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15)화 (115/131)
  • 115화

    ‘아니, 애초에 벤자민이 이런 걸 만들게 한 건가?’

    예를 들면, 벤자민과 신전과 마도구 연합이 작당해서…… 그레이스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그가 범인이면 이렇게까지 번거로운 수를 쓸 필요가 없지.’

    그레이스는 냉정을 되찾았다.

    만약 이 검은 안개가 처음부터 그레이스를 죽이기 위한 절차 중 하나였다면, 벤자민은 굳이 이런 긴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벤자민이야말로 그레이스를 없애기 가장 쉬운 위치에 있는데, 뭐 하러 이런 수고를 들이겠는가.

    ‘벤자민은 정말 이 일을 전혀 몰랐을 확률이 거의 100퍼센트야.’

    “…….”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오진 않았다.

    무턱대고 신전과 마도구 연합이 합심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이제 이 안개를 없앨 수도 있어. 전에는 어째서인지 그 검은 조약돌은 터졌지만, 잘 조절하면 안개만 사라질 거야.’

    일반인의 눈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으니, 정화된 가구를 교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경물만 바꿔도 괜찮을까요? 저는 지금 가구가 마음에 들어서요.”

    하지만 굳이 전부 갈아치울 필요는 없었다. 벤자민이 이걸 굳이 받아 온 이유가 지난번 조약돌 폭파 사건 때문이라면, 이 정도만 받아 주면 되었다.

    “물론이지요.”

    역시나 그것이 가장 신경 쓰였는지 그는 선뜻 응했다. 나머지는 거기서 덤으로 주길래 받은 것으로 보였다.

    “아, 그리고 다음에 부인과 찾아가겠다고 하니 다들 좋아하더군요. 아무래도 부인을 직접 본 적 없으니 기대되는 듯합니다.”

    “그거 기쁘네요, 사실 그때의 일 외에도 전부터 쭉 마도구 연합에 대해 궁금했으니까요.”

    그레이스는 그들이 정말로 순수하게 자신을 만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스러웠지만 티 내지 않았다.

    “정말인가요? 몰랐는데요.”

    “왜요? 각하와 관련이 있는 곳인데 당연히 관심이 있죠.”

    “…….”

    벤자민은 그레이스의 말에 붉어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

    그레이스는 확연히 보이는 그의 반응에 괜히 민망해졌다.

    ‘전에도 저렇게 얼굴이 붉어졌던 거 같은데.’

    저렇게 표정을 잘 숨기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한 가문, 그것도 이렇게 큰 공작가를 운영하는 건지. 그레이스는 괜히 벤자민의 얼굴을 직시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 둘을 멀리서 보던 아벨만 벤자민을 가증스러운 존재를 보는 눈으로 볼 뿐이었다.

    물론 다른 곳에서 저런 반응을 보이면 안 되기는 했지만, 벤자민이 타인의 앞에서 저런 표정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사회성을 최대로 끌어모은 다정한 사람의 행태만 보이다가 그레이스의 앞에서나 진짜 사람처럼 행동하니 아무리 제 상관이더라도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마님께서는 평생 모를 일이겠지.’

    ⋆★⋆

    ‘마도구 연합을 먼저 들른다고 했지? 그러고 보니까 실베스터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그레이스는 제일 처음 발견했던 체크된 일기장을 펼쳤다. 엑스자가 표시된 일기장은 그동안 그레이스가 몇 번이나 ‘상담’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원작에서는 그렇게 정신을 길게 잃지 않았는데, 차이점이 있었나?’

    그 자리에 그레이스와 벤자민이 있었다는 점? 그레이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일기장에 적힌 내용을 다시금 차근차근 읽었다.

    ‘일기라는 것과는 달리 자꾸 누군가에게 보고하는 내용,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어떤 기분인지…….’

    그리고 초반에는 그나마 내용이 많았지만, 뒤로 갈수록 부실해졌다. 감정 위주로 변했고 아무 생각 없는 사람도 읽으면 우울이 전염될 것만 같았다.

    ‘원작 소설에서는, 원래의 운명 속에서의 그레이스는 정말 살해당한 게 맞을까……?’

    그레이스는 속이 울렁거렸다.

    활자 속의 벤자민은 분명 그녀를 투병 중 사망으로 공표하였으며, 그에 대해 더 이상 깊게 파고드는 것을 금지하였다.

    ‘애초에 자살이었던 거라면?’

    그리고 그 자살의 원인이 이 우울이라면, 그것이 자살이 맞을까? 그레이스는 침대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산하게 깔린 안개가 보였다.

    아직 침대 아래에 치워지지 않은 가구 탓에 침실은 또 안개로 자욱했다.

    ‘또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나는 아리아처럼 무작정 정화할 수는 없어.’

    그레이스는 신성력을 다루는 방법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본능, 천성과도 같다고 하였지만 그녀는 이상하게 다루기가 어려웠다.

    그레이스가 현재 없앨 수 있는 안개는 정해져 있었다. 무작정 능력을 쓴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를 알게 된 계기는 그녀가 보리스를 속이기 위해 침대 아래에 안개를 뿜어내는 오브제를 숨길 때였다.

    안개가 닿을 때 기분이 나빴지만, 위협이 느껴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즉, 그레이스가 위협을 느낄 정도라면 아직 그녀가 어찌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는 의미였다.

    ‘내가 진짜 성녀는 아니고, 빙의자라 나름 특별한 혜택 비슷한 걸 받은 거라 그런 건가 보지.’

    만약 원래의 그레이스에게 신성력이 있었다면, 이 환경에서 무력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신성력이 있었으면 세상에 위협이 된다는 식으로 말하지도 않았을 거야. 성녀는 유일한 존재인 만큼 더욱 귀하게 대하는 거니까.’

    마도구 연합과 제도 신전 내부, 둘 다 그레이스가 자주 드나들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그 둘이 연합을 하고 있다면 그 증거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증거를 찾고 나서도, 진짜 내가 이 세상에 위협이라는 결론만 나오면 어떡하지?’

    그레이스는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그럼에도 그녀가 움직이는 이유는 이미 몇 가지 진실에 근접하였으며, 여기서 멈춘다고 하여 그들이 그만두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른 채로 죽느니 알고 대비하는 것이 낫다.

    차라리 그때 보리스에게 물어볼 기회가 생겼을 때 물어볼 걸 그랬을까, 싶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어차피 그건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을 거야. 그 정도가 보리스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대답이었을 거고.’

    다만 마도구 연합과 연관이 있는 걸 알았다면, 그에 대한 힌트라도 캐낼 것을. 그레이스는 아쉬움에 눈을 찡그렸다.

    ‘그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레이스는 주변에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 되찾기…….”

    왜 하필 딱 그때의 시간만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그레이스는 입가를 매만졌다.

    ‘거울의 방에서 전대 공작 부부에 대한 반응도 이상했고.’

    펠튼 공작가에선 전대 공작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임에도,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이건 버킨에게 물어보기도 애매해. 공작 부인인 내가 모른다는 게 이상한 부분이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이제까지 유실된 기억을 차근차근 되찾는 쪽이 낫다.

    이제껏 실린 신문을 조사해 볼까 했음에도, 그레이스는 그 생각을 철회했다.

    그레이스에 관해 과하게 좋지 않은 이야기가 잔뜩 실려 있던 곳이 신문 및 잡지였다.

    ‘그리고 서부 오염 관련 기사에서도 나에 관한 이야기는 쏙 빠져 있었고.’

    어떠한 왜곡, 또는 은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예전 신문 기사를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었지만, 완벽한 건 아니었다.

    그레이스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게 유일한 해답일 수도 있었다.

    ‘일단, 침대 아래에 있는 것의 안개부터 없애 볼까?’

    그레이스는 몸을 숙여 침대 아래에 있는 램프를 꺼냈다.

    둘러싸인 검은 안개가 기분 나빴으나, 전에 바꿔치기한 펜듈럼 덕분에 신성력을 쓰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레이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자.”

    그레이스는 램프를 꽉 쥐고 정신을 집중했다. 최대한 긴장하지 않고, 실패해도 괜찮다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최근에 가장 즐거웠던 기억,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은 조금 전, 벤자민의 붉게 타오른 얼굴이었다.

    “……!”

    순식간에 그레이스의 주변으로 눈부신 빛이 가득 들이차며, 검은 안개가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처럼 사라지고 또다시 묻혀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 밑바닥에 있던 또 다른 흔적이 다시금 선명하게, 그녀의 머릿속에.

    ⋆★⋆

    “부인께서 키운 식물이 유독 생명력이 넘쳐 푸르다며, 어머니께서 그러시더군요.”

    “어머님께서 그러셨다니 기뻐요.”

    “하지만 저는 조금 슬픕니다.”

    “무엇이요?”

    그레이스의 질문에 벤자민이 조금 뾰로통한 얼굴이 되었다. 다정한 그가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한 번도 식물을 선물해 준 적 없잖습니까? 하지만 어머니도, 아버지도 받으셨다며 매번 자랑합니다.”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닌걸요. 어디에나 있는 식물이에요.”

    “당신께서 키운 것은 어디에나 있지 않습니다, 부인.”

    퍽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그레이스는 조금 난처한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 벤자민 또한 자신이 다소 유치하게 굴었음을 아는지, 금방 수그러들었다.

    “그럼 다음에는 당신에게 드릴게요. 식물을 그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요.”

    “식물을 좋아한다기보다는…….”

    “……?”

    벤자민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흘리다가 그레이스가 들고 있던 화분을 가리켰다.

    “저는 지금 부인이 들고 있는 것이면 됩니다.”

    “이거요?”

    그레이스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절대 안 돼요.”

    “왜요? 이미 임자가 있는 것입니까?”

    “아뇨, 당신에게는 주고 싶지 않아서요.”

    그레이스가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태도에 벤자민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사실 별 의미는 없지만, 이거 나팔꽃이거든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음, 당신은 마도구나 다른 건 전부 잘 알면서 식물에 대해서는 잘 몰랐었죠.”

    “어차피 앞으로도 부인께서 전부 다 가르쳐 줄 텐데 무슨 상관입니까?”

    “언젠가 제가 까먹어 버리면 어쩌려고요.”

    “제 현명한 부인께서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벤자민은 퍽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제가 전부 다 외워서 부인께 알려 드리겠습니다.”

    ⋆★⋆

    쨍그랑-!

    그레이스의 손에 들린 램프가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마, 마님! 무슨 소리인가요?!”

    “괜찮으세요?!”

    잠시 뒤, 밖에 있던 사용인들이 안으로 들어와 그레이스의 안위를 살폈으나 그레이스는 그 어떤 대답은커녕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지식이 해일처럼 밀려들어왔다. 온갖 식물의 이름과 정보들, 이제까지 그레이스가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실은 잊고 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벤자민과 있었던 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팔꽃.”

    그레이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레이스가 벤자민에게 나팔꽃을 주지 않으려고 한 이유는 사실 정말 별것 아니었다.

    나팔꽃은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가 있었지만 덧없는 사랑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내가 예전에 벤자민한테 줬던 책갈피에 무슨 꽃이 끼워져 있었지?’

    그녀의 심장이 시릴 만큼 아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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