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심장이 불쾌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음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지? 남아 있던 다른 일기장에 적힌 내용이 뭐였지?
한참 전에 읽었던 내용을 머릿속에 빠르게 훑었다. 그것은 혼자 읽기 위해 쓴 것이었음에도 간간이 자신을 향한 불신이 담겨 있었다.
‘……약.’
그 약 때문이다.
가뜩이나 우울한 사람이 그 약들을 섭취하니 제대로 사고를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레이스는 순간 머릿속이 팽글팽글 돌며 머리끝까지 열이 뻗칠 뻔했다.
최악인 점은 이것을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단 점이다.
약의 생김새를 숨겼으며, 섭취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 그 자체로 보였을 테니까.
‘약을 섭취한 장본인도 그냥 본인이 이상한 거라고 생각했겠지.’
최악이다. 그레이스는 토로했다. 이제까지 힘들어도 약을 안 먹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벤자민이 그레이스에게 약을 먹으라고 한 이유는 정말 그 약이 좋은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벤자민은 그레이스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괜찮아지고 있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가 약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내몰려 있는 상황이었으면 더욱 그랬겠지. 나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신전밖에 없으니까.’
그러다가 최근 그레이스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벤자민은 그것을 약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신전 측에 말을 꺼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약을 처방하는 건 전적으로 약제사 연합과 신전 쪽이야. 벤자민의 입김이 닿을 수가 없어.’
혹시라도 벤자민이 약을 바꿨다면? 불현듯 그러한 가정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약의 제조법은 약제사 연합 측에서 꽉 쥐고 있는 것이었다. 즉, 약제사 연합이나 그와 관련된 신전만이 약의 레시피를 알고 있었다.
혹여 벤자민이 권력과 돈으로 빼돌리려고 한다 한들, 약제사 연합의 뒤에는 자르테 공작이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아무리 펠튼 공작가라도 약제사 연합을 이런 목적으로 건들긴 애매하지.’
그랬다면 필시 소음이 일어났을 것이다.
자르테 공작이 약제사 연합의 뒷배로 있고 신전과 손을 잡고 있다. 펠튼 공작가가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자르테 공작은 황족,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현 황제의 동생이었다.
무언가를 거래하는 거라면 몰라도 신전과 약제사 연합의 이름으로 처방된 약을 바꿔치기하는 건 벤자민에게 리스크가 컸다.
‘나를 없애기 위해 벤자민이 거래를 했다? 아니, 그랬으면 굳이 연회 날 신전을 먼저 찾아가는 그런 귀찮은 짓을 하지 않았겠지.’
거래를 했다면 직접 가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도 괜찮았을 터였다. 이미 손을 잡은 상태니까.
벤자민에게는 신전에 대한 일말의 신뢰도 없다는 의미였다.
‘벤자민이 나를 죽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가능성을 생각하는 내가 싫긴 하지만.’
‘혹시’를 염두에 두는 게 나쁘진 않다. 그레이스는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부인께서 최근 들어 외부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저택 내에만 있지 않기로 하였거든요.”
“그래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보리스가 앞에 놓인 케이크를 조각내어 먹으며 말했다.
“일전에 부인께서 화재 사건 때 무뢰배에게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
그레이스는 솔직히 저 말을 듣고 ‘저 사람은 목숨이 몇 개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여기는 펠튼 공작가 관할 내였고, 분명 보리스는 일단 사과를 하러 온 것이다. 지금 그레이스의 기분을 상하게 할 법한 말을 꺼내서 어디에 쓰냔 말이다.
“고아원 화재 사건을 떠올리면, 걱정이 듭니다. 부인께서는 저희 성녀님만큼이나 고귀하신 여인 아닙니까? 부인을 잃으면 제국이 흔들릴 겁니다.”
고아원 화재 사건을 떠올린 그레이스는 입꼬리가 파르르 흔들렸다.
‘겨우 잊고 있었는데 그걸 상기시키네.’
화재 사건 자체를 잊은 건 아니었다. 그때 들었던 말을 잊고 있었지.
뜬금없이 그레이스를 겨냥하는 말을 하며 쓰러진 원장.
떠올리니 속이 쓰려 커피를 더 이상 마실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거의 빈 보리스의 잔을 보며 손짓했다.
“그러고 보니, 커피를 즐기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예, 신전의 교리상.”
“그럼 펠튼 공작가에서 한 가지 다르게 즐기는 방법을 소개시켜 드릴게요.”
그레이스가 손짓하자, 하녀가 구석에 준비되어 있던 은색 통을 꺼내 왔다. 겉면에 서리가 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귀한 것을 대접받는군요.”
“귀한 분을 발걸음하게 하였으니 당연한 것 아닐까요?”
동그랗게 다듬어져 있는 새햐안 아이스크림 한 덩이가 보리스의 잔에 담겼다. 그다음 다시 새로 끓인 커피를 담자 봄을 맞이한 설원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렇게 즐기는 것도 좋답니다. 잔을 들어, 옆에 놓인 스푼으로 내용물부터 천천히 떠먹어 보세요.”
“……처음 보는 방식이군요.”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는 귀한 것 더하기 귀한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보리스는 생각보다 제대로 된 대접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당연히 좋겠지.’
그레이스야 보리스가 예뻐서 잘해 주는 게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 읽을 때는 참 좋아하는 캐릭터였는데, 이렇게 마주해 보니 좋아할 수가 없었다.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도 못하고 이리 대접만 받으니 제가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아뇨, 일단 긴장을 풀어야 무슨 이야기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레이스는 제가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벤자민에게 옮은 게 아닐지, 의심이 들었다.
‘고아원 원장을 부추긴 것도 어쩌면 신전일 가능성이 높겠어.’
몇 달 전의 그레이스였다면 의심하지 못하고 그냥 힘들어했겠지만, 지금은 굳이 이 이야기를 이 타이밍에 꺼내는 것이 심히 의심스러웠다.
‘아니더라도 원인을 알고 있는 쪽이라거나, 그걸 전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입장…….’
역시 신전은 계속 그레이스의 기분을 부정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쪽이었다.
커피를 마시는 척하며 그녀는 ‘그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조그마한 파열음과 동시에 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괘, 괜찮으세요?!”
하녀가 심히 당황하며 보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레이스도 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베네디크 사제님, 괜찮으세요?”
갑작스럽게 잔에 금이 가 깨져, 그의 새하얀 옷은 커피와 크림으로 얼룩져 지저분해졌다.
옷뿐 아니라, 손과 손목 안쪽까지 끈적하게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뚝뚝 흘러내리는 액체는 필시 발목도 적셨을 터였다.
근처에 서 있던 수습 사제와 신전 기사도 당황스러운 낯이었다. 보리스만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보기보다 뜨겁지 않으니까요.”
“제가 대접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제 불찰이에요. 어쩌죠…… 일단 씻으셔야겠네요.”
“아뇨, 옷은 신성력으로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러겠어요. 이런 사사로운 일에 베네디크 님의 신성력을 쓰게 할 순 없죠. 저는 사교계에서 더 이상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요.”
정화의 폭은 넓어서, 사실 이런 지저분한 것도 깨끗하게 하자면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이를 모르는 이유는 이런 일이 ‘사사로운 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신전은 신성력을 독점하고, 그러기에 그것을 자기들 멋대로 해석하며 과하게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이 신성력이기도 하지만.’
그레이스는 일전에 벤자민이 신전에 대해 말했던 회의적인 발언을 떠올렸다. 그들은 신성력을 사적인 데에는 쓰지 않는다고 말한 바가 있었다.
그런고로, 여기서 그레이스가 한번 반박하면 더 이상 보리스도 억지 부릴 수 없었다.
‘그래, 너희끼리 몰래 신성력을 한 방 세탁기로 쓰는 건 그렇다 쳐도 내 앞에서는 한 번 반박당하면 쓸 수 없는 게 맞지.’
자신들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 행동이니까.
보리스도 그것을 알았는지 침음을 흘리다가 옅게 미소 지었다.
“어째 자꾸 실례만 저지르는 것 같네요.”
“무엇을요, 저의 부족함 때문에 벌어진 일인걸요. 여기서 욕실은…… 본관이 가깝네요.”
그레이스는 하녀에게 얼른 준비하라고 이르며 보리스를 안내했다.
‘진짜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 맞지.’
사실 잔이 깨진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레이스가 마련한, 이미 깨져 있던 잔이었다.
깨진 잔을 다시 이어 붙이면 실금이 난 게 잘 보일 테니 내부에 화려한 무늬를 넣은 잔을 준비했다. 그다음, 아이스크림과 뜨거운 커피를 준비해 더욱 깨지기 쉽게 만들었다.
이미 한 번의 뜨거운 커피로 내구도가 아슬아슬해진 잔에 차가운 냉기와 열기를 가해 갈라지게 한 것이다.
‘솔직히 잔을 잠깐 내려다봤을 때는 금이 가 있는 걸 들킨 건가 하고 긴장했는데.’
만약 그가 잔의 상태를 알아봤으면 이 모든 계획을 전면으로 바꿔야 했다. 그레이스는 이제까지는 계획대로 되어서 안심했다.
“베네디크 사제님, 의상은 펠튼 공작가에서 준비할 테니 모쪼록 편히 계세요.”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이렇게 뜻하지 않게 욕실까지 빌리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제 마음이 불편하여 그렇답니다.”
“그렇다면, 부디 저와 함께 온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할 경우 편히 요청해 주세요.”
‘네, 그 말을 기다렸어요.’
그레이스는 예의상 ‘만약 있다면요.’ 하고 가볍게 대꾸했다.
보리스를 욕실 안에 넣고, 하녀들이 지저분한 의복을 받아 왔다. 그레이스는 하녀들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며 수습사제를 불러왔다.
“수습사제님, 보아하니 베네디크 사제님과 체구가 비슷해 보이던데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네, 부디 편히 말씀해 주세요.”
“제가 깜빡하고 보리스 사제님의 치수를 확인하지 못해서요. 그래서, 이 의복으로 확인해 보려고 했지만…….”
그레이스가 하녀가 들고 있는 의복을 슬쩍 들어 보였다. 평소 사람들이 입는 것과 달리 펄럭이는 모양새의 사제복은 치수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모양새니, 옷으로 대조하긴 어려워 보이네요.”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이러한 잔심부름을 시키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마차는 밖에 준비해 두었어요. 각하의 옷을 내어드릴 수는 없어, 펠튼 공작가의 이름으로 좋은 옷을 마련해 드릴 것을 약속드릴게요.”
그레이스가 당연히 저택 내의 옷을 마련해 줄 거라 생각했던 건지, 마차라는 말에 수습사제가 다소 당황한 낯을 보였다.
“근처 의상실이니,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예요. 펠튼 공작가의 기사도 한 명 대동하겠지만, 혹시 모르니 신전 기사님도 함께하시는 게 어떤가요?”
신전 기사가 뭐라 말하기 전에 그레이스는 막무가내로 밀고 나갔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신전은 늘 ‘선한’ 이미지를 표방하지 않는가.
“펠튼 공작가의 기사가 지금 개인적인 일로 인해 손이 부족해서요. 공작저 내부의 인원은 더 이상 빼기가 곤란하답니다. 물론 보리스 사제님의 신변은 걱정 마세요. 감히 공작저를 누가 위협할 수 있겠어요?”
“…….”
이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레이스가 미쳤다고 보리스를 공격하겠는가. 단지 무언가를 확인할 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다녀올 테니, 사제님을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죠.”
더군다나 이미 보리스가 그레이스에게 둘에게 얼마든지 도움을 요청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들은 상관의 허가가 내려온 이의 말을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둘 보냈고.’
아까 옷을 털어 보며, 그레이스가 찾던 것이 없는 걸 확인했다.
‘분명 있을 거거든, 없을 리가 없어.’
그녀는 정원에서 보았던 흐릿한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찡그렸다.
‘그렇다면…….’
그레이스는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욕실을 바라보았다.
‘직접 가서 찾아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