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그레이스는 버킨이 하는 행동을 조용히 주시했다. 버킨은 약의 내용물을 하나씩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법에 따라 약은 전부 모양이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일반인은 잘 모르지만, 약제사들은 이것을 반드시 지키며 이 모양을 보고 약을 구분하죠.”
“흐음.”
버킨은 그리 말하며 그레이스에게 펼쳐진 책을 스윽 밀어 주었다. 영양제를 기록한 페이지였다.
“영양제군.”
“예, 이 알약과 모양이 전부 똑같죠?”
“음…….”
벤자민이 영양제라고 말했던 것이 떠오르며 그레이스는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게 영양제라면 좋지 않은 소식이라고 할 필요가 없을 텐데.”
혹시 같이 복용하면 큰일이라거나, 그런 건가? 그레이스가 책을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아뇨. 차라리 그거라면 다행입니다만, 이 경우에는 바꿔치기입니다.”
“……?”
버킨은 그리 말하며 알약을 물에 퐁당 넣어 가느다란 막대기로 휘저었다.
“보통 영양제는 아이들도 섭취하기 때문에 알약을 먹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액체에 잘 녹게끔 만듭니다.”
그러나 그의 설명과는 달리 컵 안의 약은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이시죠?”
“…….”
그레이스는 물 컵에 남아 있는 약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물었다.
“그럼 이건 무슨 약이지?”
“그걸 알아보느라 시간이 다소 걸렸습니다.”
진짜 힘들었는지 여기서 버킨의 목소리에 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하나는 진정제입니다. 하지만 예전에 판매 중지가 된 것으로, 사유를 말하자면 진정시키기보다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어 이지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판명 낫기 때문이죠.”
“…….”
“그리고 여기 이 두 가지 약은 증폭제의 일환인데, 사실 이렇게 동시에 섭취하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죽으라고 고사지내는 수준이죠.”
“……증폭제?”
“예, 마도구사나 마법사, 사제들이 마력이나 신성력을 높이기 위해 섭취하는 것입니다. 효과는 미미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아 꾸준히 섭취하죠. 약제사 연합이 이걸로 컸습니다.”
“아하…….”
“따로 먹으면 상관없고, 일반인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약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같이 먹으면 어떨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레이스 또한 버킨이 왜 이리 반응하는지 이유를 알았기에 눈을 찡그렸다.
‘신성력과 마력은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은 거 같으니까.’
마도구가 폭주하거나 망가지는 원인에는 신성력이 존재했다.
게이트 참사가 벌어진 이유 중 일반 제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그것은 바로 신성력의 유무였다.
이는 보유하고 있는 신성력의 정도에 따라 달랐으며, 양이 방대하면 멀미로 그치지 않고 마도구를 망가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신성력을 가진 사제들은 신전에 들어가면 전부 제 힘을 평소에 절제하고 다스리는 교육부터 받았다.
‘그래서 신전 내에서는 마도구를 쓸 때 더 유의한다고 했던가……?’
가물가물한, 원작에서 읽은 설정인지 원래 그레이스가 알고 있었는지 모르는 지식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마력 증폭제를 사제에게 먹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젠 제국 사람들은 아주 소량이라도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법을 쓸 수 있고 없고의 자질을 떠나서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부분이었기에 다들 깊게 생각하지 않는 공기와도 같은 것.
그것이 제국민이 가지고 있는 마력의 존재 가치였다.
그레이스의 질문에 버킨이 답했다.
“글쎄요, 어차피 마법사나 마도구사 외의 인간은 마력이 있으나 마나 하니 약간의 파동이 일다 말겠죠. 사제들은 전부 신성력의 제어가 탁월하니 그리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성력 증폭제도 같이 먹으면 변화가 있지 않을까?”
“……!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마력은 그렇다 쳐도, 신성력은 누구에게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버킨의 질문은 타당했다. 마력과 달리 신성력은 일부에게만 주어지는 권능과도 같은 힘이었고, 이것이 신전의 위상을 드높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신성력과 마력의 충돌에 대해 알려지지 않도록 유의했다.
‘버킨이 대충 알고 있는 걸 보면,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는 정보인 거 같지만.’
“그러면 버킨, 그대는 왜 나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라고 한 거지?”
“나머지 약 때문입니다만.”
그는 한 가지를 더 가리켰다.
“이것, 수면 중독제입니다.”
“수면제가 아니라?”
보통은 수면제라고 하지 않나? 생소한 표현에 그레이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수면제는 잠드는 것을 돕는다면, 수면 중독제는 잠자고 싶게 만드는 것이죠.”
그레이스는 둘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해 잠시 침묵했다. 톰 버킨은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이어 갔다.
“깨어 있어도 계속 자고 싶게 만드는 겁니다. 피곤하지 않아도 피곤하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언제든지 잠들고 싶게 만들죠.”
“이런 약이 왜 세상에 있는 거지?”
“세상에는 이런 약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레이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약을 내려다보았다.
“사제들에게도 약이 통하나?”
보유하고 있는 신성력의 강도에 따라 다르지만 오염된 것을 정화하고, 온갖 질병을 정화할 수 있는 자들이 사제였다.
‘약과 독의 차이는 투입하는 용량의 차이라고도 하니까.’
그 맥락이라면 약도 정화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문이 들었다.
“사제들은 처음 신전에 들어가서부터 신성력을 자제하는 교육을 받고, 사적인 공간에서는 가급적 사용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약을 쓰기도 한다고 합니다.”
‘흠…….’
“그런데 이 약의 내용물은 어떻게 알았지? 특징이라도 있나?”
“증폭제의 경우에는 도구를 사용해서 알았지만, 진정제와 수면 중독제는 버터나 우유 같은 것에 잘 녹아든다는 성질이 있어서요. 물론 다른 약 중에도 그런 성질이 있어서, 교집합 중에서 추려내는 데 시간이 걸렸죠.”
“생각보다 능력이 더 좋구나.”
“욕입니까, 칭찬입니까?”
“칭찬이지.”
일단은. 그레이스는 속으로 삼켰다.
‘그보다 버터나 우유라, 유지방에 녹는 성분이 있는 거구나. 사용할 수 있겠어.’
문득, 이상한 점이 떠오른 그레이스가 물었다.
“이 약은 신전에서 처방받은 것 같던데, 약제사 연합이 따로 있다면 왜 굳이 신전에서 처방받은 거지?”
“그건 약제사 연합이 신전과 동업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보통 치료와 정화는 신전의 영역이라고 보고 있기에, 신전의 보증을 받으면 제국민이 더욱 안심하고 섭취할 거라는 자르테 공작의 판단하에 결정된 일이었죠.”
“그래서 약의 가격이 저렴한 것인가?”
“그것도 있겠습니다. 대외적으로 신전은 돈을 좇아서는 안 되니 말입니다.”
“흠…….”
“더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그레이스는 테이블을 손으로 두드리다가 고개를 한번 젓고, 그다음 끄덕였다.
“이 건은 끝났네. 그럼 이다음으로는 ‘지지 않는 꽃’에 대해 알아봐 주길 바라. 이미 ‘세이렌의 노래’ 상단주가 알아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따로 알아보고, 대조한 뒤 그 정보를 전부 다 가져와 주길 바라는 거군요.”
“그런 거지. 바로 이해해 주어서 기쁘네.”
용건을 전부 전달한 그레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버킨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공작 부인,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왜 그러지?”
“상단주께서 부인께 전달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헤어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두툼한 편지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걸 우편으로 보내지 않고, 굳이 사람을 통해서 전달한다는 건 그만큼 조심스러운 이야기란 건데.’
최근 들어 시레니가 저에게 그럴 만한 이슈가 있던가? 그녀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고맙다고 전해 주게나.”
⋆★⋆
그레이스 펠튼, 펠튼 공작 부인은 제도…… 아니, 더 나아가 제국 전체의 웃음거리였다.
못난 공작 부인. 펠튼 공작가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은 추하고 못난 여성.
그것이 그녀를 가리키는 말의 전부였다.
‘질리도록 들었지.’
소설 속에서도, 이 몸에 들어와 그레이스가 된 후로 계속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마저도.
그레이스를 좋게 이야기하는 타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새삼 이것을 떠올리는 이유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편지 때문이다. 마차 안에서 편지를 읽던 그레이스는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그레이스의 소문을 퍼트린 이들에 대해 조사해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전부 익명으로 투고되고, 몇은 추적해 보니 모두 귀족가의 고용인이더군요.]
“…….”
어느 귀족가의 고용인인지 전부 밝혀진 건 아니었지만, 시레니는 알아낸 이름을 전부 편지에 적어 주었다. 그리고 그중 그레이스가 알고 있는 이름도 있었다.
‘앙글레즈 자작가.’
이런 악소문을 굳이 고용인을 사용해 익명 투고까지 했다면 이건 개인이 아니라 가문 차원의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그날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네.’
원작의 전개에서 배역이 바뀐 채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그레이스는 생각을 바꿨다.
‘애초에 날 노린 거야.’
그렇다면 누가? 왜? 하는 의문이 이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상한 건 당연히 신전이지.’
이미 ‘누가’는 어느 정도 충족된 상태였다. 물론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했지만, 이번에 보리스 사제를 잘 이용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신전이 굳이 그레이스를 이렇게까지 고립시키려고 할 만한 이유가 있는가? 이에 대한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쪽이 날 괴롭혀서 얻는 이득이 뭐가 있지?’
벤자민의 기부? 그레이스는 고개를 슬슬 내저었다.
‘그건 아닐 거야. 전대 공작 때부터 지금까지 벤자민은 똑같이 기부를 잘 했던 거 같으니까.’
펠튼 공작가가 그동안 신전에 낸 헌납금을 생각하면 그들이 굳이 그레이스를 괴롭힐 이유는 없었다.
‘날 괴롭혀서 그걸로 인해 벤자민을 불안하게 만들어, 돈을 더 뜯어내려고 한 건가?’
실제로 벤자민은 그로 인해 계속 사제를 불러들인 것 같았다.
‘효과가 그다지 있던 거 같진 않지만.’
그레이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그 순간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그레이스는 저택 본관 앞에 멈춘 마차에서 내리며 대기하고 있던 집사에게 물었다.
“보리스 사제는 언제 오기로 되었지?”
“다음 주입니다.”
“그래…….”
너무 이르지도 촉박하지도 않은 때였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별관 쪽을 보았다. 검은 안개가 미미하게 보였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이용해 주지.’
“그래도 바쁜 이를 부르는 것이니, 준비를 소홀히 하면 안 되겠지. 집사장,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