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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14)화 (114/131)
  • 114화

    버터나 우유에 잘 녹는다. 이는 유지방에 잘 섞여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보통 약을 우유와 같이 먹지 말라고 의사들이 권장하고는 했어.’

    그레이스는 지난 생, 병원에서 의사가 약을 주며 하곤 했던 권장사항을 떠올렸다.

    그 이유는 일부 약품은 우유와 같이 먹을 시 흡수가 저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하가 되는 만큼 효능은 늦게 발휘됐다.

    ‘신성력의 정화 능력은 약에 잘 통하지 않게 되어 있어.’

    이는 약제사 연합이 신전과 결합하며 제일 먼저 한 연구였다. 약과 독의 차이는 복용량의 차이였기에 신성력은 약의 효력 또한 없애 버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약제사 연합은 연합 내에서 만든 약은 사제들의 신성력에도 효력이 유지되게끔 만들었다.

    ‘대체 뭘 넣었길래 신성력에도 견디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성녀인 아리아의 성력은 너무 강했기에 아리아가 성력을 퍼부으면 약의 효능은 사라지는 것으로 추측되었고 그레이스는 그렇기에 아주 조금씩 보리스의 몸에 성력을 부어 넣었다.

    역시나 그의 몸 안에 있던 약이 효능을 보이자, 보리스는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

    “……됐나?”

    그레이스는 정신이 몽롱해 보이는 보리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안개만으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었구나.’

    그레이스는 숨겨 두었던 펜듈럼을 꺼내었다. 그것이 빛을 드러내자 주변을 둘러싸던 안개는 달아나듯 더욱 멀리 떨어졌다.

    그럼에도 보리스의 옆에 달라붙는 검은 안개를 보니, 이 약은 모종의 연계 작용으로 인해 이 검은 안개를 더욱 잘 불러들이는 듯했다.

    혹은 약이 체내에서 활성화되었을 때, 보호할 만한 개체가 없으면 이러한 현상을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일단 약의 효력이 몸에 돌 때까지 기다리고 펜듈럼을 가져갈 수도 있었으나, 그레이스는 가급적 자신이 겪었던 상황과 비슷하게 만들고자 했다.

    다르게 되었을 경우, 어떠한 변수가 일어날지 몰랐으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고 싶었던 탓이다.

    ‘이거 진짜 무슨 원리지?’

    분명 보리스도 신성력이 제법 강할 텐데, 마력증폭제의 효능이 이렇게 좋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레이스는 곧 침대 아래에 있던 검은 안개가 보리스에게 향해 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리 보리스가 제게 호의적이지 않다고 한들,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그레이스가 이 안개에 둘러싸였을 때 지내 온 삶이 그만큼 우울했기 때문이다.

    “괜찮나?”

    그레이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을 때였다.

    “……괜찮습니다.”

    보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레이스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혔다.

    “아닌가…… 잘 모르겠네요…….”

    어물쩍, 흐릿한 발음으로 대답하는 것이 무의식중에 나온 대답인 듯했다.

    “잘 모르겠어요. 괜찮나…….”

    “괘, 괜찮아요.”

    “괜찮은 거군요.”

    그레이스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이게 뭐야? 최면 아냐?’

    당황스러웠다.

    ‘뭘 묻든 간에 대답해 주는 건가? 아냐, 보통 이런 건 복잡한 건 안 될 텐데.’

    “오늘 저와의 상담은 덕분에 완벽히 끝냈어요. 고마워요.”

    “……무엇을요.”

    ‘진짜 장난 아니다, 이거.’

    이 약을 먹고 정신을 놓으면 이렇게 되는 건가? 그레이스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런데 왜 나는 그냥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지?’

    “베네디크 사제님, 앞으로 하는 질문은 그냥 잊어버리셔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다 기억 못하겠지만, 그레이스는 지금까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지난 상담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상담이 끝나고 나면 무엇을 하실 예정인가요?”

    “……조각상을 오른쪽으로.”

    “……?”

    보리스는 그 뒤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무리 최면 상태더라도 깊은 속내는 대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조각상?’

    이 세상에는 수많은 조각상이 있었다. 세상이 아니라 제국만으로 한정해도 셀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거라면 신성한 돌로 깎아 만든 걸 말하는 거겠지.’

    보통 사제들이 말하는 조각상은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니.

    ‘그런데 그걸 오른쪽으로? 무슨 말이지?’

    현재 보리스가 머무는 신전은 제도에 위치한, 아리아 또한 머무는 장소였다.

    ‘어차피 곧 방문하게 될 장소야.’

    그레이스가 입을 달싹이다가 그에게 물었다.

    “왜 저에게 이런 상담을 진행하는 거죠?”

    제대로 된 대답, 상세한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아주 조금의 실마리라도 원했다.

    그들이 정말로 그레이스를 괴롭히는 것이 목표라면, 대체 왜, 이런 짓을 해서 신전이 얻는 것이 무엇인가?

    보리스는 한참 침묵을 유지하다가 말했다.

    “……세상을 위해서.”

    “내 존재가 세상에는 위협이 된다는 건가요?”

    “예.”

    “…….”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레이스의 품속에 있는 펜듈럼이 빛나며, 한 줌의 안개도 그레이스에게 닿지 못했음에도 숨이 턱하고 막히며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 이유에 대해서는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

    이 ‘상담’은 너무나도 신기했다.

    보리스는 자신이 잠들었다는 것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상담을 완벽히 끝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통하지 않아. 성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통하고…….’

    그레이스는 헤어지기 직전 보리스의 상태를 떠올렸다.

    그는 약간 피로해 보였지만, 그레이스만큼 우울해지진 않았다.

    ‘노출 빈도의 차이인가……?’

    그보다, 대체 이 물건들은 왜 검은 안개를 뿜어내는 거지? 어디서, 무슨 원리로 어떻게 만들었길래.

    “공식적인 사죄 방문도 아니라면서, 꽤 좋은 선물을 주고 갔네요.”

    “좋기는 무슨! 줄 거면 신성력이 담긴 성물이라도 주고 가지.”

    그레이스는 저들끼리 모여 보리스가 떠날 때 그레이스에게 남기고 간 선물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다.

    번쩍거리는 목걸이는 휘황찬란한 보석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값어치야 나가겠지만, 그레이스는 이것이 벤자민이 주고 간 ‘그 목걸이’에 대한 신전의 답임을 알고 있었다.

    ‘뒤끝 장난 아니야.’

    “성물은 마님께서 주인님과 신전에 가시면 주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그게 좀 더 눈에 띄잖아요.”

    ‘아마 안 줄걸.’

    성물이 있으면 이 별관에 있는 검은 안개의 영향력이 미비해지니 신전에 직접 방문하는 날에도 그레이스에게 그런 물건을 줄 리가 없었다.

    보리스가 한 말이 다시금 뇌리에 박혔다.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고 위협적인 존재라니, 그레이스 펠튼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어?’

    그레이스는 원작 내에서 벤자민의 행동을 떠올렸다.

    ‘벤자민은 흑화하고 제도에 있는 신전을 부쉈어. 그리고 아리아를 납치했지.’

    만약 그게 아리아를 향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제야 이 결론에 도달했다.

    벤자민이 마지막으로 아리아에게 남긴 유언이 영 꺼림칙했지만, 만약 신전이 그레이스를 죽이고 나서 벤자민이 이 모든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의 흑화와 분노의 방향이 납득되었다.

    ‘그런데 신전이 왜 그레이스, 그러니까 나의 존재가 세상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걸까…….’

    혹시 신전에서 미리 그레이스를 해치웠기에, 원작 소설 내에서 그레이스와 관련된 역경이 묘사되지 않은 게 아닐까?

    그레이스는 여기까지 추측하자 속이 쓰려졌다. 그 대신 벤자민이 폭주하긴 했지만, 그는 세상을 향한 위협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예언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이 소설 내에는 없는데, 역시 소설 등장인물 외에 예언자가 있다거나…….’

    물론 그레이스 입장에서는 전혀 근접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만약 그 모든 것이 오해가 아니라 진실이었고, 그녀가 재앙 자체라면 사라져야 하는 게 세상을 위해서는 옳은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고.’

    그렇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낫지, 그레이스 펠튼은 이미 린덴으로 태어나서 펠튼으로서 삶을 이어 왔으며 지금은 다른 영혼이 그레이스의 모든 걸 이어받아 나아가고 있었다.

    다 같이 살고 싶지, 무언가를 위해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는 욕심쟁이에 이기적이라고 할지라도 살고 싶다는 욕구 앞에서는 이기적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았다.

    “주인님께서 돌아오셨나 봐요.”

    물건을 확인하던 고용인들은 바깥의 마차 소리를 듣고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최근 그레이스와 벤자민의 분위기가 예전에 비하면 훨씬 좋아진 것을 알고 말한 것이다.

    “가 봐야겠네.”

    “걸칠 만한 숄을 가져다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지금 갈 거니까.”

    역시나 그레이스는 벤자민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고민도 않고 바로 마중을 나가야겠다고 판단했다.

    예전이라면 절대 그러지 못했을, 그레이스 스스로는 전혀 깨닫지 못한 변화였다.

    그레이스가 밖으로 나가 보니 벤자민은 나갔을 때와 달리, 커다란 짐마차 몇 대와 함께 돌아왔다.

    “오셨어요?”

    그레이스는 짐마차를 힐끗 보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묻기 전에 일단 벤자민을 반겼다. 짐마차를 보고 있던 벤자민은 그녀가 마중 나온 것이 퍽 기쁜지 활짝 웃었다.

    “산책 중이셨습니까?”

    “아뇨, 각하가 오셨다고 하여 마중 나왔어요.”

    “……!”

    활짝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잠시 굳어, 그레이스는 제가 뭘 잘못 말했나 고민했으나 그것도 잠시 아예 배경에 꽃이 필 만큼 벤자민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보며 그레이스는 ‘아…….’ 하고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듣자 하니, 많은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베네디크 사제가 부인께 큰 무례를 저지르진 않았나 봅니다.”

    “제 실수만 있었는걸요. 이게 소문나진 않을까 걱정이네요.”

    “소문이 나면 출처를 추리기 쉬우니 걱정 마십시오.”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거지? 뒤처리?’

    벤자민은 그저 산뜻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레이스는 힐끗 그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보다 저 짐마차는 무엇인가요? 갈 때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 오늘 마도구 연합에서 받은 것입니다. 전부 부인께 드릴 선물이죠.”

    선물? 새로운 마도구인가? 하며 그레이스는 그제야 짐마차를 유심하게 바라보았다.

    “……?”

    짐마차의 틈새에서 불길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졌다.

    ‘저건…….’

    “제가 가서 봐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그레이스는 설마, 하면서도 이미 확신한 채 마차 문을 열었다.

    “……!”

    마차를 열자, 그 안에는 몇 가지 가구가 들어 있었다.

    ‘이, 이게…… 또 무슨…….’

    신전이 괴롭히는 것이 확실해졌는데 지금 그녀의 앞에 펼쳐진 것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 마도구 연합에서 가구를 주고, 그 가구에서 이런 기분 나쁜 안개가 나오는 거지?’

    “지난번에 조경물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연합 측에서도 좀 더 심혈을 기울였다고 하더군요.”

    “……조경물이요.”

    이제까지 그레이스의 별관 내 가구를 채운 것은 전부 마도구 연합이었다.

    ‘신전이 아니라?’

    신전과 마도구 연합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굳이 따지면 데면데면하지만 벤자민 덕분에 그럭저럭 우호적으로 이어지는 관계였다.

    ‘하지만 신전이 이 안개의 존재를 안다는 건, 마도구 연합도 이거랑 관련이 있다는 거잖아.’

    그레이스는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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