 기억나시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벤자민은 분명 다정한 미소를 지었으나, 평소와 달리 안심한 듯해 보였기에 그레이스는 입 안이 껄끄러웠다.

‘분명 행복한 기억을 찾은 건데, 왜 이런 반응이지?’

그때, 둘 사이를 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

“어디 또 가시게요?”

그레이스는 벤자민의 근처에 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급한 서신이 와서 말입니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돌아오시면 같이 저녁이라도 먹을래요?”

그레이스의 제안에 벤자민은 눈을 크게 떴다가 환히 웃었다.

“영광입니다, 부인.”

이것만 보면 전혀 문제없었다. 벤자민은 그레이스에게 전혀 숨기는 것 없는 애처가처럼 보였다.

‘하지만 왜 내가 과거에 대해 떠올릴 때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딱히 나쁜 이야기를 꺼낸 적도 없는데 그는 전혀 반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레이스가 벤자민이 떠난 방향을 보다가 다시 별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직 여력이 남아 있어 다른 오브제를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마님, 청소가 완료되었어요.”

그레이스가 별관 안으로 들어가자 샐리가 그레이스에게 다가가 일기장을 내밀며 말했다.

“이게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마님의 개인 물품인 것 같아 확인하지 않았어요.”

“고마워.”

내용을 정말 보지 않았는지는 안색을 살피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기색의 샐리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레이스는 일기장을 든 채 검은 안개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 서재 쪽으로 향했다.

“…….”

벤자민은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그레이스를 사랑한다면 그 추억이 쌓이고 쌓여 사랑하게 된 것일 텐데 당연히 같은 기억을 떠올리길 바라지 않을까?

그녀는 신전과의 상담 때문에 써 내렸던 의미 없는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

팔락팔락, 넘기던 그녀는 어느 순간 손이 멈췄다.

“……어?”

무언가 이상한 것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무런 지식도 떠오르지 않을 때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었지만, 이제는 이상했다.

멈춘 손이 다시 빠르게 움직이며 맨 앞 페이지로, 그리고 모든 페이지를 확인했다.

“이, 이건?”

기록이 멈춘 마지막 페이지는 꼬불거리는 글씨체에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삭막하며, 우울했다.

하지만 앞 몇 페이지는 나름대로 꾸며낸 흔적이라는 게 존재했다. 보통은 그냥 심심해서 꾸몄겠거니, 싶겠지만 그레이스의 눈에는 다른 의미가 보였다.

매 페이지에는 같은 꽃이 그려져 있었지만, 군데군데 다른 꽃이 끼워져 있었다.

뒤로 갈수록 그레이스는 이에 대한 지식을 잊어버려 그리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전까지는 이 행동을 이어 나간 것으로 보인다.

‘꽈리, 알리움, 시스투스…….’

꽈리의 꽃말은 거짓, 알리움의 꽃말은 무한한 슬픔, 임박한 죽음.

‘……그리고 스노우드롭.’

이는 희망이나 위로를 상징하는 꽃이었으나, 그레이스는 스노우드롭에 덧대어 그려진 리본을 보며, 이와는 다른 의미임을 깨달았다.

스노우드롭은 선물로 주면 의미가 바뀌었다.

「당신의 죽음을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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