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물론 혼자 들어가면 사람의 시야를 속이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마님, 부르셨나요?!”
그레이스에게 정말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조금 속이긴 해야 하지만.’
무턱대고 보리스의 물건을 수색해 봐야 한다고 할 수는 없으니 거짓말을 살짝 첨가해야 했다.
“샐리, 잠시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아주 조금의 양심통을 느끼며 그레이스는 샐리를 붙잡았다. 지금 이 복도에는 샐리와 그레이스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각하를 위해 수를 놓은 손수건을 준비했었어. 지난 연회 때 드리려고 말이야. 근데, 그때 사건 사고가 많아서 드리지 못했거든.”
“어머…… 그런 일이 있으셨다니, 속상하셨겠어요.”
“응, 그리고 그 손수건이 지금 저 욕실에 있어.”
“……?!”
그레이스가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말하자 샐리의 얼굴에 거대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내가 베네디크 사제님이 욕실을 사용하기 전에 잠시 내부를 확인했거든. 그래도 안주인이고, 이렇게 큰 손님을 대접하는 것도 처음이니까…… 그런데, 그때 실수로 저기 안에 두고 나왔지 뭐니.”
“어, 어머나…….”
“각하야 내 솜씨를 보고 비웃지 않을 것을 믿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만한 실력은 아니라…… 혹시 괜찮다면 샐리 네가 내 손수건을 잠시 찾으러 안을 둘러봐 줄 수 있겠니?”
여기선 같이 들어가자고 말하면 정말 이상하게 보일 만한 일이었으니, 샐리만 보내는 게 옳았다.
“물론 각하께는 비밀로.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
“네, 걱정 마세요. 마침 수건도 안에 넣어드려야 했으니까요. 그보다 어디 두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아마, 파티션 근처의 협탁이나 세면대일 거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샐리는 선뜻 그레이스의 부탁에 응하며, 수건을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미안, 아무 데도 없을 거야…….’
벤자민을 위해 준비한 손수건은 그레이스의 품에 소중하게 들어 있었다. 그걸 주긴 줘야 하는데 언제 줘야 하나 여전히 고민 중이었다.
‘타이밍 한번 놓치니까 애매한데, 덕분에 좋은 핑계가 생겼네.’
본관은 많은 시설이 마도구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래, 이 욕실도 마도구 천지지.’
사실 이 제국만큼 마도구가 발전된 나라도 없을 것이었고, 그 중심이 펠튼 공작가이니 당연한 말이었다.
‘생각해 보면 별관엔 마도구가 적은 편인 거 같아.’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신성력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성력이 마도구와 상성이 극악인 만큼, 이를 망가트리는 건 쉬웠다.
‘그래서 보통 신성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체질을 알게 되면 제어하는 법부터 배우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아리아와 합을 맞추며 그레이스는 힘을 끌어내는 방법을 얼추 깨달았다.
그녀는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심호흡을 하고, 행복한 일을 떠올렸다.
강압적으로 쥐어짤 필요는 없었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그 사이사이에 그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순간은 분명 존재했다.
“……됐다.”
청록색의 빛이 손끝에서 일렁일렁 피어올랐다.
보통 신성력은 더러운 것을 정화시키기 위해 사용한다고들 알려졌는데, 그레이스는 이를 사용하는 법을 터득하자마자 마도구를 망가트리는 데에 사용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아이러니함을 느끼면서도 기분이 나쁘진 않아 피식 웃었다.
잠시 후, 욕실 안에서 당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지? 보통 이렇게 망가지지 않는데.”
“저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괜찮습니다.”
보리스가 신성력을 조절하지 못할 리가 없음에도 샐리를 위안하는 말이 들렸다.
“잠시만요, 중앙 관리실에 다녀올게요. 그전에…….”
샐리는 급하게 램프 하나를 챙겨 가 안에 피웠다. 그레이스는 힐끗 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도착할 시간이 되었네.’
“마님, 잠시 다녀올게요.”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구나.”
“네,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집사장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미안.’
그거 사실 내 탓이야. 그레이스는 절대 하지 못할 고해를 속으로 뱉으며 샐리를 배웅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시선은 보통 특징적인 곳으로 쏠리기 마련이었다. 펠튼 공작가야 어디든 볼만했으나, 지금 당장 욕실 내는 어두웠다.
‘그리고 방금 막 소란스러웠다가 조용해졌으니, 사람이 진정을 찾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불빛을 보게 되거든.’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소리에 민감해진다고들 하나, 그것은 정말 고요할 때에나 한정된다.
펠튼 공작가의 기사들이 본관으로 들어오며 약간의 소란이 들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인원을 차출하느라 서두른 탓이었다.
즉, 보리스가 지금 인기척을 죽인 그레이스를 눈치챌 여력은 없었다.
‘내가 뭐 첩자물 찍는 것도 아니고.’
그레이스가 욕실을 미리 확인해서 다행이었던 점이 있다면, 물건을 둘 만한 장소를 한정시켜 뒀다는 점이다.
욕조 바로 옆에 물건을 둘 수 있는 곳은 하나도 없었고, 보리스와 같은 성격이라면…….
‘저기 있다.’
파티션 바로 옆에 있는 작은 트레이.
그 아래층에 본 적 없는 주머니 하나가 있었다.
그레이스는 숨을 쉬는 것도 멈춘 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뻗어 주머니를 집었다.
‘안 들켰나?’
마침 바깥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보리스는 창밖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서둘러 주머니 안 내용물을 보자, 그레이스는 제 추측이 맞음과 동시에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눈을 찡그렸다.
과거, 그레이스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방문한 사제들도 이 신성한 돌로 만들어진 펜듈럼을 챙겨 왔다.
그러나 보리스가 가져온 펜듈럼은 황금색 빛이 아니라 옅은 하늘빛을 지니고 있었다.
‘……?’
그레이스는 잠시 눈을 찡그린 채 이를 내려다보다가, 이에 대해 고민하는 건 나중임을 깨닫고 서둘러 자신이 챙겨 온 더 이상 효능이 없는 팬듈럼과 바꿔치기했다.
‘어차피 내용물을 확인할 만한 시간은 없을 테니까.’
만약 확인한다고 해도 그레이스가 바꿔치기했다는 증거는 없으니 크게 위험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러면 보리스가 별관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할 테니 조금 손해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밖에 기회가 없으니까.’
다시 살금살금 밖으로 나가려던 중, 보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벌써 돌아왔나요?”
“……!”
그레이스는 바로 문 앞에서 숨을 흡 멈추며 입을 달싹였다.
‘어떡하지?’
어쩐지 운수가 너무 좋더라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여기서 어떡하지? 목소리를 속일 수 있을까? 어떻게 넘겨야 할까. 그녀가 이래저래 고민하던 중, 문 너머에 있는 로젤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로젤리아……!’
그레이스는 서둘러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보여 줬다. 그리고 바로 옆 협탁을 가리켰다. 로젤리아의 눈치라면 대충 알아서 해석하리라 믿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생각하더라도 로젤리아가 지키는 건 나니까, 도와줄 거야.’
“…….”
로젤리아는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두드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올라오며 전해 듣자니 욕실의 마도구 장치가 고장 났다고 합니다. 사제님께 끼친 불편은 후에 주군께 전부 전달하겠습니다.”
그녀는 딱딱한 어조로 보리스에게 말하며 그레이스를 밖으로 나오게 조치했다.
‘사, 살았다.’
“노크를 했음에도 사제님께서 대답이 없으셔서 혹시 문제가 있으신가 하여 임의로 판단하여 문을 열었으니, 이에 대해 마음이 불편해지셨으면 후에 내부의 규칙에 따라 처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보리스가 왜 말없이 문을 열었냐고 따질까, 미리 선을 긋는 것까지 완벽했다. 심지어, 서부 원정에서 들었던 발언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로젤리아, 그때 기분 나빴구나…….’
하긴 그게 기분 좋았을 리가 없었다. 보리스도 그때 제가 했던 말이 있었으니, 여기서 반박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레이스가 로젤리아를 향해 작게 입을 뻐끔거렸다.
‘반트린 경, 고맙네.’
그레이스가 고마움을 표하자, 문을 닫던 로젤리아가 옅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
‘그보다 왜 색이 다르지.’
만약 빛을 품고 있다면 똑같이 황금색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레이스는 이상함을 느꼈다.
옅은 하늘색이라니, 그레이스는 보리스의 외관을 떠올렸다.
‘보리스의 눈 색?’
미묘하게 다른 거 같은데, 착각인가.
보리스의 신성력을 담아서 그런 건가, 그레이스는 제 주머니 안에 있는 펜듈럼을 매만졌다.
‘잠깐, 애초에 이 팬듈럼의 빛 자체를 다른 사제들도 볼 수 있는 건가?’
만약 이 빛이 그레이스와 아리아의 성력과 비슷한 원리라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확인을 한다 해도 들킬 확률이 적으려나.’
그레이스의 추측이 맞은 건지, 아니면 안을 열어 보지 않은 건지 옷을 받은 보리스는 평온한 얼굴로 욕실에서 나왔다.
“오랜만에 손님이 오셨는데, 자꾸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아 뵐 면목이 없네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뜻밖의 신세를 졌습니다. 늦었으니 서둘러야겠습니다. 지금 바로 별관으로 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그레이스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보리스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머니 안에는 보리스가 가져온 진짜 펜듈럼이 있었다.
‘잘할 수 있을 거야.’
침대의 안개는 이미 사라져 버렸기에, 그레이스는 침대 아래쪽에 안개에 둘러싸인 다른 가구를 숨겨 두었다.
‘괜찮아, 침착하자.’
보리스의 앞에서 안개가 보이지 않는 척 침착하게 방으로 안내했다. 다행스럽게도 안개는 펜듈럼 근처로 다가가지 못하는 게 맞았다.
‘굳이 신성력을 쓰지 않는 이유는 저 안개를 없애면 안 되기 때문인가?’
안개에 둘러싸이면 우울해지고,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레이스를 괴롭히고 있다. 그 괴롭힘에 우울이 포함되어 있다면, 펜듈럼을 들고 다니며 신성력을 쓰지 않는 행동이 전부 설명되었다.
그레이스와 보리스가 방에 들어서자, 상담을 위해 모두 밖으로 나갔다. 다들 익숙해 보였다.
‘나는 별로 기억에 없지만.’
사라진 1년 사이의 일이 아님에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는 그레이스가 받은 상담이라는 행위가 정말 평범한 상담 절차가 아님을 의미했다.
“부인, 그럼 자리에 편히 누우시죠.”
“……저, 베네디크 사제님.”
침대맡, 작은 의자에 앉은 보리스에게 그레이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잠시 손을 잡아 주실 수 있으실까요? 오랜만에 진찰을 받는데, 대단한 사제님께 받는다고 생각하니 긴장되어서요.”
“물론이죠.”
보리스는 선뜻 그레이스의 손을 잡았다.
‘됐다.’
손이 잡히자, 그녀는 조금씩 신성력을 보리스 쪽으로 흘리기 시작했다. 그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옅은 실을 뽑아내듯 가늘게.
이는 원래라면 별 의미가 없으며 사제끼리라면 신성력이 보강되기만 할 뿐이었겠지만, 지금 보리스의 상태는 약간 달랐다.
그가 오늘 섭취한 음식에는 그레이스가 평소 받았던 약이 들어 있었다.
“……으음.”
그의 눈이 탁하게 흐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