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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공작의 못난이 부인 (109)화 (109/131)

109화

⋆★⋆

“……그래서, 이 보고가 사실인가?”

집무실 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아벨에게 향했다.

“네, 각하.”

아벨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끄덕였다.

“하아…….”

벤자민은 귀찮게 되었다는 기색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중간까지는 나쁘지 않았는데.’

초상화 교체 건에 대한 이야기를 그레이스에게 한 이유는 그녀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둘은 현재 이혼 조정 기간이었다. 몇 개월 남지 않은 기간이었고, 그동안 초상화를 그리기엔 시간이 한참 부족했다.

게다가, 이혼을 할 거라면 새 초상화는 필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부인께서는 부정하지 않았지.’

즉, 그레이스는 현 부부 관계에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황제에게 한 청이 단둘이 있던 자리에서 이루어진 만큼, 정정할 여지는 있었다.

그러나 그레이스가 싫어하지 않았으니, 벤자민은 굳이 그의 청을 무르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잘 밀고 나가면 이혼하지 않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지금 당장 법관을 찾아가야겠군.”

벤자민이 들고 있던 서류에는 ‘르마네티’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암살 미수범이 르마네티 남작이라.’

그리고 범행을 자백하는 유서와 함께 돌연 자살. 르마네티 남작이 누군가 했더니 신흥 귀족 세력이 생겨나며 파르머 백작이 몰래 산 다른 작위, 즉 이중 신분이었다.

그는 황태자를 비난하는 내용을 한가득 담은 유서를 남겼고, 이것이 밝혀지면 온 가족이 역모로 몰릴 것이다.

‘그래, 가족이 역모의 죄를 입는다.’

벤자민의 얼굴에 핏줄이 빠득 하고 올랐다. 그의 아내는 글로리아, 그레이스의 언니였다. 그레이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리 이제 가족을 보지 않기로 했어도 신경 쓸 게 자명했다.

“이 사실이 온 제국에 알려지기 전에 글로리아 파르머의 신분을 글로리아 린덴으로 돌려놓도록.”

“알겠습니다.”

르마네티 남작에 대해 거의 다 알아냈는데, 꼬리를 잡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벤자민의 머리에 차가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꼬리 자르기군.’

그는 제 사람을 건드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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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가장 상쾌한 아침이었다.

‘머리가 덜 아파.’

그레이스는 몸을 일으킬 때 평소보다 몸이 가벼운 게 느껴졌다. 아주 미미한 차이였으나, 평소의 컨디션이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이런 미세한 차이마저 알아챌 수 있었다.

고작 조금 나아진 정도인데도, 그레이스는 다른 사람들은 이런 기분으로 살아가는 건가? 하며 감탄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별관이 문제가 맞았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게 치면 서부 원정을 나갔을 때는 왜 안 괜찮았던 거지?’

그레이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때와 지금의 차이를 생각해 보다 손으로 푹신한 시트를 눌렀다.

‘침대의 차이인가.’

확실히 공작가의 침대는 장난 아니게 푹신하긴 했다. 자작가에서 잠시 머물며 썼던 것은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었고, 별관에서와 달리 안개 때문에 긴장할 필요도 없었으니 푹 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건가 보다.’

그레이스는 납득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설렁줄을 당기기 전에 가져온 종이를 확인하기로 했다.

‘연필은 없으니까, 대체품을 사용해야지.’

석탄을 지금 당장 찾을 수는 없다. 그레이스는 두리번거리다가 불이 꺼져 가는 벽난로를 발견했다.

난로를 마도구로 유지하는 게 정석이나, 현재 그레이스의 방은 한동안 비어 있었기에 보온 마도구가 원활히 돌아가지 않았다.

청소는 꾸준히 하고 있었기에 벽난로는 깔끔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벽난로가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지.’

그레이스는 옆에 있는 부지깽이로 벽난로 안을 뒤적였다. 꺼져 가는 불 틈 사이로 완벽히 까맣게 타 버린 나무가 나왔다.

집게로 작은 것을 하나 집어 낸 뒤, 후후 식혔다.

“이 정도면 됐나?”

조심조심 손가락으로 만지니 따끈따끈하긴 해도 못 만질 정도는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쪽지를 펼치고, 레터나이프로 갉아 검댕을 만들어 종이 위에 살살 문질렀다.

“…….”

조심스럽게 문지르면, 무언가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종이가 뜯긴 자국이 있었거든. 아예 새 거로 갈아치운 게 아니라 이름을 적은 종이를 누군가가 뜯어 갔다는 거야.’

대체 왜 뜯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살 문지르던 그레이스는 어떤 이름을 발견하고 우뚝 멈췄다. 딱 한 사람의 기록만 남아 있었다.

“……음?”

완벽한 형태는 아니었지만 흐릿하게 남은 잔상으로도 이름을 읽기 충분했고, 그레이스도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르마네티.’

“……이 이름이 여기서?”

글로리아가 떠오르며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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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이미 린덴 자작가와 연을 끊기로 다짐한 바가 있었지만, 르마네티라는 이름을 본 이후로 글로리아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오지랖인가.’

벤자민과의 아침 식사 시간에도 멍하니 앞에 있는 그릇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신경 쓸 건 아닐 텐데.’

제도로 올라온 뒤 벤자민이 린덴 자작가의 빚도 갚아 줬을 테고, 나머지 처신은 글로리아가 알아서 했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스푼 손잡이를 매만지며 수프를 휘젓기만 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벤자민이 물었다.

“부인,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습관처럼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하려던 그녀가 ‘아.’ 하며 끄덕였다.

“이미 다 끝났을 일을 끌고 와서 죄송하지만, 물어보긴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부인께서 저에게 죄송할 일은 없습니다. 궁금하다면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언니에 관한 일이에요.”

그레이스가 힐끗, 벤자민의 눈치를 살피며 글로리아에 대한 운을 띄었다. 식기를 쥐고 있던 벤자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으나 그레이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린덴 자작령의 빚은 르마네티 남작에 의해 생긴 것이고, 그자가 언니와 관련이 있는 자인 것 같은데 괜찮은 걸까요?”

“일전에 부인께 들은 바가 있었죠.”

벤자민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린덴 자작령의 빚 차용증을 다른 자의 이름으로 구매하여 추적해, 어떻게 된 경위인지 전부 조사하였습니다.”

그사이에 어렴풋이 빈 구멍이 있던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요, 벤자민이 덧붙였다.

“근래, 자작령은 자작령 출입구를 하나 더 추가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위한 공사가 필요하였고, 공사를 하기 이전에 그 부근에 사는 주민들의 협조 또한 필요했죠.”

“그런데 공사비가 부족했던 거군요.”

“네, 그겁니다. 공사비를 충족할 자산도 없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고, 결국 새로운 문을 만들기는커녕 공사를 시작도 못 했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

린덴 자작령이 발전하지 못한 큰 이유 중 하나는 불편한 출입이었다.

이제까지는 그에 대해 전통이라는 이유로 바꿀 생각이 없었으나, 시간이 흘러서인지 자작은 생각을 바꿨다.

‘성공만 했으면 자작령도 발전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로 인해 큰 빚을 진 그는 그른 선택을 저질러 버렸다. 그레이스는 입술을 짓이겼다.

린덴 자작이 펠튼 공작이 아니라 르마네티 남작에게 돈을 빌리게 된 것은 그레이스가 두문불출한 것도 있었으나, 펠튼 공작이 지나치게 높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파르머 백작이 잘 아는 르마네티 남작이라는 자는 신흥 귀족이었고 그렇기에 유서 깊은 린덴 자작가와의 유착을 원한다, 라는 이미지로 그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한마디로 린덴 자작이 좀 더 우위에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린덴 자작가는 많은 이들에게 잊혀 갔지만 역사만큼은 깊은 귀족 가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글로리아 언니가 내막을 알게 된 거겠지.’

파르머 백작이 바로 그 르마네티 남작이라는 것을.

외형을 감추는 마도구는 공식적으로 세상에 출하되지 않았다. 소설 내에서도 유일하게 등장한 것이 벤자민이 아리아에게 준 것, 즉 그레이스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소설 내에서 안 나온 이야기들이 이미 많이 나왔으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즉, 이름 정도는 서류로 속일 수 있어도 외형은 속이는 데에 한계가 있었기에 추적하면 르마네티 남작과 파르머 백작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언니가 이혼을 했을까?’

파르머 백작이 얼마큼 대단한 위치인지는 몰라도, 대귀족은 아니었다. 그레이스와 같은 이혼 절차가 필요하진 않았다.

‘어라, 맞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레이스는 지금이 이혼 숙려 기간이고 어쩌면 이혼을 할지도 모르는데 새 초상화를 수락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었나? 하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걸 잊고 있었다니 나도 참 정신없구나.’

“그러고 보니까, 각하, 저희 초상화 말이에요. 제가 잊고 있었는데 지금 우리가 이…….”

“부인의 언니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벤자민은 평소 그레이스의 말을 끊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어쩌다 끊는다고 해도 당황하며 그레이스가 말을 다시금 하길 권유했지만 이번에는 그러긴커녕 멀끔한 낯으로 말을 이어 갔다.

“이번에 알아보니 글로리아 양은 이혼 절차를 이미 진행하여 완료된 것으로 보이더군요.”

“지, 진짜요?”

“네, 르마네티 남작 관련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한들 글로리아 양과 린덴 자작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평소의 그레이스라면 벤자민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음을 눈치챌 법도 했지만, 해당 소식이 너무 다행스러웠기에 알아채지 못했다.

“제가 이걸로 거짓을 고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멀끔한 낯으로 웃었다.

“두 사람은 완벽히 남남이니 부인께서는 하등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고마워요.”

“무엇을요. 그보다, 부인 앞으로 편지가 왔던데 확인해 보시지요.”

벤자민이 손짓하자 집사가 쟁반에 편지를 담아 왔다.

“……!”

‘버킨이 보낸 편지야.’

그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발신지가 그레이스가 버킨을 맡겼던 공방 주소였다.

‘이번에 세이렌의 노래와 계약하면서 그 공방은 확장 이전했으니 이 주소로 보낼 사람은 버킨뿐이지.’

그레이스는 읽은 자국 하나 없는 편지를 미심쩍은 눈으로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레터나이프를 사용해 개봉했다.

이 시기에 그가 편지를 보냈다면 내용은 딱 하나였다.

‘시레니를 만나더니 정보량이 확 늘었나 봐.’

약의 내용물이 무엇인지에 관해 알게 된 것이다.

‘보리스가 조만간 올 거야.’

그레이스는 황실 정원에서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렸다. 영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지금 당장 외면해서는 안 되는 정보였다.

‘역시, 약에 관해 알게 되었고 직접 설명하게 찾아오라는 이야기네.’

“각하, 티백 사업 관련으로 계약했던 직물 공방이 확장하며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잠시 제가 직접 다녀와도 될까요? 아무래도 제도에서는 제가 유일한 책임자니까요.”

“물론이죠. 다만 이번에는 제대로 호위와 하녀를 대동하길 바랍니다.”

“걱정 마세요.”

그레이스는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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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 혼잡한 것 같으니 여기서 기다려 줘.”

그레이스는 기사와 하녀를 밖에 세워 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

톰 버킨은 예전, 지하 감옥에서 보았을 때보다 살이 빠졌지만 멀끔한 낯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부인.”

“버킨, 잘 지냈나?”

그레이스는 부러 그에게 위엄 있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잘 지냈죠. 신전에서 절 없애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하도 일이 많아서 그런지 건들지도 않더군요.”

“그리고?”

“그러다가 ‘세이렌의 노래’에서 이 공방을 차지하고 제 신원을 보호해 준 덕에 안전했고요.”

“좋은 소식이군.”

전부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모르는 척, 끄덕였다. 그레이스가 자리에 앉자 톰 버킨도 고개를 까딱이며 약 봉투와 컵을 꺼냈다.

“다만, 이건 좋지 않은 소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인은 이 약을 언제부터 드셨습니까?”

“……한 1년 정도 전부터가 아닐까 싶네.”

그레이스는 그녀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 시점을 말했다.

“그렇다면 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겠군요.”

“……대체 무엇인데 그러지?”

“그걸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버킨은 컵에 물을 따르고 봉투를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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