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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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에서 그레이스가 한 행동에 대한 소문이 제국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에 대한 추문을 싣는 가십지도 있었으나, 아무리 거짓을 부풀리려고 해도 진실을 본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사교계에 입김이 센 샤를 후작가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레이스를 통해 아리아를 만났는데, 그레이스가 없는 사이 아리아가 그저 호의로 샤를 소후작 부인에게 축복을 담은 말을 내렸다.
비공식적인 자리일지라도 성녀의 축복은 축복, 샤를 소후작 부인의 아이는 필시 건강하게 태어날 것이며 소후작 부인 또한 건강한 몸을 유지할 것이라 샤를 후작가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에 대한 감사 편지를 후작가가 보내자 그레이스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없던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다들 없었던 거구나.’
갑작스러운 성녀의 축복에, 샤를 소후작 부인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밖에 계속 있으면 축복이 다른 곳으로 흩어질까 빨리 귀가한 것이다.
주축이 사라졌으니 나머지 일원들도 짧은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졌고, 혼자 남은 아리아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리된 거였군…….’
이제야 알게 된 진상에 그레이스는 어이가 없어 그저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 덕을 본 샤를 후작가는 아리아를 소개시켜 준 그녀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그 뒤에 일어난 사건을 듣고 그레이스보다도 분노했다.
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위치를 적극 활용해 살롱이나 클럽에 나가 입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샤를 소후작 부인은 출산에 전념하여야 했기에 샤를 후작 부인이 직접 나섰는데, 곧 자리에서 물러날 이더라도 사교계에 더 오래 머물렀던 만큼 따르는 자도 많았다.
덕분에 가십지에 실린 추문을 다르게 해석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보리스가 오기 전, 가벼운 운동을 마치고 완벽한 손님맞이 준비를 한 그레이스는 시간이 남은 것을 알고 여유를 만끽하며 산책을 나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건 매우 기분이 좋아 보이는 벤자민의 얼굴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예,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연신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피식거리던 그는 정말 최대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억누르는 것 같았다.
“무엇이 그리 좋으신데요?”
저렇게까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또 드문 일이었기에 궁금해진 그레이스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사실 그간 제가 정작 하고 싶은 건 제대로 된 적이 없습니다만 이번에 조금 좋게 진행이 되어서 말입니다.”
“가문 일인가요?”
“따지고 보면 가문의 일이긴 하지요. 없으면 큰일 나니.”
‘마정석, 마도구 사업인가?’
하지만 그건 예전부터 탄탄대로였다. 그레이스는 대놓고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벤자민을 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는 다소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리 그런 표정을 지으셔도 안 됩니다. 이건 말하면 부인께서 저에게 실망하실 테니까요.”
“……흐음.”
그레이스는 침음을 흘리다가 벤자민의 복장을 살폈다. 그는 외투를 걸친 상태였다.
“그보다 어디 가시나요?”
“아, 부인과 가기 전에 개인적으로 약속이 있어 마도구 연합 본부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일로요? 선약이 있었던 건가요?”
“예, 일전에 잡아 두었습니다. 제가 바빠서 오늘로 잡았는데, 사제가 올 줄 알았으면 다른 날로 잡을 걸 그랬습니다. 미룰 수 없는 일이라 아쉽군요.”
사실 벤자민이 없으면 일을 벌이기 더 쉬웠기에 그레이스는 그저 웃었다.
“아뇨, 괜찮아요. 실수하지 않고 잘할게요.”
“실수라니요. 신전 측에서 부인께 결례를 저지르면 전부 다 기억해 두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저에게 말씀해 주시고, 두어 개 더 얹어도 괜찮습니다.”
대놓고 없는 사실까지 일러도 된다며 웃는 벤자민을 향해 그레이스가 입을 떠억 벌리려는 순간, 그가 또 소리 내어 웃었다.
“농담입니다.”
“그, 그렇죠?”
“아마도요.”
‘아마도?’
“예, 그런 행위는 범법이며 옳지 못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는 되도록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벤자민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그레이스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부인. 부디 당신께 불쾌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 다정한 말이었으나, 그레이스는 저 문장에서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요?’
그냥 이 저택 내에서 불온한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물론 그가 그레이스의 남편이었으니, 그녀를 걱정하는 건 옳았다.
하지만 부러 그녀만을 강조하는 것을 보아, 그 외의 다른 일은 아무리 터져도 그레이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벤자민의 권한 내에서 묻어 버리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아니, 이건 착각이 아니지.’
방금 벤자민은 없던 일도 꾸며내서 말해도 된다고 하였으니, 실제로 그러할 것이다. 그레이스는 그를 태운 마차가 떠나는 걸 배웅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흑화해서 폭주하는 거 진짜 엄청 뜬금없는 전개라고 생각했는데, 대화할수록 그럴 만한 성격이구나 싶네.’
생긴 거는 다정서브남의 정석이면서, 은근 성격이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런 벤자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착하기만 해서 호구 잡히는 것보다야 낫지 뭐.’
원작 소설 내에서는 맨날 허허실실 웃으며 이거저거 다 퍼 주는 모습도 종종 나왔었다. 그런 벤자민을 볼 때마다 펠튼 공작가가 저런 걸로 무너지진 않겠지만, 저렇게 주기만 해서 되나, 싶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와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나름대로 벤자민도 계산하고 베풀어 온 게 아닐까 싶어졌다.
“마님, 곧 시간입니다.”
“그래, 얼른 준비하자꾸나.”
그레이스는 바깥 가제보 쪽에 마련된 간단한 티 푸드를 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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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베네디크 사제님. 일정을 급히 조정하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잠시 숨이라도 돌리시는 게 어떨까요?”
그레이스는 보리스가 대동한 일원을 살폈다. 기사 한 명과 수습 사제 한 명으로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날 있었던 일을 사과하려고 온 건 아니네.’
설령 사과한다고 해도 신전의 공식적인 사과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건 너무 소규모임으로, 신전이 공작가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면 아무리 신전일지라도 썩 좋지 못한 영향을 받을 터였다.
‘지금 내가 황실에서 무슨 행동을 했는지 소문이 난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겠지.’
그레이스는 그곳에서 신전이 오해를 잘 수습해 주었다고 말했으나, 여기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면 그날 그레이스의 발언은 신전의 행동을 감싸 주려는 행보로 읽히게 되었다.
‘즉, 오늘은 사과한다고 해도 그게 본 목적은 아니야.’
마차도 그리 화려하지 않아 눈에 띄지 않았고, 인원수도 적으며 선물도 들고 오지 않았다.
짧은 추론을 마친 뒤, 그레이스는 준비된 자리에 보리스를 안내했다.
차 대신 커피가 마련된 테이블이었다.
“커피로군요.”
“네, 베네디크 사제님께서는 커피를 즐기시나요?”
“신전에서 자유롭게 마시기엔 사치품에 속하여, 가끔 보기만 하였습니다. 공작 부인 덕분에 분에 겨운 것을 즐기는군요.”
“무엇을요.”
그레이스는 옅게 미소 지으며 옆에 서 있던 하녀에게 손짓했다. 그녀는 내부가 화려한 컵을 두 사람 앞에 내려 두었다.
보리스는 제 앞에 놓인 잔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미리 갈아 둔 가루로 내린 커피는 향긋한 향을 풍기며 잔에 가득 채워졌고, 보리스는 잠시 향을 음미하고 한 모금 목을 축인 뒤 입을 열었다.
“부인께 공식적으로 사과를 드리는 것은, 신전 수뇌부가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은 그저 지나가기엔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죠.”
‘그냥 넘어가려고 했으면서.’
그레이스는 순간 배배 꼬인 생각이 툭, 하고 튀어나왔지만 숨겼다.
‘역시 황실에서 했던 일로 크게 소문이 나서 이러는 거려나.’
더군다나 벤자민이 미리 가서 다정한 협박과 뇌물 아닌 뇌물까지 쥐여 줘 버렸으니, 신전 측에서는 그때의 일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벤자민이 미리 취한 행동이 도움이 되었어.’
지금 당장 신전이 할 수 있는 건 벤자민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내 비위 맞추는 시늉하기?’
사실 그레이스는 오늘 보리스가 와서 무슨 말을 할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공식적인 사과를 따로 한다면, 오늘의 목적이 따로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게 정말 뭔지 모르겠어.’
그거까지 알면 공작 부인 때려치우고 탐정을 했겠다만. 그레이스는 피식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앞에 앉아 있던 보리스의 손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
아주 잠깐이었으나, 사람의 반응에 민감한 그레이스는 모를 수가 없었다.
“전에 뵈었을 때보다 많이 밝아지셨습니다.”
“그래 보이나요?”
“예, 그래서 다행입니다. 걱정이 많았거든요. 신전에서 간간이 공작 부인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는데,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더욱이 걱정이 컸습니다.”
“…….”
그레이스는 근처에 있던 케이크를 보리스 쪽으로 밀어 주며 넌지시 물었다.
“저에 대한 보고를 베네디크 사제님께서 읽어 보시나요?”
“모쪼록 기분 나쁘지 않길 바랍니다. 공작 각하께서 부인의 상태를 보살펴 달라 하여 주기적으로 보곤 하였으니까요.”
“아뇨, 그저 그것이 신전의 의무가 아닌데 미안해서요.”
그레이스의 머릿속에 아주 예전에 보았던 것이 스쳐 지나갔다.
‘전에 있던 일기장.’
주기적으로 체크되어 있던 일기장, 그리고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했던 내용물.
‘그게 그래서 그런 거였나?’
그레이스의 추측을 확신이라도 시켜 주려는 양, 보리스가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기는 열심히 쓰셨나요?”
“…….”
“우울할 때는 원래 일기를 매일 쓰는 것이 도움이 되니까요.”
“……요즘 바빠서 제대로 쓰지를 못했네요. 미안해요.”
그레이스의 안에서 무언가 다른 확신이 들었다.
‘원래의 그레이스도 이상한 걸 알고 있었어…….’
그러지 않다면 대외용 일기장을 만들 이유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